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네 피요르드 투어 당일 아침, 캐리어를 기차역 안 락커에 임시로 넣어두고 출발했다. 일단 그날 밤 묵을 유스호스텔 방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설사 정해졌다하더라도 낮시간에 덩그러니 짐을 방 안에 두고 떠났다가는 단 십 분 안에 도난당할게 뻔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기차역에 와서 주의깊게 사용설명서를 봐가며 짐을 락커 안에 넣어두었다. 이제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왠 젊은 아시안 여성이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락커 사용시간은 어떻게 연장이 되느냐 등 사용법에 관한 것이었는데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딱 한마디, 잘 모르겠다였다. 하나도 도움 안되는 나의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은 걸음을 돌렸다. 방금 전 락커에 짐을 넣는걸 뻔히 봤을텐데 왜 모르겠다고 대답한걸까. 무엇보다도 지금와서 돌아보면 대답 자체보다도 쌀쌀맞기 짝이 없는 내 태도에 학을 뗐겠다싶다. 본능적으로 타인을 경계하고 멀리하는 습관이 반사적으로 나온거였는데 사실은 당시 그 순간에도 이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안한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용 요금 영수증을 챙겨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방금 전까지 있던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 얘기를 가끔 누군가에게 하면 더러는 내 예감이 틀렸던게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나를 목표물 삼아 낚으려 했을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불과 단 몇초만에 그 자리에서 사라진걸 봐라. 대상과 방법을 바꾸기로 하고 바로 빠져나온거다. 만약 진심으로 그런게 궁금했다면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물었어야하는거 아니냐' 등등. 하지만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런 의심보다 일단 '반응'을, 그러니까 '리액션'을 했으면 어땠을까싶다. 만약 진심이었다면? 정말 도움이 절실해서 주저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서 처음보는 사람, 그중에서도 그나마 같은 인종인 나에게 말을 걸어본거라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피렌체를 향하는 중이었을 때다. 기차 통로 건너편 옆자리에는 이번에도 우연인지 동양인 여성이 앉았다. 일개 관광객인 나와는 달리 이태리어(프랑스어였던가)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며 처음 보는 자신의 옆자리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낯선 이와 영어가 아닌 유럽 국가의 언어로 대화하며(이게 중요하다. 영어가 아니라는거) 친해지는 여행은 어떤 느낌일까. 혼자 상상하던 중 마침내 내 옆자리도 채워졌다. 한 눈에 봐도 뭔가 불안해보이는 눈빛을 가진 사내였다. 짐도 없이 훌쩍 몸만 올라 탄 그는 한동안 멍하니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우연히 그가 내 차림을 살피거나 하면서 은근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나를 계속 신경쓰고 있음을 알아챘다. 모르는 척 했지만 반복적으로 그러는걸 보고 있으니 자연히 이쪽에서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고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나 혼자 하던 중 딱 한번 그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현재 시각을 물어온 것이다. 이거 내 손목시계 브랜드를 확인하고 싶은거 아닌가라는 망상과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중에 기차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지역에서 멈춰섰다. 둘 중 한 나라로 보이는 관헌들이 들어와 여권검사를 시작했다. 안 좋은 예감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역시나 남자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 같더니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기차는 곧 다시 움직였고 움직이는 창 밖 광경 속에 경찰들에 둘러싸여있는 남자의 모습이 찰나에 지나갔다. 무전여행이라도 하는 중이었을까 아니면 일자리를 구하기위해 다른 나라에 들어가려던 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망명이라도 꾀하는 중이었을까. 옆자리에서 바라본 남자의 시종일관 그 불안한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타인에게 늘 친절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반사적으로 타인을 경계하는 내게는 안타깝게도 저런 이들이 가장 멀게 느껴진다. 질투라기보다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원활한 대인관계 유지에 요구되는 교화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다른 무언가를 기회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늘 한결 같을 수가 있을까.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는 자체가 내 머릿속에서 지어낸,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상상은 빠르게 커 나간다. 한 개인이 자신이 가진 사고의 관성과 습관과 편벽에 지나치게 경도되면 보고싶은 것만 보고는 조금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채 생각하고 싶은대로 사후정당화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워버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특정한 경향과 방향이 그 개인의 행동과 사고방식으로 고착될 때 이는 곧 '성격'과 '캐릭터'라 명명될 것이다.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과 평판이 이렇게 결정되고나면 그 다음엔 그러한 타인들의 반응에 내가 피드백하면서 그들을 다시 나의 시선으로 유형화한다. 그 먼 유럽 땅에서 그때의 나는 그 두 사람을 상대하는동안 어떤 선입견과 어떤 피드백을 했던걸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돌아보는 과거에 대한 감회는 수많은 생각들을 가지로 뻗쳐나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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