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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서 추상은 더 민감하다. 글과 말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일수록 다양한 해석과 여지가 남는다. 그래서 저마다 해석의 우위와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점차 지리한 논쟁으로 빠져들기도 하는데 말할 것도 없이 종교 경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경전같은 형이상학적인 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네 삶의 결에 촘촘하게 닿아있는 법도 마찬가지. 그 중 법들의 법인 헌법은 가장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나머지 각 정치적 당파들은 헌법 해석의 주도권을 쥐려하지만 추상적인만큼 그 스스로 권위를 확고히 한 채 헌법은 거의 불변한다. 어느 쪽으로도 해석가능하기에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또 추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짐짓 두려워하기에 섣불리 고치려 들지 못한다. 일본 자민당이 긴 세월동안 그토록 헌법 9조를 개정하고 싶어했음에도 지금까지도 못한건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적인 '명문 개헌'을 하는 대신 '해석 개헌'이라는 우회로를 택해 기어이 2015년 집단자위권을 통과시켰다.

 

헌법의 추상성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쨌든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완전히 막지 못한다. 게다가 호헌을 지지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틈입을 막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호헌 지지자들이야말로 여러 방향에서의 틈입을 허용하기도 한다. 바로 미국의 수정헌법 1조가 그렇다. 유럽의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이 혐오발언과 인종차별에 관한 규제관련 법안을 갖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 그렇지 않은 이유는 마치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반민주주의적이고 보편적 원칙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서마저 수정헌법 1조에 근거해 관용과 자유를 용인해야한다고 주장하는 '헌법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혐오발언,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의 저자 제러미 월드론은 말한다. 그래서 미국의 수정헌법 1조에는 여러 예외 사례들을 받아들인, 그의 표현을 빌면 '주전원'이 붙어있다. 법문 그 자체는 불가침으로 두고서 계속 기워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저자가 내세우는 혐오표현 규제의 근거 두가지, 즉 공공선의 원칙과 존엄성 유지의 필요 주장 때문이 아니라 혐오발언의 자유까지 보장하는(것처럼 보이는) 수정헌법 1조에 어떻게 저자가 대응하고 있는가였다. 이 책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혐오규제 입법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상식과 보편을 거스르는 발언이라 하더라도 제재를 하려면 일단 발언의 기회를 준 이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제재할 수 있는 정당성을 얻는다. 만일 정말 그것이 보편을 거스르는 발언이라면 발언권을 준다 하더라도 시민 사회에 논쟁을 부쳤을 때 반박됨으로써 자연스레 기각되고 부정될 것이다. 즉, '논쟁의 장 안에서 민주적 도전'을 받으라는 것이다. 여기에 섞여있는 두가지 가정을 정확히 구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이 말할 권리는 거부되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표현을 통한 개인의 자기 드러내기의 중요성이 있다. 발화자는 원인 제공을 할 뿐이다. 거기에 청중이 어떻게 반응할 지는 알 수 없다. 발화와 반응 사이에는 '정신적 매개'가 있다. (에드윈 베이커)

둘째, 혐오발언 금지는 민주주의 사회의 정당성을 훼손한다.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정당성을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의 일부다. 어떤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아예 발언 기회를 차단당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구체적으로 말해 혐오표현 금지법은 다른 (하위의) 법, 즉 민주사회의 다수결 원리의 정당성을 약화시킨다. 혐오표현 금지법은 그 하위의 법인 인종차별금지법이나 폭력을 금지하는 법률의 정당성을 훼손한다. (로널드 드워킨)

 

월드론은 그렇다면 어떻게 위의 두 전제를 각각 반박함으로써 표현의 자유 원칙에 도전하는가.

 

첫번째, 베이커를 반박하면서 월드론은 단번에 수정헌법 1조에 직접적으로 도전한다. 즉 그는 금지법이 수정헌법 1조가 금지하고 있는 '내용에 기초한 제한'이며, 개개인의 사상의 공공연한 표현을 '덜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금지법 입법을 주장하는 이유는 혐오표현이 그 자체로 표현적 기능을 갖고 수행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혐오표현 발화는 순수한 자기 드러내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공공선을 위협하고 사회가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한다는 확신을 위협한다. 또 직접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 표현에 의해 발생하는 2차적인, 구체적 행위로서의 결과, 즉 소수 인종이나 특정 종교 신자를 향한 폭력이나 배제를 불러온다. 이런 점에서 혐오표현은 사회에 해를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에 기초한 제한과 그렇지 않은 제한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신적 매개'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발화 행위를 한 순간 이미 악영향을 끼치고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발화 행위 그 자체가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한편, 수정헌법이 내용에 기초한 제한을 금지하는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권력을 가진 정부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금지나 억압으로 기능할 가능성 때문인데 여기에 대해서도 월드론은 역으로 정부가 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건 당연하며 그 예로 자유시장 경제 하에서 분배적 정의를 구현하기위한 정부의 인위적 개입 노력을 들고 있다.

 

두번째, 드워킨의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먼 고담준론에 불과하다고 월드론은 비판한다. 드워킨은 진정으로 혐오발언 금지법이 하위 법을 불법으로 만든다고 믿을까. 이는 그저 철저히 법 이론의 관점에서만 본 추상적인 지적 놀음이 아닐까. 상위 법으로서의 금지법이 잘못됐기 때문에 그 하위법으로서의 폭력과 차별 금지법의 정당성이 과연 훼손되는가? 정말? 그렇다면 인종폭력이나 차별에 강력하게 대처하려면 그 범죄 원인에 대해서 관용해야 하는가? 이것이 월드론의 반박이다. 이론상으로는 그럴지몰라도 실제 우리 현실 사회에서는 설령 "하류에서 정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가 압도할지라도 상류의 법 정당화를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경우"가 있다. 하위법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그 상위법의 정당성이 의심된다면 그때는 상위법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헌법 자체를 재고할 필연성이 생기는 거라고 그는 주장한다. 게다가 이론적으로 보더라도 상위 법으로서의 금지법이 논쟁 자체를 원천차단하지는 않는다. 극단적 표현을 담은 혐오발언이 아니더라도 종교나 인종에 대한 반대 의견은 충분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성까지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외에, 법이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해 규제하는게 맞느냐, 게다가 정부의 개입이 법의 힘을 빌려 소수자를 억압하는 그릇될 결과를 가져올 위험성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도 애초에 혐오표현 금지법은 소수를 향한 다수의 횡포가 아니라 반대로 소수를 배려하는 법임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벌이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조정하려는게 당연하듯이 혐오표현 금지법도 그러한 공론을 만들어가는 자연스러운 시민 사회의 논쟁 과정의 일부이자 동시에 이를 지원하고 조율하는 것이라고 월드론은 역설한다. 어떤 사회 문제가 불거지면 적극적 논의 과정을 통해 세세하게 정도를 가리는, 즉 저울질을 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 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제부터라도 심도깊은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18세기 관용 담론을 이끌었던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문헌을 주의 깊게 독해함으로써 금지법의 '사상적 계보'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 장의 설득력은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으며 권위에의 의존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혐오표현은 그 자체가 사회에 해악을 야기한다. 따라서 한번 뱉어지고 나면 사라지는 일회적 성격이 강한 말과 달리 출판이나 방송 등에 의해 반영구적으로 게시됨으로써 사회 환경의 일부가 되는 혐오표현은 금지해야 하는데, 이는 표현의 자유 원칙과는 일부 상충할 수 있으나 다른 보편적 원칙 즉 사회의 개별 구성원이 누려야 할 존엄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공공선을 보장하는데 기여하므로 혐오표현 금지법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지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금지법의 입법 추진이 시작되면 드워킨과 베이커보다 더 다양한 반대와 반론이 예상된다. 법에는 문외한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건 대략 두가지다. 첫번째, 그렇다면 누가 무슨 기준으로 '혐오표현'의 기준을 정할 것인가? 월드론은 굳이 혐오표현까지 하지 않더라도 특정 종교나 인종에 대한 반대의견은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즉 어느 선을 넘어설 때부터 그것은 '혐오표현'이 된다는건데 그렇다면 그 수위와 정도는 어떤 기준에 근거해 누구에 의해 규정될까. 단적으로 말해 과연 어디부터가 처벌 대상의 '혐오표현'일까? 이때부터 표현의 자유 논쟁은 더 점입가경으로 전개되리라 예상된다. 사법 처벌을 하기 위해 어떤 '말'이나 '단어'가 혐오표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지난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두번째 '정신적 매개' 혹은 다른 뭐라 부르든간에 혐오표현 발화자와 차별 및 폭력 행위자를 구분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한 저자의 반박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둘 간의 인과관계를 '객관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한 금지법에 의거해 발화자까지 처벌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물음은 결국 법률에 의한 제재의 한계를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시민 사회 내에서의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굳이 법률로 제재를 하려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월드론의 입법취지와 달리 혐오표현 금지법이 정반대의 목적으로 쓰일 가능성이 전혀 없을까. 다시 말해 모든 정치적 분파들이 자신의 반대파를 겨냥해 금지법을 이용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모든 법은 정의라는 이상을 바라보며 만들어지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그 법률을 피하기 위한, 또 악용하기 위한 더 많은 혼란과 난맥을 야기한다. 이를 어쩔 수 없이 감내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하면 논쟁은 다시 그럼 어느 쪽의 효용이 더 큰가의 문제로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금지법은 사실상 '내용'과 '표현' 모두를 제한하기 때문에 월드론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공적 발언을 하기에 앞서 개인들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든 자기 검열을 해야하는 정신적 부담을 안게 함음으로써 그의 표현을 빌자면 '덜 자유롭게' 만든다. 금지법 이전에 표현의 자유라는 대원칙을 제한하는 이 문제에 대해 월드론은 공공선과 구성원의 존엄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꾸만 넘어가려 하지만 혐오표현 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의 최전선은 돌고돌아 결국 바로 이곳에서 펼쳐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금지법의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진정성과 의도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구체적 실천 과정의 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 이 책의 역설적 의의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도 없음을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경험적으로 안다. 혐오표현까지 관용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일까 아니면 소수자를 억압하고 해치는 사회일까. 처벌이라는 책임을 가정하기에 관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혐오표현의 관용은 민주주의 사회의 저력을 신뢰한다는 표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혐오표현 제한만이 아니라 사회 이슈를 향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 자체에 대해 다소 나이브해보일 정도로 굳은 신뢰를 보내는 저자에게는 금지법은 당연한 구상일 것이다. 그래서 법률적 제재가 만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듯 하다. 그러나 '하류의 법'이 자꾸 늘어간다는건 오히려 그만큼 그 법들이 제구실을 못함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법이 추상적이면 저마다의 해석과 적용이 난립할테고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점점 구체적이 되면 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 적용은 처음의 입법 취지나 목적을 충족시키기 어려워질 것이다. 혐오표현 금지법의 딜레마도 바로 여기에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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