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바 압바스는 97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유동, 이동 및 환승의 공간으로, 정주자가 없는 유목민들의 도시로 홍콩을 규정했다. 반환 시점을 아무래도 의식했겠으나 이 주장에는 광동 끄트머리에 자리한 항구 도시에서 살아온 실제 홍콩 거주민들의 역사와 생활을(어쨌든 결과적으로 보자면) 괄호치고 있다. 그곳에는 어떤 이들이 살고 있을까. 학교와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반환 시점 이후로만 한정하더라도 자본의 집적으로 시시각각 도시 경관이 변해가는 가운데 본토와의 관계로 인해 불안정한 지정학적 변동을 상시적으로 경험해온 그곳에서 말이다.
 
<Septet>은 2020년 칸느에서 최초 공개되었고 이듬해 개봉 예정이었다가 팬데믹의 영향으로 다시 일 년을 기다린 뒤에야 정식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로 80년대 등장해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며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일곱 명의 감독이 참여했다. '홍콩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장소 자체가 소재이자 주제인데 홍콩인의 실감과 감개를 자주적으로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음은 분명해보인다.
 
지난 몇 년간의 시위를 포함해 정치적 맥락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 언급도 없는 대신 홍콩인들의 생활을 다루는 영화의 각 에피소드들은 '노스탤지어'를 공유한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 홍금보는 유년 시절 자신이 경험한 경극학교에서의 수련 시절을 재현한다.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 <칠소복>(1988)의 한 부분을 더 디테일하게 확장한 것처럼 보이는 이 에피소드는 엄한 스승 밑에서 아침부터 혹독한 신체 수련을 하는 어린 학생들의 훈련 과정의 묘사를 통해 홍콩 무협 영화가 어떤 역사와 전통 위에서 전개되었는지를 환기한다. 두번째 에피소드를 연출한 허안화 또한 1961년과 90년대 두 시점을 배경으로 과거 직장 동료를 애틋하게 회상함과 동시에 현재 시점에서 그의 부재를 애상한다. 임영동의 에피소드에서 해외에 거주하다 수 년 만에 홍콩에 돌아온 임달화는 자신이 부재한 동안의 홍콩이 겪어온 경관의 변천에 적응하지 못하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 원화평의 에피소드에서 원화가 연기하는 할아버지는 손녀로부터 영어를 배우는 대신 무술을 가르치며 세대 간 소통을 시도한다. 인상적인건 그로부터 다시 3년 뒤 시점의 에필로그인데 관습적인 후일담을 예상했을 관객은 유쾌한 반전을 맞게 된다.  

<septet> 속 홍콩이 멀게는 60년대부터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근미래 시점까지 통과하며 따스한 향수와 회고의 대상으로 시작해 로컬리티를 다소 덜어낸 풍자와 비판의 무대가 되며 끝맺었다면, 차이밍량의 19분짜리 단편 <night>는 영화관의 관객이라기보다는 미술관의 관람자가 되어 홍콩이라는 전형적인 근대적 도시 풍경 자체를 마치 하나의 예술품처럼 관조의 대상으로 대하게 한다. 장르간 경계를 허물다못해 장르 개념 자체를 거의 무시하다시피하는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근년의 차이밍량의 단편 프로젝트는 극영화와 다큐, 미디어아트의 경계를 의식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카메라를 고정한 채 홍콩의 밤거리 이곳저곳을 기록해 연결한 시퀀싱은 지난 수십년간 영화팬들이 보면서 상상하고 꿈꿔온 스크린 속 환상으로서의 홍콩 그리고 우산 시위를 지나고 팬데믹을 견디는 중인 지난 근 몇 년 간의 실제 홍콩과의 간극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그 기간동안 얻은 흔적을 아직도 곳곳에 흉터처럼 새긴 도시의 외관을 건조한 다큐와 비주얼 아트 사이 어딘가에서 전경화한다. 내레이션이나 대화가 전무한 <Night>가 <Septet>보다 더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역설은 당연히 두 작품 간 형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전통적인 리얼리즘 서사가 여전히 기댈 수 밖에 없는 '개연성'이나 '플롯' 같은 개념들이 현실과의 직접적 상관관계를 간접적으로 거부하거나 지연하는 반면 다큐이면서 미디어아트인,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차이밍량의 작품은 얼핏 보면 스틸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고정된 카메라가 장시간 동안 촬영한 화면을 응시하는동안 미술품을 감상하듯 즉물적이면서 직관적인 동시에 한발 더 나아가 관객(또는 관람자)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상상과 개입을 유도한다. 야간 영업 중인 가게 안 손님과 종업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바닥에 붙어있는 훼손된 전단지 같은 일상적인 장면들은 스크린 밖 현실의 잔여물 같은 이미지로서 스크린 위를 부유한다. 너무 잘 아는 낯익은 장면이기에 오히려 낯설게 보인다면 그건 카메라의 시선 때문이다. 바닥을 내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훼손된 전단을 볼 때, 한쪽 정류장에 서서 반대편 정류장을 비스듬히 바라볼 때, 나지막하게 포착된 현장음까지 더해진 시선은 카메라라는 비인칭의 중간자적 관점보다는 실제 인간의 관찰자적 위치에 더 가깝다. 혹은 그간 숱한 홍콩 영화에서 봐온 그곳의 밤거리를 떠도는 혼령 그것도 아니면 근 몇 년을 지나온 홍콩인의 집단적 무의식이 매개된 편재적 시점이거나. 

두 편의 영화는 동일한 대상에 내재하는 각기 상이한 성격의 노스탤지어를 유발한다. 영화 예술의 결정적인 특수성은 결국 시간으로부터 제한받는 동시에 시간에 도전하고 사유하게 만든다는 점일 것이다. 늘리거나 줄이고 왕복하고 건너뛰는 등 시간을 자재로이 다루는 가운데 감상자는 영화 속 고유의 시간에 통합되거나 분리되면서 감상을 완성한다. <septet>이 몇 십 년간의 긴 시간을 관통하는 도시의 동학을 조감한다면 <night>은 하룻밤이라는 상대적으로 찰나의 시간 동안 지극히 한정된 몇몇의 장소를 지긋이 그러나 고정된 시점에서 집요하게 바라본다. 이 두 편을 통해 한 도시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들여다보면서 도시는 여행자와 이주자가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 공간이고 이동의 공간이며 동시에 정주자의 '거처'임을, 또한 상전벽해의 장소는 한편으로 정지되다시피 고정된 불변의 물리적 공간임을, 자본의 투하와 정치적 격변에 의한 공간의 질적 변형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거주하는 인간이 펼치는 끈질기게 반복되며 이어지는 삶의 양상으로 인해 결코 자본의 투입과 노동 생산량으로만 계량될 수 없는 유장한 시간을 담지한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시공간임을, 즉 도시는 그 자체로 역사적 대상이자 그 주체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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