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필립 로스가 소설가가 된 동기, 습작 시절, 창작 방법, 영향받은 작품 혹은 그가 전하고픈 삶의 교훈 등 성공한 소설가의 자서전에서 흔히 기대할법한 구체적 정보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애초에 로스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처음부터 자서전 같은 걸 쓰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 주커먼을 등장시키는 것도 모자라 기어이 그가 로스에게 말을 건네는 걸 보면 이 책 또한 한 편의 소설, 아마 그가 최초이자 유일하게 쓴 비-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할까. 자기자신을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찰리 카우프먼처럼(<어댑테이션>이 이 책보다 한참 뒤에 나오긴 했지만) 이 책도 실존하는 미국 출신의 유대인 작가와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은 평행 우주 속 또다른 필립 로스가 주인공인 필립 로스 소설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가 이런 형식을 택한건 사실과 그로부터 가공된 소설 사이의 긴장과 변증법에 대해 로스 특유의 화법, 즉 나레이터에 의한 길고 상세한 설명을 하기 위함인 듯하다. 단적으로 말해 그나마 실제 자서전 형식에 가까운 '주커먼에게'라는 장에 담긴 자술적 회고가 실제로는 얼마나 가공되었으며, 또 가공이 왜 불가피했는지, 다시 말해 사실을 서술한다는 것의 불능성에 대해 마지막 장인 로스에게에서 주커먼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쓴 진짜 의도가 여기에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주커먼이 로스를 비판하는 요지는 자서전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여러 면에서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한마디로 자서전은 가장 조작적인 문학 양식이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기 위한 자기 검열 때문에 정작 더 자세한 서술이 있어야 할 부분에서 생략과 배제가 수시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했으면서도 로스가 왜 조시를 택했는지 그 결정적인 동기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고, 도대체 어떻게 자신이 등장했는지 그 탄생 배경과 과정에 대해서도 자칭 자서전이라는 이 책에서는 알 수가 없다고 주커먼은 로스를 힐난한다.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마음으로 인한 타협도 문제다. 차라리 소설이었다면 상상력의 힘을 빌어 진정성과 내심을 내비칠 수 있었던 대목에서도 자서전인 이 책에서는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다음 인용을 보면 완전히 말을 거꾸로 바꿔서 하고 있다. 로스는 애초부터 소설의 인간이지 자서전 같은 걸 쓸 사람이 아니었다.

 

자네가 자서전의 위장들을 포기하고 사실들의 자리를 상상력에 넘겨준다면 많은 미스터리들이 풀리겠지. 그리고 신의라고 불리는 왜곡은 자네의 전문이 아니며 -완전한 공개에 도전하기에 자네는 너무 사실적이야. 자넨 위장을 통해서만 '솔직함'이라는 조작적 요건들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지. 268

 

주커먼의 편지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로스는 이런 말을 하고싶었던 것 같다. 사실은 소설로 가공되었을 때 오히려 더 진정성을 갖고 더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자신에게 실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냥 놔두지 못하고 전부 논리와 이유를 붙여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작가는 탄생한다. 그 집요함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것에 매혹되어있음을 로스가(혹은 주커먼이) 결국 인정하는 것이 주커먼의 편지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스에게'를 읽어가면서 그 앞에 실린 '주커먼에게'가 어쩌면 전부 창작은 아닐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이렇듯 객관적이고 냉철한 자기 비판을 주커먼의 입을 빌어 로스 스스로 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 정도의 내밀한 고백을 한 소설가가 이전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 장의 거의 맨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자서전 쓰기의 실패를 고백함과 동시에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의 전능함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고 있다(등장인물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순진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지적은 통렬하다). 따라서 이 책은 예순을 바라보던 시점에 자신의 개인사를 회고하고 정리하겠다는 사적인 관심보다는 오히려 작가라는 존재의 의의를 다시금 자문해봄으로써 이제부터 펼쳐질 노년기의 작품 활동을 앞두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각오를 다지기 위해 쓰인듯하다. 전반기 못지않게 밀도가 높은 그의 경력 후반기 작품들이 실제 결과물로서 그 각오를 증명하고 있음은 모두가 알고있다.

 

사족. 소설가의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 그리고 작품간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작품들로 인해 세간에 이런저런 오해를 받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누리는 특권인 것처럼 말하는 로스를 보노라면 작가 연구에 있어서 사생활에 대한 관심과 투영이 과연 얼마나 타당할까싶다. 그리고 우리와 일본같이 사소설 논쟁이 있는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줄곧 자신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서 아니면 당대에 벌어지던 정치 사회적 이슈에 관해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을 써온 필립 로스는 사소설 작가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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