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미쓰하루는 일본 공산당이 결성된 초기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중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당의 방향성을 두고 갈등한 끝에 결국 탈당 및 제명을 당하게 되고 이후 당원 시절을 그린 소설로 주목을 받는다. 이런 그를 두고 후지타 쇼조는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신념이 탈당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면서 이노우에를 사상적 비전향으로 규정한다. 소수자를 향한 그의 연민과 동료의식을 높게 평가했던 후지타가 하라 가츠오의 다큐멘터리 <전신소설가>(1994)를 봤을지 궁금하다.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90년 1월부터 사망한 93년까지 이노우에의 만년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한 <전신소설가>는 (아마도) 기획 당시에는 의도치 않았을 이노우에의 이면을 조명하면서 화제가 됐다. 이노우에의 자작 연보의 상당 부분이 거짓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는 그의 친인척 및 어린 시절 살았던 마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일일이 팩트 체크를 한 끝에 얻어낸 결과인데 이를테면 만주에서 출생했다거나,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 진학을 지원조차 하지 못했으며 마을의 유곽에서 살았던 조선인 소녀와 로맨스가 있었다는 등의 서술이 전부 허위 및 날조였던 것이다. 알고보니 그는 일본 본토에서 태어났고 중학교 지원은 물론 입학 시험까지 쳤으나 낙방했다가 이듬해 재수 끝에 입학했으며 그가 살았던 지역에 조선인들로만 채워진 유곽같은 것은 없었다.

후지타의 글을 통해 상상되는 이노우에의 이미지와 하라의 다큐에서 재현되는 이노우에는 제법 차이가 있다. 2시간 30여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의 초반 10분만에 이미 이노우에의 캐릭터는 빠르고 직관적으로 구축된다. 90년 1월 자택에서 열린 신년 모임에서 그는 자신이 선배이자 선생으로 모시는 하니야 유타카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 짓을 하던 어느 방문객을 향해 오랫동안 큰 소리로 꾸짖던 끝에 기어이 그 사람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게 만든다. 여기서 이노우에의 어투나 표정 그리고 멘트는 일종의 연기처럼 보이는 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끝나고나면 아닌게 아니라 바로 그 다음, 그는 돌연 여장을 한 채 무대 위에 올라 지인들 앞에서 춤을 추며 아예 본격적으로 연기를 한다. 이 두 장면을 나란히 이어붙인 편집은 당연히 의도적이다. 이노우에라는 사람의 어떤 본질을 포착했다는 판단이 거기에는 있을텐데 '범한 진실보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게 낫다'는 나중에 삽입되는 이노우에 본인의 발언이 바로 그 본질을, 자기자신에 관한 진실을 은연중에 노출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다른 자신이 있으며 그 다른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발언 또한 이를 재차 확증한다. 

영화의 전반과 후반은 각각 이노우에의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를 조명하는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공개 강연이나 지인들과의 대화 장면이 주로 전반부를 이룬다면 투병 생활에 초점이 맞춰진 후반부는 그의 사적인 면모에 집중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노우에의 실체가 벗겨지는 것도 여기서부터다. 전반부에는 경력 초기부터 일반인(주로 성인)을 상대로 소설 쓰기 강좌를 계속해 온 이노우에가 자신의 '제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들 중 상당수의 여성들과 불륜에 가까운 관계를 이어왔음이 암시된다. 주위에 늘 자신을 흠모하는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것으로 재현되는 그의 이러한 표상은 소설가가 '선생님' 대접을 받던 한 시절을 환기함과 동시에 후반부에 나올 자연인 이노우에와 대비를 이루면서 그 경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암 진단, 수술과 재활 그리고 재발로 이어지는 투병 생활을 다루는 후반부는 tv에서 흔히 보는 휴먼 다큐처럼 얼핏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한부 판단을 받은 이노우에가 "의사의 말에 설득력이 없다"면서 같은 내용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언변'이 중요함을, 즉 말의 형식과 전달력을 강조하는 장면을 통해 하라가 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서사의 일관성이 확인된다. 소설가이자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거짓말쟁이의 본성을 드러내는 이러한 언술은 그렇다면 소설가 이노우에와 시종일관 남들 앞에서 자신을 꾸미려고 노력하는 자연인 이노우에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음을, 따라서 어쩌면 그를 향한 범속한 윤리적 판단을 거부해야하는게 아닌지 관객의 (그 직전까지 이어왔을) 확신을 흔든다. 

 

하라의 전작 <가자 가자 신군>(1987)처럼 이번에도 대상인 이노우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신중함이자 특징이다. 이력을 위조한 이노우에를 비판할 의도가 있었다면 그 부분에 지금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할 뿐 아니라 그 지점에서 영화가 끝났어야 했다. 진실을 확실히 규명한다는 목적 하에 이노우에를 향해 연출자인 하라가 직접 질문하는 장면도 들어갔어야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런 과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본편에는 그러한 대목은 없다. 본편에서는 오히려 그 이후의 전개가 더 중요하다. 질문은 커녕 일체의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 없이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동안 그저 관찰자로서 이노우에를 바라보기만 한다. 오쿠자키 켄조가 마치 극영화의 주인공처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목표와 신념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이다. 현실판 돈키호테 같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다음 장면에서 무슨 행동을 할지 관객은 (상대적으로) 쉽게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에 관객은 각자의 입장에서 그를 수용 또는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전신소설가>의 이노우에는 오쿠자키만큼 영화의 전면에 굳건히 구축된 하나의 캐릭터로서 입체화되지 못한다. 이는 우선 이노우에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오쿠자키보다 훨씬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행동하는 영웅보다는 고뇌하며 독백하는 지식인 캐릭터에 가깝다. 따라서 연출자와 대상 간의 긴장과 갈등 역시 이 작품에서 더 암묵적이며 복선화되어 있다. 진짜와 가짜, 소설가와 혁명가, 견결한 신념을 갖춘 거짓말쟁이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하라 가즈오는 그것이 일도양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자신의 입장을 침착하지만 또렷이 표명한다. 이노우에의 발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지인들의 증언은 반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첨언에 가까워 보인다. 이노우에의 진술을 바로 부정하거나 뒤집는 이노우에의 형제, 친척, 마을 사람들의 어투는 결코 비난조나 규탄이 아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노우에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건 다 아는거 아니었냐는 식의, 그를 진정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이들만이 가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례로 어떤 이는 이노우에가 어릴 적부터 '거짓말쟁이 밋짱'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짓말에 능했기에 허위로 연보를 썼다한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증언의 절정은 후반부에 이노우에의 아내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세토우치 자쿠초가 이노우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변호처럼 들리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을 요약한 한마디이기도 하다. 하라의 입장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의 핵심이 허위 서술 비판과 사실 관계 규명이 아니라면, 이마저도 이 다큐의 서사를 완성하는 일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 서사란, 그러니까 이 다큐의 주제는 뭘까. 


이노우에의 거짓이 하나둘 밝혀짐에 따라 하라 본인이 느꼈을 혼란을 풀어가는 것으로 촬영과 편집의 중심이 옮겨갔을 것임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밝혀질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과거를 윤색한 이노우에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걸까. 지금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이노우에라는 이 모순적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궁금증 끝에 하라가 얻은 잠정적 결론은, 본인이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히 자작연보를 썼을 것이라는 어느 인터뷰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노우에가 만일 누군가를 속이려 했다면 그 대상은 자신의 독자가 아니라 젊은 시절 공산주의 사상에 헌신하다가 철회한 후 소설 쓰기에 전념한 끝에 무언가를 완성하려 했던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또 하나의 완결된 소설 같은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이노우에가 그렇게 한 쪽에 있다면 그 맞은 편에는 거기에 도전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본, 자신만의 이노우에 미쓰하루라는 또다른 텍스트를 새로이 써나가는 하라 가츠오가 있다. 이 두 명의 예술가간의 조용한 대결과 긴장이 본편을 관통한다. 

 

1990년 자택에서 열린 정월의 모임에서 이노우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씩씩한 청년같은 위세와 풍모로 시종 좌중을 압도한다. 3년 뒤 같은 자리에서, 장기간 투병중인 그는 수척하고 말수도 줄었으며 차분하다. 여생이 길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는 그에게 초대한 손님을 내쫓던 3년 전의 강단과 패기는 온데간데 없다. 한 때 헌신했던 당과 사상을 포기했을 때 그에겐 당적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대개의 전향자라면 자신과 가족의 안위 또는 안락함이 보장된 미래 같은 것이었을 테지만 이노우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듯하다. 어떠한 사상이나 주의도 품을 수 없는 휴머니즘 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음으로써 더 자유로워지는 문학이라는 야심이었을까. 적당히 윤색한 과거를 통과해 소설가로서의 현재를 써나가고 있던 이노우에의 삶은 '전향'을 논하기 이전에 그 자체가 하나의 '창작'이었고 그 창작은 후지타가 말한 '정신의 비전향'으로 인해 가능했다. 삶 그 자체를 한 편의 소설로 만들려했던 '전신소설가'가 바로 거기에 있다. 죽음을 코 앞에 두었던 93년 1월의 이노우에는 자신의 '유작'에 만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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