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그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전방위적 방향과 정도 때문에라도 히친스가 장수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만약 그가 현재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 분노는 줄어들기는 커녕 더 옹골찼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사망 이후 불거진 큰 전세계 이슈만 꼽더라도 IS의 부상, 트럼프의 당선, 브렉시트, 시리아 내전, 거기에 (그가 생전에 중동에 들인 관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홀했던(것으로 보이는) 동아시아에도) 남북, 북미간 정상회담이나 커지는 미중 갈등까지. 장소로는 쿠바, 우간다, 알제리, 튀니지, 예루살렘, 베트남, 북한까지, 인물로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부터 나보코프, 스티그 라르손까지 이 책에서 다뤄지는 소재만 봐도 그 폭을 종잡기 어려울 정도다. 히친스를 읽을 때마다 전세계 이슈에 대한 그의 이러한 지속적인 관심의 연원이 뭘까 늘 궁금해지는데 영국 해군이었던 아버지를 둔 가족 배경이나 이력으로 유추해보아 이것도 그 누구를 만나도 수월하게 인터뷰 할 수 있는 영어 사용자 그중에서도 백인상층계급에게나 가능한 특권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선입견적인 결론을 내려보기도했다. 국내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한국의 기자들에게는 좀체 기대하기 어려운. 인정을 하든 하지않든 변방과 중심이라는 이분법적 분류는 이럴 때 재차 확인된다. 

 

911 이후 그러니까 2000년대에 쓴 글들이 모여있는 선집이기에 자연히 그의 분노는 미국이 중동에서 벌인 전쟁의 명분에 대한 의심과 비판에 주로 향해 있다. 두 편의 존 업다이크 신간 서평과 고어 비달 비판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한결같이 부시 정권의 음험한 의도, 적국(이라기보다는 적들)과의 비교불가능한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을 비판할 때 그는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히친스가 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파 전향자의 그것과 일치하는건 맞다. 왜 미국의 동기를 의심하는가. 정당한 명분을 왜 의심하는가. 석유를 얻기 위해서라고? 유대인이 뒤에서 계획한거라고? 이 전쟁은 단연코 이스라엘의 국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등등. 그는 시종일관 미국을, 당시의 부시 정권을 변호하느라 바쁘다.

(에드워드) 사이드도 미국이 석유를 수송할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기회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며 안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걸까? 내가 보기에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이 그 정도로 불안하게 들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은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그저 자신을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392

 

내가 하는건 선이고, 나는 정의와 선의 편이며 보편을 대변한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나머지 불의를 보면 세계 어디라도 개입해야한다는 생각이 타당한지 여부를 증명하거나 부연할 필요 자체를 그는 아예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외부인들'이 남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아주 조금이라도 인정해주는 주장에는 반드시 반대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주장들은 문화적 파괴를 막는 것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맹목적인 믿음으로만 해결하려 하는 어리석고 보수적인 세력의 손에 문화가 지배당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바로 이것이 처음부터 문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382

 

물론 그도 개입의 명분을 아예 완전히 모르는 척 하지는 않는다. 이 두꺼운 책에 실린 글들 중 내가 보기에는 딱 한 편에서 그는 미국이 개입해야하는 근거를 모색한다.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제로 억압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안보와 전혀 상관이 없었을까? 나토의 이익은 또 어떤가? 그 지역에 개입함으로써 귀한 전투 경험을 얻지 않았던가? 심지어 국가를 건설해보는 경험도 얻지 않았던가? 냉전 이후의 국제체제가 지니고 있는 일부 결점과 약점이 노출된 것은 오히려 유용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중세시대 같은 폭정에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해방시키는 것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실리적인 이득이 함께 고려되지 않았던가? ... 이런 의문들은 명예롭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488 489

여간 궁색하지 않다. 약점이 노출되었으니 오히려 유용하지 않냐니. 본인도 이런 주장이 무리수라는걸 알고 있었는지 기어이 그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만다. 남의 입을 빌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방법은 솔직하지는 않지만 

배스의 책에 제시된 대부분의 증거들은 전쟁과 분쟁이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엔진임을 보여준다. 또한 인권, 인도적 개입, 국제법이나 기준의 발전 등에 대한 논란이 모두 결국은 반드시 문명들 사이의 충돌은 아닐지언정 문명의 구성요소를 둘러싼 충돌의 일부라는 것도 보여준다. 491

 

쓸 당시에는 최신 시사 이슈를 다룬 글을 발표된지 십여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읽는 재미는 아무래도 글쓴이의 선견지명과 단견을 대조할 때다. 유럽 통합을 지지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에서 균열을 보이면서 느끼는 불안(<유로는 파멸할 운명인가?>)은 브렉시트를 두고 벌이는 작금의 혼란을 보면서 그 선견지명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pc강박에 빠진 나머지 기계적 중립이라는 제스처로부터 빠져나올줄 모르는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비판(<덴마크를 위해 일어서라> <금기를 피하라>)은 '상대주의'나 '다문화적 관용'이 그 스스로 새로운 교조적 강령이 되어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서구자유주의를 보편적 정의로 보는 입장이기에(그가 자신의 이런 모순적 위치를 의식했을까?) 프랑스의 히잡 논쟁에 대해 그는 간결하고 단호한 태도를 표명한다. 왜 유독 "한 종교, 그것도 여성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수상쩍은 기록을 갖고 있는 종교를 만족시키기 위해 평등과 개방성이라는 오랜 전통을 버리라는 요구"(269)를 들어주면서 예외적이어야하는가. 관용은 이런 경우에 들먹여야 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혐오증'이라는 표현을 들이밀면서 이슬람에 대한 비판을 사전에 원천차단해버리려는데 대해 격렬하게 반대한다. "두가지를 동등하게 보는 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매사에는 늘 옳고 그른 판단의 여부가 있는 법이니 그걸 가려야하고 잘못된 것은 가차없이 비판해야한다. 이슬람은 결코 문화상대주의나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폭력적인 폭동과 결코 꺾일 줄 모르는 독재의 이데올로기"(536)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덴마크 신문 만평 사건 때 침묵하는 서구 언론만큼 비겁한 행동은 없다. 그의 이러한 이분법에 의해 쿠르드족,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아프가니스탄, 시아파는 응원의, 반대로 늘 미국을 뒤통수쳐온 이란을 비롯해 파키스탄, 북한, 수니파를 포함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는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결국 십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그의 글이 품고 있던 가정 자체가 그른 것으로 판명된 지금 또렷이 보이는건 히친스의 분노와 증오 그리고 악의다. 뉴욕타임스 기자가 "이라크에서 미국이 사라져야한다는 이야기를 느긋하게 하고 있다"며 했던 비난은 지금 보면 얼마나 성급했던가. 이 책에서 가장 어이없었던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격살인사건에 관한 글도 마찬가지. 당시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히친스는 이른바 "예의바른 절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앞으로 우리의 평정심을 뒤흔들만큼 더 강렬한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항상 애절한 표정으로 마조히즘을 연습하는데 힘쓰는 대신 의지를 다지는 연습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580

슬픔에 관한 연대의 표시로서의 추모는 경쟁이 아니며 따라서 강도나 정도의 문제를 따질 일이 아니다. 지금의 비극을 추모하기에 앞서 이전 있었던 비극들과 견주어 그 정도를 비교해가며 슬픔을 표현해야한다? 비교대상을 언제부터 포함하고 그 단계를 어떻게 나누어 슬픔을 배분해야할까? 한 10단계쯤 나누면 되는걸까? 넉넉하게 5단계? 히친스가 이런 억지를 쓰는 이유는 슬픔을 표현해야 마땅한 더 중요한 사안, 그러니까 "6년전에 이 나라가 공격을 받았을 때처럼 진정한 위기와 응급상황이 닥쳤을 때"나 "어느 정도의 감정 표출이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질시하고 있었다.

 

과연 청년 시절의 그가 이때와 어떻게 달랐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이 선집에 실린 만년 즈음의 그의 정서는 확실히 공격적인 비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우파로의 전향이라는 규정 이전에 미국의 중산층 이하 남성 백인 노동자(이른바 레드넥)의 일반적 감수성에 가까워보인다. 미국이 미국 바깥에서 벌이는 일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고, 월스트리트 부자들 배만 배불리는 구제금융은 당장 폐지되어야하며 이슬람은 광신과 독재의 이데올로기라는 혐오발언을 공공연히 내뱉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그가 아무리 '한 줄짜리 문장에 두 세 권의 책을 언급'하며(옮긴이의 말 중에서) 풍부한 인용을 한다 하더라도 그를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적어도 그가 일관되게 비판하는, 늘 한발 물러서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체 하려는 서구의 자유주의 지식인은 확실히 아니다. 그런 종류의 지식인 취급은 스스로도 거절했겠지만. 히친스의 전향 여부에 관한 판단은 그런 점에서 좀더 면밀함이 요구된다. 젊은 시절에도 그는 늘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가정을 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자신이 선 위치가 살짝 바뀌었을 뿐 그는 쉼없이 선악을 가름하고 반대하는 대상을 가열차게 비판해왔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분명히 확인한건 아무리 봐도 생을 통틀어 그가 확실히 전향, 즉 방향을 바꾼건 국적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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