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완벽하게 교착화된 갈등인지라 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들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이 도출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끝에 해결이나 결론이라고 지칭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적합한 그러한 어떤괴상한 무엇인가에 이르는 일이 있다. 어떻게든 대안을 끌어내려는 무리한 노력끝에 나온 이런 논리적 비약 혹은 초월에는 그 정합성 여부에 대한 판단보다도 그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의 절박한 속내가 먼저 보인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문학은 틀릴 수 있는 상태에 놓인 올바름쪽이 국외적인, 안전한 진리의 상태에 놓인 그런 올바름보다 깊다고 말한다. ...문학은 틀릴 수 있음 속에서 무한을 본다. 197 198

 

이렇게 보아서는 딱히 반박할 필요가 보이지 않는다. 문학은 승자가 아닌 패자의 양식이라는 식의 주장은 익숙하기도 하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용을 위해 앞뒤를 딱 떼어놓은 문장만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진정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그 다음을 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나는 에즈미를 향한 외침에서 논 모럴, 바로 저 '그런 건 몰라'라는 것이 전후 이후에 살아남을 가능성을 보는 것 같다. ... 예를 들어 전후책임이라든가 타국에 대한 사죄라든가 이런 것들은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세상이 파멸한대도 내가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만 있다면 그걸로 좋아"라는 저 목소리, 거기에 근원을 둔 '나는 상관없어'라는 목소리를 기점삼아 생각해야만 한다. 가능하다면 틀릴 수도 있는 형태로 계속 생각해나간다. 그때 우리는 한정된 시대적 문제를 무한히 연결되는 문제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심한다. 우리는 자기가 틀릴 수도 있는게 아닐까하고 의심한다. 그렇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이때 잘못을 제거해버리면 우리는 소중한 사상의 씨앗과 과제도 내버리는 셈이 될 것이다. 어떤 인간 속에도 그런건 몰라라는 목소리는 숨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그런건 몰라'라는 목소리가 우리 속에 살아있는 한, 어떤 고통 속에서도 어떤 잘못 속에서도 다시 한번 거기서부터 '모든 기능이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을 반드시 지니고 있'는 것이다. 202

 

사죄하라고? 난 그런건 모른다, 난 상관않는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한다. 내가,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안에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라는 표현의 섬뜩함을 못본척 하더라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외부로부터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겠다. 비판을 듣더라도 개의치말라. 그것이 나중에는 틀린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옳은게 될 수도 있으니 그냥 당당하게 나가자는 말을 저런 식으로 쓸 수 있다면 뻔뻔함이 문학적으로 미학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이렇듯 소설가 못지않게 창의적인 문장을 쓰는 문예비평가 가토 노리히로는 이 책 <패전후론>(번역본 제목은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1998)에서 한쪽에서는 피해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면서 사과를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완전히 무시하는듯한 망언을 다른 쪽에서 되풀이하는 과정을 무한반복하느라 좀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본의 교착된 상황을 보면서 나름의 해결책을 제안하고 있다. 즉 사죄와 망언을 반복하는 이 도돌이표 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진정한 사죄를 하려면 우선 일본 사회가 안고있는 '비틀림', 그러니까 일본이라는 주체의 '인격 분열'을 해결해야하며 그 방법은 자국의 전쟁 사상자를 아시아의 피해자보다 먼저 애도함으로써 분열되지 않은 단일한 국민공동체를 먼저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처음 들어보더라도 뭔가 앞뒤가 바뀌어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당사자가 사과를 하고 그 다음 용서를 구해야한다는건 보편적 상식이지만 가토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피해자에게 사과하기 전에 가해자의 비틀림부터 먼저 해결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지배 피해자를 향한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기(정식 사죄와 배상)는 여러 이유로 어려워보이니 그렇다면 우선 자신이 자신을 셀프 용서함으로써 '가해자'라는 레테르로 인한 심리적 트라우마부터 먼저 어떻게든 극복하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통해 자국의 사상자를 애도하겠다는건지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을 하기 이전에 저러한 의도를 파악한다면 가토의 주장이 결국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겠다는 말(혹은 일본은 사죄가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정)에 다름 아님을 쉬이 알 수 있다. 이렇게 돌려 말하면 상대가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을까.

 

도무지 이해가 어려운 글을 쓰는데는 대략 두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읽는 이의 문해력 부족은 차치하고). 주제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거나 아니면 비판이나 비난이 두렵거나. 가토 스스로도 자신의 주장과 논리가 도착적이고 비틀려있음을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화법 대신 이렇듯 빙빙 돌아가는 알듯모를듯한, 어떤 방향으로든 해석가능한 간접적인 어투를 시종일관 구사한다. 의뭉스러운 문장일수록 그걸 읽는 이는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쓰는 이도 처음부터 이 점을 의도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다 이미 알고있는 정답을 저쪽으로 치워둔 채 펼쳐지는 저 도착적 상상력보다 더 주목해야할 점은 저자 스스로도 그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글이 공적으로 출판되는 일본 사회의 상황이다. 혐오발언처럼 표현의 자유를 남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출간 이후 나름 찬반의 대상이 되면서 이 책은 출판물을 통한 논쟁이라는 일본 나름의 지적 전통 혹은 지적 활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이 책이 출판되고 긍정적으로 수용되는 상황은 가토가 속한 일본의 자유주의계열 지식인 이른바 일본 리버럴 세력의 속내를 은연중에 그러나 또렷이 내비친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이들은 우익처럼 성마르고 강건한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마치 오랜 시간 공들여 사유한 심원한 '사상'의 결과인냥 이런 말과 글을 내놓는다. 우익과 달리 자국의 과거 잘못을 인정하지만 그 대신 잘못된 정치적 결단을 내리기까지 과정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거나, 결정권자의 선택 과정에서의 내면을 탐구(유추)해보거나, 가토처럼 화해의 가능성이나 조건을 사변적으로 상상해본다. 지나치게 자세하거나 작은 것에의 집착, 또는 지나치게 사변적인 것 모두 본질적으로는 탈정치적이거나 내지는 초정치적이다. 바로 여기에 한일간 그리고 일본 내 교착화된 상황이 풀리지 않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른다. 좌와 우의 의도치않은(?) 합작 말이다. 거기에 이런 책을 일본의 비판적 지성이 내놓은 경청해야 할 고견인 것처럼 소개하는 한국의 '지성'들까지 포함할 때 한국 내 교착화된 상황에 대한 이해도 도울 수 있다는 말을 덧붙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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