모든 외국어간의 관계가 그러하듯 영어와 한국어도 의미의 일대일 대응은 불성립한다. 단적으로만 보더라도 'make'나 'get' 'have'에서 보듯 '일어일의'한 경우는 드물고 이가 맞지않는 파편 조각처럼 의미의 외연은 물론, 범주와 층위가 맞지 않거나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또는 이미 뜻을 안다고 착각하다가 저지르는 의도치않은 오역은 불성실하다는 점에서 직업 윤리 위배이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경계심에 편 사전에서 그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숙어와 합성어, 속어, 유행어, 유명하지 않은 은어, 고어를 그리고 영영사전에서 한 열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뜻이 발견되기도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을 할 때는 차라리 내가 해당 외국어를 완전히 모른다고 가정하고 일일이 사전을 찾으면서 옮기는 것만이 역설적으로 착오를 줄이는 (이론상)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명사도 마찬가지다. 한글로 표기한 '에세이'는 '수필'이자 '잡문'이고 때로는 '칼럼'의 갈래이자 다시 이 모두를 포함하는 '산문' 전체를 통칭하는 외래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 'essay'는 결코 '손 가는 대로(隨筆)' 쓰는 글도, '잡스러운(雜文)' 글도 아니다. 'essay'는 형식이 다양한 글이지 무형식의 글이 아니므로. 차라리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거나 모두에 해당한다고 하는 편이 옳다. 즉 한국어 용법상의 '에세이'가 포함하는 외연이 넓은 나머지 언어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인플레이션 진행중인 화폐가 그러하듯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언어의 실질적 값어치도 하락한다.

 

영어권, 적어도 대학에서 'essay'는 정식 논문에 비하면 한창 짧지만 그만큼 한정된 주제를 깊게 다루는 학술문의 한 갈래다. 학술문으로서 갖추어야할 성실하고 양심적인 레퍼런스 작성과 표절 회피는 최소 요건, 즉 기본 사항일 뿐이고 여기에 세심한 선행 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논지 개진 그리고 간결하지만 명징한 논증 과정이 서술되어야 훌륭한(또는 읽을만한) '에세이'가 된다. 그렇다면 이같은 학계의 관습, 그리고 잡지나 저널, 신문 같은 언론을 포함한 광의의 '문학'계에서의 용법까지 고려해볼 때 에세이의 '비평문'으로의 분류야말로 의미의 스펙트럼상 중간값에 위치하며 동시에 가장 범용하지 않을까. 비평의 언어와 표현의 언어 사이에서 흔들린다면서 비평과 창작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가운데 두 장르에 전부 걸친 글을 썼던 바르트, 그리고 에세이는 에세이의 규칙을 창조하는 게임이라는 마이클 햄버거의 주장도 (메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의 윤곽을 그리는데 도움을 준다. 그중에서도, 어떤 결론도 내지 않은 채 그저 문서고 이곳저곳을 뒤져 찾아낸 문헌들을 떠돌아다니며 참조하는 것이 비평이라는 아감벤의 말이야말로 비평으로서의 에세이를 규정할 때 늘 참고할만하다. "모든 정통한 연구와 마찬가지로 비평 역시 연구 대상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대상의 접근 불가능성을 규명하는 데 주력한다". 결론이 없는 글이란 점은 언제봐도 좋다. 형식으로서의 에세이의 징표일테니까. 대상의 명확한 정체를 저자가 명시하지 않아도 독자가 그 임무를 이어받아 상상 속에서 계속 이어 쓰는 글, 이것이 에세이의 정체가 아닐까. 

 

'隨筆'이라는 명칭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지만 글쓰기의 장르로서 외래어 '에세이'에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각종 외국어와 외래어가 대량으로 수입되던 근대 이후일거라 짐작되는데, 그렇게 '에세이'의 도입 이후부터 '수필'은 본격적으로 다종다양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에세이'는 '수필'에 대응하는 외래어가 아니다. '수필'의 번역어가 아닌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수필'을 포함할 수는 있어도 환원될 수 없는, 외연이 넓어질지언정 그 전부를 포함한 총체는 될 수 없는 엄연히 독자적인 영역인 것이다. 수필의 정의와 분류에 관해서는 이미 분분한 논의가 나왔고 지금도 출판이 계속되는 한 그 변천은 진행중이다. 그러니 세세한 국문학적 검토는 차치하고, 우선 작금의 출판 동향으로만 본다면 저자의 '신변잡기'를 다룬 글을 '에세이'로 칭하는 경향은 분명히 있는 듯하다. 실제 일본(어)에서 어떻게 분류 및 표기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무라카미 아사히도 시리즈와 언더그라운드 연작처럼 서로 상반된 형식과 내용의 논픽션을 모두 '산문' 내지 '에세이'라 하는듯하고, 비슷하게 국내에서는 주로 문단 바깥에 종사하는 공인이나 유명 인사가 자신의 직업 세계나 (사)생활상의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생각 또는 특정한 견해나 주장을 주로 일인칭으로 풀어낸 글을 "(충격) '수기'", '에세이' '산문' 등으로 지칭한다. 한마디로 '미셀러니'는 넘쳐나는데 반해 '에세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에세이'와 '미셀러니'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생긴 언어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에세이는 진지하지 않은, 가벼운,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써볼 수 있는 시험적인(실험적이지는 않은) 문학 양식으로 통용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작은 결점도 쉽게 양해받지 못하고 진입 조건을 통과함과 동시에 양질을 보장할 때 비로소 에세이로서의 지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온당한 지위가 먼저 주어질 때 그에 걸맞은 질이 담보될 수는 없을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대신 진지한 사유와 장황한 사변, 쇄말적 흥미와 사적 고민, 그리고 비판적 논평과 자기반영적 성찰이 담긴 논픽션이야말로 '에세이'의 자격을 얻는 게 아닐까.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선행 조건은 한 가지다. 읽을만한 좋은 에세이들이 먼저 소개되는 것.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즘>의 첫 챕터를 읽으면서 느낀 아쉬움이 바로 이것이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말그대로 쏟아내듯이 던져지는 많은 에세이의 태반이 국내에는 미번역이었기 때문이다. 읽을만한 '본연의' 에세이가 소개되고 읽히면 'essay'가 아닌 '에세이'의 지위가 변화할테고, 그런 글을 읽은 한국어 사용자들의 '에세이'도 나올 것이다. 바로 내가 그랬다. 딜런이 쓴 일련의 에세이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저런 글을 한번쯤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으니까. 

 

교양이란 앎의 자기 갱신이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정의를 빌리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고착화된 스타일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자기 갱신하는 산문, 그것이 에세이다. 거기에 지속적으로 달라지려 애쓰는 저자의 노력과 수고까지도. 그래서 에세이는 단일한 대문자 'Essay'가 아니라 에세이'들'이 있을 뿐이다. 열 명의 저자가 서로 다른 열 개의 에세이 형식을 고안해내는 자유로움이야말로 에세이의 최고 장점이 아닐까. 팩트와 세세한 숫자보다는 과감한 비약과 담대한 상상과 그럴싸한 과장으로 채워진, 논리의 연쇄를 따르는 바쁜 잰걸음보다는 직관과 즉흥성을 따라 훌훌 유유히 날아가는 그런 글. 

 

그런 점에서 수필은 '청한(淸閑)의 문학'이라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말은 반만 맞다. 형식적으로 느슨하고 내용적으로 사물을 관조하는 유유자적한 은둔자의 글쓰기일 수도 있지만 감성과 이지가 엮여들고 논리와 객관이 직관 및 주관과 교차하는 가운데 각성과 환기를 촉발하는, 세속에 들어앉은 명민한 관찰자의 글쓰기도 에세이라는, 역시 또 하나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정의를 보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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