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라고 쓰는 것만큼 기실 우연하지 않은 것도 없지않을까 싶지만 정말 우연히 지난 밤, 비슷한 절정부를 공유하는 80년대 일본 영화 두 편을 연이어 보았다. 얼마전 타계한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이인들과 함께한 여름>(1988)과 모리타 요시미츠의 <두근두근 죽는다>(1984). 그런데 두 영화 모두 공통적으로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이 피칠갑을 한다. 전자에서는 알고보니 유령이었던 연인의 피를 뒤집어쓰게 되고 후자에서는 차 안에서 칼로 자결하는 장면이었다. 차이점도 있다. 전자에서는 그러한 절정부를 지나 주인공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반면, 당연히 후자에서는 주인공은 죽고 함께 지냈던 두 사람의 남아있는 모습으로 끝난다. 두 편 모두 피의 양이나 솟구치는 정도가 왠만한 고어물이나 스플래터물에 비견될 수준으로 길고 강렬하게 연출되어 있는데, 특히 전자에서는 해당 장면이 아예 흑백으로 처리되어있는 지경이다.

 

저명한 tv 드라마 작가인 야마다 타이치가 각본을 쓴 전자에서, 마흔이 된 주인공 드라마 작가는(야마다와 직업이 같다) 아사쿠사에 라쿠고를 보러갔다가 어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양친의 유령과 재회한 후 그들이 사는 집에 찾아가곤 한다. 재밌는 점은 유령을 만나는 이세계가 지금 살고있는 현실 세계와 구분되어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 즉 이승과 저승간 명확한 경계가 없는 상태라 언제든지 찾아가면 지금 자기 나이대와 비슷한 과거의 부모님을 만나볼 수 있다. 꿈을 꾼다든지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든지, 벽장 뒤로 들어간다든지 타임머신을 탄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거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이 설정은 살짝 백투더퓨처를 연상시키는데 아닌게 아니라 여기서도 주인공과 유령 엄마간에 묘한 성적 긴장감이 배어있다. 백투더퓨처와 다른 점은 이 유령 부부와 아들이 서로가 부모 자식간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일찍 죽은 탓에 아들이 고생을 하며 힘들게 커서 불쌍하다는 대사도 나온다. 그럼에도 모자간에 성적 긴장감이 흐른다는 점은 그래서 특기할만하다. 물론 향후 이 점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지만. 연도상으로 보면 본작이 백투더퓨처보다 일 년 먼저 공개됐다.

 

후자는 최근 인터넷으로 공개된 모리타 요시미츠 연보에 따르면,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으나 지금은 그의 필모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한 편이라고 한다. 처음엔 유한 계급이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휴양을 즐기러 떠나는 목적의 별장에서 서번트와 그곳에 찾아온 어느 '고객' 그러니까 자살 예비자와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일거라 짐작하게 된다. 첫 몇 분만 봐도 이러한 설정을 대사에 의해 바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 예비자치고는 이번에 찾아온 손님의 일상이 이상하다. 새벽마다 일어나 빠짐없이 체력 단련을 하고 습관이나 말과 행동도 조금 이상하다. 영화를 계속 보면 결국 이 남자는 자살이 아니라 오히려 살인을 하러온 거였다. 80년대 화면에서 느껴지는 풍광과 노스탤지어도 좋지만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느릿하면서도 곳곳에서 덜컹거리는 지점이 돌출하다가 그 끝에 이런 분위기가 서로 충돌하는 절정부까지 요즘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블랙 코미디 분위기를 끝까지 정말 마지막 엔딩까지 유지하고 있어서 신선했다. 모리타 요시미츠 영화의 인장이라면 그게 어떤 장르이던간에 이렇게 마가 뜨는 공백과 여백 그리고 그 사이의 돌연한 어색함 같은 것인데 여기서는 충분히 영화의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두 사람 모두 최소 삼십여년 넘게 활동했고, 사망시까지 현역이었으며 2010년대까지 (모리시타는 정확히 2010년대 초까지) 필모그래피를 이어간, 80년대 이후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이었다. 비록 뒤로 갈수록 흥행성은 떨어졌고 대중과의 접점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 대신 오바야시의 경우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의 작가주의를 관철했다. 러닝타임은 무자비하게 길어졌고 전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했다. 80년대에 연출한 두 사람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당시 최전성기로서 작품을 쏟아내다시피했던 88년의 오바야시는 힘이 넘쳤고 아직 젊은 신인에 가까웠던 84년의 모리시타는 재기가 번뜩였다.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영화를 보는 일은 이런저런 군더더기의 감상을 수반하게 되는 것 같다. 바로 어제, 야마다 타이치의 사망 소식이 최초로 외부에 전해졌다.

 

최종 수정: 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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