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 <그후> <문>의 비공식 연작은 물론이고 <마음>, <우미인초> <행인> 그리고 미완성 유작 <명암>까지 소세키는 삼각관계와 그로 인한 불행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한눈팔기>는 그러나 이런 흐름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 한편이다. 반자전적인 이야기라 알려진 이 소설의 주인공 겐조는 어릴 적 자신을 파양한 후 절연했던 수양 부모로부터 뒤늦게 갑작스런 금전적 원조 요구를 받는 가운데 아내와의 갈등, 생계에서 비롯하는 자괴감 등으로 고뇌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년 남성의 분투라 요약될만한 이 작품에서 소세키는 겐조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오쓰네의 심리와 주관까지 모두 삼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보니 자기자신을 투영했을 겐조에게도 마냥 동정적이지는 않다. 자신의 편벽과 염세, 외골인 성정까지 닮았을지언정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이런 태도에는 그때까지의 자신의 삶 전체를 스스로 총괄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던걸까. 이전까지는 집필 시점에 있었던 실제 사건들을 작중에 언급함으로써 실시간을 배경으로 했음을 알 수 있었던데 반해 여기서는 발표 시점으로부터 약 십여년 전 그러니까 그의 등단 즈음인 1904년경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사망년 전, 미완성작 <명암>을 제외하면 완결된 마지막 장편인 이 소설을 쓰면서 소세키는 어떤 예감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겐조가 느끼는 오쓰네와의 심리적 격절에 관한 내용이 양부와의 갈등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두번째 읽으면서 뒤늦게 알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소세키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파양에 더 눈이 쏠렸던 것이다. 하지만 자살 시도같은 일화를 포함해 아내 교코의 회고록을 보더라도 생전 소세키 부부의 사이가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음은 쉬이 알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자신의 과거(양부)만이 아닌 현재(아내)의 고뇌와 고통도 동등하게 토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소세키는 이 소설을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걸까. 나는 과거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과거 악연으로부터의 영향에 여전히 사로잡힌 탓에 지금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를 포함 주변 사람 그 누구도 신뢰하거나 애정을 갖지 못한 채 혐인과 염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이다. 일이 잘 풀리건 그렇지 않건 감옥 같은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글씨가 파리 머리만해질 때까지 원고지를 가득 채우면서 겐조가 그토록 쓰고 싶었던 것은 소설일까 자서전일까 아니면 주문(呪文)일까. 갑자기 큰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을 새워 쓴 원고를 팔 줄 알았던, 그러니까 소설의 환금성을 일찌감치 알고 있던 초보 작가의 탄생은 원대한 예술가의 야심보다는 생계의 방편으로부터 기원하는걸까.

 

외골이고 편벽된 성정을 가진 겐조의 주위에는 온통 자신에게서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사람들 뿐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젊은이들처럼 겐조도 앞을, 미래를 바라보려 하지만 과거에 계속 발목 잡힌 채 넘어지는 자신에 대한 자조가 계속된다. 즉 삼인칭 시점을 취하고는 있지만 내적으로 이 소설은 겐조의 독백으로 일관하는 일인칭에 가깝다. 현재 시점의 구체적 사건보다는 어릴 적부터 시작해 과거의 여러 순간들을 회고하다가 가끔씩 현재로 돌아와서는 자신보다 더 불우한 형제와 인척들, 아내와의 불통, 그리고 돈을 요구하는 양부와의 갈등을 묘사하고는 곧 다시 회억에 빠지는 패턴으로 전개된다. 한마디로 겐조는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기억)하는 인간, 즉 "움직이지 않으려"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러한 겐조가 후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변한다. 

 

아무리 달라붙어도 성가시지 않습니다. 어차피 세상일이라는게 여기저기서 달라붙는 것 투성이니까요. 설령 성가시다 해도 없는 돈을 내놓으라고 하니 그냥 가만히 성가심을 참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의 아찔함은 몇번을 더해도 덜해지지 않는다. 어차피 세상은 마지막까지 성가신 일의 연속, 그러니 구태여 피하지 않겠다는 자각. 내내 과거를 회고하느라 정작 현재 일어나는 일 앞에서는 수동적이고 체념하는듯 하던 겐조는 이 대목에서 돌연 어떤 단호함을 보인다. 이는 우회적이고 소극적인 희망의 피력인가 아니면 절망의 반어적 표현인가. 떨칠래야 떨칠 수 없는 두 번의 파양과 복적이라는 과거, 가족 부양의 책무를 짊어졌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운 가족인 배우자와의 갈등으로 고뇌하는 현재 사이에서 겐조는 자신이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왔는지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디로 갈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사환이 될까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의 불안과 달리 유학까지 다녀온 대학 교수이자 작가라는 당대의 최고 엘리트가 된 끝에 겐조(또는 소세키)가 얻은 결론이란 애초에 결론 같은건, 그러니까 '매듭지어지는 일' 같은건 없다는 역설적 깨달음이다.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이 깨달음은 '즉천거사'(최근에는 다른 해석들도 나오고 있지만)로 대변되는 소세키식 개인주의의 다른 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 의지대로만 주재할 수 없는 삶의 고통에 대한 인정은 현실에 투항하는 숙명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차가운 진실의 일면임은 분명하다. 여생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을 소세키에게 이것이 깨달음인지 현실 투항인지는 구분할 수도 없고 구별할 필요도 없는, 그 자신에게만은 손안에 들어온 사물처럼 또렷한 사실이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소설이 소설로서 성립하기 위한 사건이나 갈등, 서사가 빈약할 수는 있어도 이 작품에는 사이드가 말한 만년성이라할 일말의 아이러니가 꿈틀거린다. 만년에 이른 예술가의 작품은 조화와 고요가 아니라 오히려 더 반항적이고 실험적이며 날이 서 있다는 통찰 말이다. 양부에게 돈을 주지 않기로하고 가만히 성가심을 참는 걸 투항이 아닌 저항으로, 어차피 매듭지어지는 일 따위 없다는 자각을 주어진 생을 거의 채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씁쓸한 농담이 아니라 생의 의지의 재확인으로 읽는다면 소세키의 만년은 필멸을 인정하고 체념하는 그런 노작가의 풍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는 차기작이자 유작인 <명암>에서 확증된다. 미완성임에도 (번역본 기준으로) 데뷔작 다음으로 긴 이 작품에는 여느 작품보다 날선 긴장감으로 팽팽한 삼각관계가 그려져 있다. 마치 영원히 쓰고자했던 것처럼 길고 밀도 높은 서술은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에 매달렸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본다면 <한눈팔기>는 이러한 회심작을 쓰기 앞서 이루어져야(만)하는 선행 작업으로서 자신의 생(의 기록)에 관해 직접 정리하려했던 시도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결과는 회한이나 애상의 노스탤지어로만 채워져있다기보다는 이지적이고 때로는 분석적으로까지 보이는 학인다운 객관적 자기반영성이 혼재되어 있다. 이는 요즘 읽고있는, 소세키와는 활동 시기도 국적도 판이하게 다른 어느 현대 미국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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