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은 어느 글에서 빈한하고 남루한 (그래도 영화평론가보다는 낫다는) 서평가의 생활을 자조한 적이 있다. 춥고 답답한 방에 공과금은 밀려있고 원고독촉에 시달리는 가운데 어떻게든 글을 짜내려 고군분투하는 서평가의 초상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 글은 좋은 서평의 조건에 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600단어 정도의 중간 길이 서평은 정말로 쓰고 싶어한다 해도 가치가 없으며 중요한 소수의 책에 대해 최소 1000단어 정도의 긴 서평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오웰 본인도 한 해에 스무권 이상의 서평을 쓴 적이 있고 죽기 전까지도 계속 썼다. 서평이 아닌 신문 칼럼을 모은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비판적 저널리스트이자 동시에 원고생활자였던 오웰이 2차 대전 기간 동안 신문 지면에 대체 무엇을 썼는지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오웰에 그토록 공감한 이유 중 하나를 이 책을 읽으면서 알 것 같았다. 2003년 이라크전을 찬성 및 지지하면서 '전향자' 취급을 받은 히친스는 전쟁을 바라보는 오웰의 시각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확인하지 않았나싶다. 전시 기간 중에 쓰인 글이 주로 실려있는 이 책에서 통념과 상식이 갖는 선험적 가치나 당위에 대한 오웰의 동의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표적인 예는 무차별 공습을 반대하는 반전주의자와 평화주의자를 향한 반론인데 아이와 여성의 목숨이 참전한 젊은 남성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냐고 그는 반문한다.

 

젊은 군인들만 죽는다고 해서 전쟁이 더 인도적이고 노약자들이 희생된다고 해서 전쟁이 더 야만적이라는데에 나는 공감할 수 없다. 154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전쟁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잔혹성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이 이중적 태도에는 굉장히 역겨운 면이 있다. ... 전쟁을 '제한적으로' '인도적으로 치르자는 구호는 순전히 말장난이다. 154

 

여자를 죽이는게 남자를 죽이는 것보다 왜 더 나쁘다는건가? 사람들은 여자를 죽이는건 번식 개체를 죽이는 거라고 말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희소가치가 높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인간을 짐승과 마찬가지로 교배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기인한다. .... 남자 한 명이 수많은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남자 한 명의 목숨 가치는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축이 아니다. 160

 

포탄과 로켓, 장거리 발사 무기는 노인과 어린이,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만약에 이 전쟁(1차 대전을 가리킴)이 그런 무기 위주로 치러졌다면 유럽 사회 전체가 입은 피해는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161

 

전쟁에서는 어쨌든 승리를 최우선으로 해야하기에 위선이나 기만, 이중잣대 등은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이런 시각은 다른 글에서도 일관되는데 바로 이 가정, 즉 일단 시작된 전쟁이라면 승리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웰식의 이중잣대가 발생한다. '언론의 자유는 필요하지만 동시에 언론의 국영화는 불가피하다. 소수의견을 내는 안 알려진 소규모 언론사나 출판사는 제외하고 대형언론사를 국영화 해야한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하는 이유는 적이 아닌 우리가 승리를 하면 적어도 거짓말을 적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등등. 적어도 우리가 적보다는 거짓말을 덜 하리라는 이 자칭 '분석'은 오웰의 순진함을 보여주는걸까 아니면 그저 프로파간다인걸까. 이보다 더 전형적인 프로파간다로 보이는 글도 있다. <영국군과 잠수함>에서 오웰은 침략으로 인해 넓은 영토를 갖게 된 독일보다 영국의 식량 사정이 더 좋고, 식량배급제 시행으로 전전에 비해 오히려 영국인들의 영양 상태가 더 개선됐으며 영국 잠수함의 개량으로 독일 잠수함을 상대로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배급제가 영국 국민들의 영양 불균형을 교정했다거나 전쟁으로 인해 영국인들이 돈은 덜 들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사람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오락과 여흥을 갖게 되었다는 등의 견해는 진심으로 저렇게 믿는게 아니라면 결과적으로는 견강부회일 뿐이다. 뿐만 아니다. 모순이라는 표현 외에 다른 해명이 불가능해보이는 부분도 있다. 1943년 12월 10일자 트리뷴에 쓴 칼럼(<인종 차별 문제>라는 제목은 국내 출판사가 붙였다)에서 오웰은 '니그로'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44년 8월 11일 자 같은 지면(<유색인 차별을 멈추려면>)에는 대놓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영국에서 복무 중인 서부 인도 출신의 니그로 병사가 국토방위군 제복을 입고 있는데도 유흥업소로부터 입장을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번역자가 '니그로'에 대해 "흑색 인종. 당시에는 '니그로'라는 표현을 지금처럼 금기시 하지 않았다"라는 각주를 붙여놓긴 했지만, 그보다도 의문은 오웰이 정말 자신이 한 말을 불과 8개월만에 뒤집었을까라는 점이다. 편집 실수가 아니라면 이는 그의 기억력이나 다른 어딘가에 착오가 있었음을 보이는걸까. 

(살펴보니 이는 번역자 혹은 출판사의 편집 실수는 아니었다. 사정을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43년 12월 10일자 글에서 정확히 오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58). "'니그로'(원문에는 'Negro')도 마찬가지다. 흑인 대부분은 이 단어를 소문자 'n'으로 쓰는 것을 증오한다. 하지만 지금도 지면에는 심심찮게 '니그로'라는 단어가 실린다. 이런 이슈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꾸준히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44년 8월 11일자에는 바로 위와 같이 썼다. "서부 인도 출신의 니그로 병사"의 원문 영어 표현은 정확히 "West Indian Negro working in this country"라고 되어있다. 즉 오웰의 입장에서 변호를 해본다면 그는 여기서 흑인 비하의 의도가 아니라 그저 인종을 정확히 명시하기 위해 마치 고유명사처럼 "West Indian Negro"라고 대문자 표기를 한 것이다. 그는 8개월 전에 자신이 했던 주장, 즉 흑인 비하 의미의 소문자 'negro'를 쓰지 말아야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George Orwell: A Literary Life>(1996)에 따르면 위에 언급한 번역자의 각주와 마찬가지로 당시에 대문자 'Negro'는 용인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오웰과 BBC에서 함께 일했던 인도인 작가 세드릭 도버가 대문자 'N'의 중요성 즉 소문자와 대문자를 구별할 것을 오웰에게 주의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번역자의 각주는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불충분한 설명이다. '대문자 'Negro'라는 표현은 지금처럼 금기시 하지 않았다'라고 고쳐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들은 저널리스트의 어떤 얄궃은 처지에 대해 생각케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사에 바로바로 개입해야하는 언론인이라면 즉각적 판단에 의한 공적 발화가 훗날 오류로 밝혀지거나 대중을 거스르는데 따르는 비판 및 설화를 피하기 쉽지 않다. 전시에 썼던 글에 대해 오웰이 전후에 해명한 적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상기 포함 이 책에 실린 몇몇 글들은 전시 상황의 특수성이 언론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직업적 저널리스트의 궁지를 예증한다. 직업 언론인이 아니라면 굳이 밝히지 않고서 침묵하고 넘어갔을 최신 이슈에 관한 의견을 표명함으로써 그들은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이 책에도 독자들의 격한 반론에 대한 오웰의 재반론이 실려있는데 바로 여기서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오웰은 모순에 대한 지적을 포함한 자신을 향한 비판이나 우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견결한 사회주의 신념이 있었기에 파시스트에 굴복하는 자신의 조국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프로파간다 방송물 제작에 참여했고 정부 정책 홍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배급제가 국민의 영양불균형을 교정했다는 주장은 전시에나 가능한 선전성 문장이지만 거기에 그의 어떤 진심이 전무하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어차피 치러야 할 전쟁이라면 모든 연령대의 인구가 골고루 제거되는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발언에서 생명 경시나 잔혹함을 볼 수도 있겠지만 하루라도 빠른 승리를 통해 더이상의 무차별적인 죽음을 막아야한다는 의지 그리고 무엇이 진정 더 중요한지를 착각하고 있는 평화주의자들의 모순을 일깨우려는 역설적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다. 정책 홍보를 통한 국민들의 정치 이해도 개선과 인종주의를 막기위한 지식의 전파를 역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유대주의를 상대하는 진보진영의 합리주의적 접근이 갖는 약점을 지적하는 일(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이 가능한 것은 그가 현실의 복잡다단함과 피할 수 없는 모순을 있는 그대로 인식했기 때문은 아닐까.

 

공적 발언을 하려는 굳건한('편향된') 신념을 가진 문필가가 실제 발언권을 얻게 됐을 때 어떻게 그 신념을 실천 및 변용하게 되는가. 오웰에겐 제국주의 체제 복무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약육강식의 세계 구조에 대한 냉철한 현실주의적 인식과 이상향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목표가 공존했다. 그래서 노약자와 여성을 젊은 참전 남성보다 중시하는 의견을 또다른 인종주의쯤으로 여겼을런지도 모른다. 국영라디오가 "밤낮으로 프로파간다를 주입하는 전체주의적 권역의 핵심이자 국수주의 선동의 주목적인 도구"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BBC에서 프로파간다를 행하고 정부에 의한 대규모 사회조사와 정책 홍보의 필요성을 역설한(어쩌면 그는 문필가가 아니라 개혁가나 행정가가 되고 싶어했던건 아닐까) 것도 그만큼 프로파간다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일 수 있다. 사회주의자라고해서 교육과 홍보를 무시할 필요가 없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오웰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나 이념이라도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무원칙의 맹목적이고 강퍅한 교조주의자인걸까.

 

출생률이 급감함에도 난민 수용을 격렬히 반대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극심한 주택난 속에 다같이 교류하는 공적 공간도 줄어들며 언어의 인플레 현상은 심한 반면 표현의 자유는 갈수록 줄어드는 영국 사회를 격렬히 고발하는 비판자의 초상이 이 책에서 보이는 오웰의 첫인상이다. 현재 진행중인 전쟁에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파시스트들의 승리나 득세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이번 전쟁이 결코 마지막일리 없다는 비관주의자의 모습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점점 읽어 나갈수록 보게되는 오웰의 또다른 얼굴은 진정한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목표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인류 해방과 복지를 바라마지않는 이상주의자의 그것이다. 사유재산 폐지는 첫걸음에 불과하며 사회주의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동지애 혹은 인류애라는 발언에서 여타 사회과학에 기반한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변별되는 오웰의 지향점이 확인된다. 서로 모순되거나 이중적으로 보이는 오웰의 발언들은 이렇듯 그가 추상적인 궁극의 목표와 이상을 두었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과학자와 달리 대중을 직접 상대해야하는 언론인의 특성도 있겠지만 오웰의 이런 관점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케한다.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의 변전을 규명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밝히는 것만으로 사회주의자가 바라는 세상이 도래할리는 만무하다. 모든 것을 아는 자가 그 모두를 바꾸거나 갖지는 못한다. 중요한건 쓰러지고 넘어져도 언제든 바라보는 목표점을 가졌느냐의 여부다. 바라는 바가 추상적이고 보편적일수록 현실의 각 단계에서 매번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동력을 유지하려면 어디서든 보이는 목표가 있어야한다.   

 

또 하나, 오웰이 아주 명징한 정치성을 띤 언론인이었다는 점도 더 생각해봐야 한다. 공산주의(자)를 향한 반감과 자본주의 비판, 영국 언론과 정치의 질적 저하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그 질적 저하의 핵심이랄 수 있는 언어의 타락에 대한 일관된 그의 근심이야 오웰의 독자라면 이미 익숙할테고, 이 책에서 확인되는 그의 모순적 서술들이 이전에 미처 몰랐던 오웰의 '약점'이나 '결점' 혹은 생계를 이어야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처지나 인간적 면모를 조명한다는 식의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들의 정치 이해도가 낮다 어떻다 하는 발언은 지금이나 그때나 대중으로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얻기 쉽지 않겠지만 이는 영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헤게모니 다툼이 배면에 깔려있는 발언임을 의식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발언들에서 읽어야하는 것은 오히려 전시였기에 더 분명하게 그어진 진영간 정치적 당파성이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되는 스페인 내전 기간 인민전선 내부의 분파들간의 갈등 같은 것은 2차 대전 기간 영국에서도 다르지 않았을테고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쓴 그의 칼럼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기보다는 '트리뷴'이라는 사민주의 신문을 읽는, 즉 그 정치적 성향과 이념이 또렷이 예상되는 독자들을 상대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그것을 읽는 행위 자체가 자신들의 당파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분명한 정치적 의사표시라는 점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은 추축국하고만 하는게 아니었다. 또 하나의 '내전'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전쟁이 다 그러하듯이. 분명하게 그어진 이중의 전선 아래 칼보다 강했을지 모르는 펜을 휘둘렀던 문필가 오웰의 초상이 여기에 있다.

 

이 책에 실린 오웰의 글은 노골적 반동이나 전향성을 띤 것은 아니지만 어떤 대의에 복무하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직업 저널리스트의 궁지' 따위로 부를 수 있는게 아니다. 이 글을 쓸 때의 그는 불편부당하게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는 '리포터'가 아니라 작게는 자신의 정치적 당파성을 재현하고 크게는 전시 체제를 지원하는 '이데올로그', 더 정확히는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전한다는 의미에서의 '칼럼니스트'였기 때문이다. 오웰의 시대로부터 반세기도 훨씬 지난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지금도 느끼는 언론 환경에 대한 환멸과 혼란은 어쩌면 이렇게 '저널리스트'와 '칼럼니스트'와 '리포터' 혹은 '저널'과 '기사'와 '선전'을 혼동, 오인 및 무시하는데서 기인하는지 모른다. 그럼 칼럼니스트란 누구일까. 자신의 발화가 갖는 내재적 필연성을 납득시킬 수 있는 논리적 정합성, 그리고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그 행위를 추동하게 한 대의와 명분에 대한 굳건한 신념과 진정성 그리고 태도를 공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 책은 예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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