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조직적 범죄인 종군위안부제도에 가담한 당시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까지 단순한 응답을 넘어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는 왜일까. 요컨대 포스트콜로니얼한 책임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것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만약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는 사상에 대해서 무죄라면, 일본인인 나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나 조직적 범죄로서 종군위안부제도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조직적 범죄로서의 종군위안부제도에 가담하지 않았다"라고 확실히 주장할 의무를 지니고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는 우연히 일본 땅에 태어나, 일본 국적을 얻었고, 일본국가의 보호를 받아 온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적 범죄로서의 종군위안부제도에 가담한 당시 일본인을 결코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탄핵한다. 그런 이상, 나는 혐의를 받은 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보증받는 상태에서, 그들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도록 노력할 것이고, 그들의 범죄를 은폐하는 인간과는 우호관계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이라고 해서 내가 그들과 공범관계를 가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음을 공적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

전쟁 범죄 등에 대해서, 범죄자와 내가 동포라는 사실이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만약 '일본인'이라는 국민이, 가메이 가쓰이치로가 말하는 것처럼 공감에 의해(즉 공범에 의해) 통합된 집단이라면, 나는 그런 일본인일 필요가 없다. 이렇게 가메이 가쓰이치로가 사용한 '인간'과 '일본인'이라는 말과는 완벽하게 양립하지 않는 그런 방법으로, 나는 '인간'과 '일본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nbsp; 다시 말하면 일본인을 분할하는 일이다. ......단순한 유죄가능성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책임 단계에서 유죄의 정도나 전쟁범죄와 개인의 관련성을 탐색해 가는 일이다. 전쟁범죄자를 일본 국민 안에서 확실하게 떠미는 일이다. 일본인의 내실을 크게 변화시켜가기 위해서는 일본인을 통합시키기는 커녕, 일본인의 즉자적인 공동성에 분열을 일으키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일본의 국민주체에 간섭하고 그 일본인 통합의 환상에 관여하는 일이다.

......


국민적 동일성으로 한정된 일본인 대 한국인 전 종군위안부라는 사회관계에서, 국민적 동일성과는 다른 주체적인 입장으로 한정된 관계로 이행할...

 

사카이 나오키, <일본, 영상, 미국> 중 325~328pp. (굵은 표시는 인용자)

 

과연 이런 일은 가능할까. 그럼 다음과 같은 응답은 어떤가.

 

두가지 조건들이 집단적 책임을 현존하게 한다. 나는 내가 행하지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나의 책임의 이유는 내가 자발적으로 탈퇴할 수 없는 그룹(집단적)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의지에 의해 탈퇴할 수 있는 사업적 파트너십과는 전혀 다른 멤버십 말이다. ......

  모든 정부는 그 이전 정부의 선행과 악행에 책임을 지며 모든 국가도 과거의 선행과 악행에 대해서 마찬가지다. 이것은 심지어 그 전임자가 이미 시작해놓은 계약 동의의 신뢰성을 부정할 수도 있는 혁명 정부도 마찬가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은 샤를마뉴 대제부터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까지 프랑스가 해온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인수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은 내가 이 나라의 구성원이자 정치체의 대표인 하에서는 내 이름 아래 행해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들의 공에 대한 보상을 우리가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죄에 대해서도 늘 책임이 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그들의 선행을 우리의 공으로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악행에 대해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유죄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인 동시에 엄격한 집단적인 책임으로부터 오로지 그 공동체를 떠남으로써만 탈출할 수 있는데 어떤 공동체에의 소속 없이는 누구도 살아갈 수 없으므로 탈출이란 하나의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의 전환을, 그래서 어떤 종류의 책임을 다른 것으로 전환함을 단순히 의미할 수 있다.      

 

Arendt, H. 'Collective Responsibility', in Jerome Kohn(eds), Responsibility and Judgement(2003), Schocken Books, New York 중에서

 

아렌트에 의하면 다른 국가의 국민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립하는 집단적 책임이란게 있다. 직접적으로 개인에게 특정되는 사법적 죄과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에게 지워지는 정치적 책임이자 도덕적 책임을 가리킨다. 아렌트가 60년대 후반에 쓴 이 글을 알고 당연히 알고있을, 냉전 시대 내내 침묵했던 피해자들의 증언이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터져나온 90년대에 사카이 나오키는 위와 같이 국민공동체에 귀속됨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지워지는 탓에 수동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 '집단의 책임' 논의로부터 빠져 나와 능동적으로 반성하는 주체의 성립 가능성을 논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결론이란 전쟁범죄자를 일본 국민 안으로부터 분리해낸다는 급진적 주장이다. '나'와 전쟁범죄자들은 공범 관계가 아니며 그들을 우리 공동체로부터 밀어내는, 즉 '일본인'이라는 멤버십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인지라 사카이의 주장은 급진적인만큼 반동적이 되기 쉽다. 범죄자들을 추출 및 분리해냄으로써 '일본인' 공동체의 내부를 '정화' 혹은 '살균'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카이의 이러한 주장은 90년대 후반에 나온 우에노 치즈코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전쟁범죄 비판을 상기시킨다. 당시 우에노는 '일본인'이라는 국민국가의 국민 정체성보다 '여성'이라는 젠더 정체성을 더 우위에 두는 주장을 전개했는데, 이를 두고 결과적으로 식민침략 및 제국주의 비판을 무력화하고 가해자를 면책하는 수사학적 전략이라 서경식이 비판한 바 있다. 맥락은 약간 상이하지만, 일본 내부로부터의 반성과 역사 청산을 통한 가해자 처벌과는 별개로 사카이의 논의 또한 최종적으로는 '일본인' 정체성의 동질성 강화로 (그의 용어를 빌리면) '전위'될 가능성이 있다. 공동성에 분열을 일으키고 통합이라는 환상에 관여해 혼란을 주는 일과, '분할'이나 '떠미는 일'이 서로 동등한 층위에 서는걸까. 아무리 봐도 양자는 동일한 뜻을 공유하지 않는다. 공동체 내부를 균열시키고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어디까지나 내부에서 벌어지는 내부적 관점에서의 전개라면 '분할'이나 '떠미는 일'은 경계 획정을 이미 염두에 둔 이후의 논리 전개다. 시선과 관점에 있어 근본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또한 만일 이와 별개로 사카이의 주장이 어떤 방식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가능하다면 그때는 정말로 '결백한 일본인'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과연 이 경우 그러한 일본인은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까(이는 추후 논의가 더 필요하다).

 
"역사적 여건을 전제로, 책임을 묻는 부름은 나에게 호소해 온다.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난 일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일본인으로서의 전쟁책임에서 도망갈 수 없다"(321). 아렌트와 거의 흡사해보이는 이 발언에서 사카이의 '진심' 혹은 진정한 '의도'를 의심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일본 리버럴의 사상적 퇴락은 아닐까. 포스트콜로니얼하며 동시에 소수자 정치에 우호적으로 보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수동적이고 더 나아가 반동적이 되어버리는 일본 리버럴의 주장 말이다. 사카이는 집단의 책임을 논하는 아렌트와는 반대로 집단으로부터 개인으로 좁혀들어가는 과정을 상정하고 있다("집단으로서의 책임 단계에서 유죄의 정도나 전쟁범죄와 개인의 관련성을 탐색해 가는 일이다"). 개인적 책임을 특정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집단의 책임을 논하기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에노나 사카이 모두 국민국가적 정체성으로의 귀속을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환원하고 횡령하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무엇으로 (의도적) 오독하면서 이러한 국민국가 정체성으로 기우는 경향성을 극도로 꺼려한다. 하지만 국민국가적 정체성은 한 개인이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얼마든지 그리고 매순간 끊임없이 변용되고 재구성되는 일종의 구성물이지만, 그 안에는 그 개인이 손쉽게 다룰 수 없는 것들이 상당하다. 국가, 민족, 성, 종교가 대표적이다. 그 중 국민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한 개인의 삶을 이루는데 있어 때로는 결정적인 것 그 이상의 점성 높은 구성물이다. 늘 의식하고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으며 내 삶의 경계를 한정하는 동시에 확장시키는. 하지만 우에노는 이보다 젠더가 더 유의미하다고, 그리고 사카이는 국민국가의 국민이 아닌 다른 관계를 통할 때 가해자-피해자 사이의 사죄와 처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근대 이후의 인류는 국민국가를 디폴트 세팅으로 알고 살아왔다. 국민국가가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보자. 어쩌면 진정으로 그 세상에서는 전쟁을 포함한 어떠한 대규모의 집단적 가해-피해도 없을지 모른다. 또한 우에노의 젠더 혹은 사카이의 '정'의 공동체를 국민국가보다 우위에 둘 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죄와 반성을 둘러싼 이 모든 갈등은 애초에 식민지배와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다시 그 이전에 국민국가 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해결이 국민국가라는 인식적 지평을 양자가 공유하는 가운데 행해져야함은 너무나 분명하다. 

 

나에게도 '한국인'이라는 것은 '나'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른 집단에 대한 어느 집단의 가해 책임이 문제시되고 있는 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그 한 측면 때문에 '당신'으로 지목을 받는 것이다. 지목에 응답하는 것은 결코 "단일한 카테고리의 특권화나 본질화"가 아니다. 베트남 사람이 나를 "어이! 한국인!"이라고 지목할 때 "아니, 나는 남자입니다"라고 '나'의 다른 측면으로 응답한다면 그것은 얼버무리는 것이며 대화의 거부에 다름 아니다.

 

서경식,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둘러싸고 - 반半난민의 위치에서> 중에서

 

내셔널리즘 비판은 유효하며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국의 과거 내셔널리즘이 야기한 전쟁범죄를 면책하려는 세력과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의도치않게(?) 공명하는 흐름은 일본의 논단 쪽에서는 이제 제법 익숙한 레퍼토리가 된 듯하다. 그것이 고의인지, '악용'되었는지는 시비를 가리기도 어렵거니와 그 이전에 이를 따지는 일 그 자체가 소모적이다. 공적 지면에 글을 쓰는 학자나 작가에게 요구되는 책임감에 대해 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한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우에노의 항변은 흥미롭다. 발언 내용의 설득력이나 정합성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향한 비판에 대해 항변하는 어투 자체가 평소에 쓰는 지적 자의식을 한껏 휘두르는 '화장'한 문장과 달리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픈 의도와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못박아두기 위해서 반복하자면, 그것은 일본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내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는가. 내 생각과는 달리 주장이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235

그래도…… . ‘민족’이라고 하면 젠더를 무시한 것이 되고, ‘젠더’라고 하면 민족을 잊은 것이 된다는 ‘강요당한 대립’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을 “젠더를 최우선하는 사상”이라고 해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251 252

 

우에노 지즈코,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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