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이전에는 대지는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 ... 허가도 없었고 비자같은 것도 없었다. ... 내가 1914년 이전에 인도와 미국을 여행했을 때는 여권이 없었고 또 그런 것은 도대체 본 적도 없었다고 들려줄 때면 그들이 신기하다는 듯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재미있어 했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중에서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보는 동안 오즈 야스지로가 떠올랐다. 따지고 들자면 가상선의 '파괴' 외에 공통점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오즈만큼이나 갈수록 자신만의 엄정한 연출과 형식을 고집한다는 점, 그러나 동시에 두 창작자 간의 결정적인 차이점 또한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1차 대전 발발 전까지의 안정적이었던 유럽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넘쳐나는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감을 받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부터 웨스 앤더슨은 츠바이크의 이 책처럼 현재 시점에서 향수를 잔뜩 품은 채 과거를 바라보는, 내레이션을 포함한 액자 구조 형식을 줄곧 기본 플롯으로 차용하고 있다. 그래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1985년, 1968년 그리고 1932년까지 3중의 액자구조가 차례차례 문을 열고 닫은 뒤 맨 마지막에 추가된 '현재' 시점에서(그것도 츠바이크의 저서로 짐작되는 독서를 마치는 방식으로) 엔딩을 맺음으로써 총 네 개의 시점이 하나의 전체 이야기로써 완결성을 갖춘다. 하지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스탠다드 비율의 흑백 화면의 세계가 아닌 스코프 비율로 보이는 극중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세상 안에서 오기 가족과 그의 장인 스탠리가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가운데 엔드 크레딧이 올라간다.
 
2차 대전 중에 유럽을 떠나 포화가 피어오르기 이전의 그곳을 회고하며 <어제의 세계>를 썼지만 끝내 마음의 위안을 얻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츠바이크의 염세와 노스탤지어에 웨스 앤더슨은 크게 공감한 듯하다. 최근 십 년 내에 나온 그의 근작들은 동시대로부터는 멀어진 반면, 20세기 초중반을 배경으로한 회고라는 형식(액자 구조 내지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혹은 둘 다)을 공유한다. '현대 사극'이라고나 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크게 멀지 않은 100년 이내의 세계사의 어느 시점을 낭만적인 모험의 무대로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내부의 견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창의적 작가들의 공적 은둔이라 부를만한 회고 취미와 과거 지향이 있다.

연출자의 과거 지향이라는 취향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커리어 내내 SF만을 만드는 감독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 늘 사극만 찍는, 또는 앤더슨처럼 근과거에 애착을 보이는 연출자가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테니까. 정작 근심스러운건 취향이 아니라 앤더슨의 근작들이 점점 활력을 잃어간다는 점이다. 라이브 액션 필름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을 마치 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활용하는 방식, 즉 콘티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인물들이 동작을 아예 정지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동반한 상황에서 대사를 처리하는 연기 패턴, 정적인 순간에서의 돌연한 패닝이나 틸트, 실사 영화에서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방식의 차용, 의도적으로 세트임을 숨기지 않는 단순화와 과잉이 한데 뒤섞인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진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작품 전체에 라이브 액션 필름의 활력과 역동성, 그리고 생생함을 박탈한다.
 
그중 결정적인건 플롯 자체의 활력 없음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경우 그 직전까지의 전개에서 의도적으로 빠져나온 다음 얼렁뚱땅 급하게 넘기느라 허덕이는 클라이맥스를 보고 있노라면 각본을 미처 완성하지못한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한다. 그래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최대 위기는 어떻게 해결됐다는걸까. 무대 밖 현실에서 같은 구호를 외치며 각성된 배우들이 그래서 어떻게 연극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완전히 생략한 채 연극과 영화의 본편 모두 '에필로그'로 넘어가버린다. 관객으로서 기만당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의 연출이었다. 

오즈의 초기 무성 영화들에서는 카메라가 패닝도 하고 트래킹샷까지 있다. 하지만 '오즈적 양식'이 확립된 49년작 <만춘> 이후부터 카메라는 서서히 느려지더니 급기야 마지막 두 편의 컬러 작품에 이르면 러닝타임 내내 고정되고 인물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부분의 대사를 한다. 오즈의 만년작들이 이전부터 이어져온 이야기의 반복과 변주임에도 불구하고 더 정갈하고 심플해진 연출이 불러온 '표층'과 '심층' 간의 균형으로부터 기원한 안정감에 의해 몰입을 가능케한다면, 최근의 앤더슨 영화들에서는 오즈를 연상시키듯 형식적으로는 점점 더 완고해보일 정도로 반복적이고 숙련된 장인의 연출과, 딱히 살점을 붙이는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속이 빈 플롯에 기인한 불균형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프렌치 디스패치>와 <애스터로이드 시티> 모두 사실상 연작 단편을 붙여놓은 옴니버스 방식인 것 또한 앤더슨이 더이상 장편 영화에 어울릴만한 서사보다는 자신의 연출 스타일에 부응하는, 즉 작은 에피소드들이 모여 전체상을 제시하는 군상화 같은 구조가 수공업적이고 미니멀하면서도 매우 강박적인 디테일이 배치된 프로덕션 디자인에 최적화된 형식임을 확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본작 이후 그는 ott를 통해 일련의 단편들을 한번에 공개했다.
 
연극 무대가 펼쳐지는 극장 밖 세상을 더이상 의식하지 않고 극 안에 영원히 머무는 최근작의 결말은 현실보다 더 큰 가상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창조물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고 했던 <시넥도키 뉴욕>(2009)의 주인공을 상기시킨다. 이야기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폐쇄의 돔을 선택할 수 있다면, 두 세계를 제시한 다음 주인공에게 최종 선택권을 부여할 수 있는 감독이라면 그는 행복한 창작자일 것이다.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인도, 자신의 안위를 괘념치 않는 용감한 레지스탕스와 기자들이 활동하던, 또는 우아하고 여유넘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들이 있던 유럽(그랜드 부다페스트 포텔(2014); 호텔 슈발리에(2007)), 외계 생명체와 접촉하는 (아마도 뉴멕시코로 추정되는) 미국의 사막 지대까지 로맨티시즘과 노스탤지어가 물씬한 배경에는 동시대에 대한 염세가 배면에 깔려있다. 하지만 이렇게 과거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려하고 현재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같지만(또는 리얼리즘적 재현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작은 출구를 어딘가에 마련해놓지는 않았을까. 알리바이, 안전장치 또는 도주로라고 해야할까.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고집하는 창작자 고유의 형식이 있다면 거기엔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이 있을 것이다. 향후 앤더슨의 차기작을 볼 때면 이 점을 계속 염두에 두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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