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후 3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비평은 어쩔 수 없이 '결과론'이기 쉽다. 등단 후 지금까지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완결된 어떤 비평의 서사 안에서 개별 작품 분석이나 작가론이 행해지는 것이다. 가토 노리히로는 일본 내에서 드물게 초기부터 긍정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온 문학비평가인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 (2017)는 그렇게 견지해온 자신의 무라카미 비평의 중간 결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가토의 문제작이었던 패전후론 (번역본 제목은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과 마찬가지로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처음 <패전후론>을 읽었을 때 낯선 서술 방식에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본격 학술 서적은 아니라고 해도 꽤나 담대하고 급진적이며 게다가 반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주장에 비해 그를 떠받치는 설명이 너무 모호한 탓에 그의 의도나 진정성(이 있다면) 그리고 주요 논지가 훼손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사실과 자료를 기반으로 하기보다 추상적 층위에서 전개되는 사변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지점에서 오히려 더 두루뭉술하고 우회적인 서술로 넘어가버려서 마치 그 자체가 해석의 여지를 의도적으로 남겨두는 하나의 문학 텍스트처럼 읽혔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전에 패전후론 출간 이후 겪었던 곤란을 털어놓은 바 있는데 이번 신간에서도 이와 결부지으면서 책의 요지를 밝히고 있다.

 

 

"1995년 <패전후론>을 쓰면서는 내가 문제를 꺼내면 정치학자나 다른 전문가들이 그걸 받아들여 생각해주겠거니 기대했습니다. 그게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며 다른 누군가 전문가들 가운데서 그 문제를 이어받아 전개할 사람이 나오겠지 싶어 거기서 그쳤지만 결국 인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어권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패전후론>은 번역되지도 않았는데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여러 비판을 내놓았습니다. 최근에는 영어로라도 반론을 펴볼까 싶었지만 모두 저 혼자 하지 않으면 안되겠죠." <미래로부터의 기습>(『사상으로서의 311』(2012))중에서 126p


나는 일본의 전후에 대해 물의를 빚는 평론을 쓴 탓에 좌우익 양쪽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아 사면초가에 빠졌던 평론가인데다 나쓰메 소세키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서도 일가견학이 있다. 그런 내가 무라카미를 긍정하는 것은 당연히 젊은 애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상찬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무라카미는 일본 순문이 달성한 최고점에 위치하는 견실한 소설가의 계보를 잇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렵다』(2017)중에서 20p

, 가토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일본 국민문학의 계보 안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이 책에서 하고 있다. 그동안의 무라카미에 대한 일본 주류 문단의 평가, 즉 사회와 세상에는 등을 돌린 '디태치먼트'한 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표현을 빌면 '싸우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마침내 결론쯤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전개될 하루키 소설의 큰 주제를 "미래지향적인 일본이라는 공동체의 재생"(264)이라고 단언하는데 이쯤되면 인접국의 독자는 선뜩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가토는 무라카미가 일본 문학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서구 취향의 작가라는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기각하고 그를 근대 이후 일본 문학의 정통성 안에 위치시키려한다. 이를 위한 비평적 근거로서, 일전에 우치다 타츠루가 무라카미 소설을 부재하는 아버지라는 주제로 읽어냈다면 가토는 부정성이라는 개념을 들고나온다.

근대문학은 근본적으로 아버지나 국가처럼 극복해야 될 부정의 대상을 설정한다. 문학의 목표는 따라서 부정성을 극복하는 것 즉 부정성을 부정하는 일인데, 무라카미는 일급소설가답게 이 임무를 고답적이고 촌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가토가 ‘<패전후론> 에 겪고 있는 컴플렉스를 노출하는 곳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패전후론에서 가토가 시도한 사고실험, 즉 전후 일본 국민이 겪는 집단적 인격 분열(개헌파와 호헌파,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피해국의 사망자보다 우선 자국의 전사자와 병사들을 먼저 조문함으로써 일본 국민이라는 단일 주체를 재건해야한다는 주장이야말로 바로 일본 사회가 겪는 부정성의 부정이고 부정성 극복하기인데, 이는 결국 좌우 모두로부터(그리고 피해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담론적으로 실패를 하게 된다. 그러자 이후 가토는 그 주장을 포기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주업인 문학비평에서도 동일한 가정과 접근법을 택하기로 하고 그 시도 중 하나가 바로 세상에 발언하는 '싸우는 소설가'로서의 무라카미를 국민문학에 편입시키는 일이다. 부정성을 부정하고 긍정적인 것을 긍정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가토에 의해 그는 "섬세한 부정성", "부정성의 자기 혁신"(49)을 이루는데 성공한 몇 안되는 문학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부정성을 부정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는 무라카미가 아니라 가토 본인이다. 그가 보기에는 비판이나 규탄 같은 단순한 부정만으로는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음에도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라 이번에는 일본이 낳은 현재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를 끌여들인 것이다.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반성하고 직시하기 위해서든, 한 명의 소설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든 가토는 네이션을 염두에 두고 거기서부터 사유를 출발한다. 무라카미를 더 이상 일본 문단의 변방에 내버려두지 않고 국민문학 안으로 편입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그래서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의 욕망이나 의지와도 일정 부분 공명한다. 하지만 가토는 이번에도 패전후론의 실패를 반복한다. 이렇게 담대한 주장을 하려면 일부 작품을 선택할 일이 아니라 무라카미의 전작을 대상으로 하던지 아니면 부정성의 부정이라는 주제를 마지막까지 관철해야 했으나 아쉽게도 책은 전반부의 밀도에 비해 후반부가 불균형할 정도로 무너져 있다.

   1972년 연합적군 사건과 결부짓는 <뉴욕탄광의 비극>에 관한 해석을 포함해 초기 단편 3부작을 커미트먼트하려는 무라카미의 분투로 읽어내는 독해는 참신하다. 몰락하는 부정성을 끝까지 관찰한다는 관점은 전반부에서 이렇게 일관된다. 그런데 중반 이후로 가면서 작품들을 상세하게 시기별로 나누면서 조금씩 주요 논지는 흐릿해지고 개별 장의 내용이 비약한다. 각각 개체의 세계’, ‘쌍의 세계’, ‘아버지와의 대치로 구분되는 전기, 중기, 후기 그리고 현재’(하루키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기에 이렇게 구분한듯하다)를 공동체의 재생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내고 있는데 각각의 시기가 어떤 기준과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변별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 30년이 넘는 긴 작품활동 기간을 임의적으로 구분하고 규정하려는 비평가의 시도는 어쩔 수 없이 빈틈을 남길 수 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서 대체 왜 이원화이고, 왜 아버지와 대치하는가. ‘어떻게는 있지만 도대체 왜이렇게 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은 부재한다. 가토의 모호한 서술과 비약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후기의 시작은 무라카미에게 큰 의미가 있다. 이때의 변화는 그가 소설 쓰는 방식을 나름으로 천착해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야기 세계에 몸을 던져 자신의 무의식 깊숙이 잠행하는 새로운 쓰기 방식을 얻은 가운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무의식 중에 그는 ‘아버지에 준하는 이의 그림자’와의 대치, 대립이라는 주제와도 서서히 마주하게 되었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가 그 만남의 장소였다.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에서 ‘아버지 죽이기’의 주제로 성장한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와의 대치’라는 주제에 잡혀 있기도 했다.” 226 227
 

 

그냥 단정하는 진술이 있을 뿐 여기에는 이유도 과정도 논리도 부재한다. 마찬가지로 읽다보면 어느새 무라카미는 사회와 공동체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을 위로하고 구원한다는 커다란 주제를 탐구하는 대문호 급의 반열에 오르는 반면 후반으로 갈수록 부정성의 부정이라는 탐구는 약해진다. 무라카미를 일본 근대문학의 전통과 계보 위에 정립시키려는 비평적 도전이 그의 소설을 즐기는 일반 독자들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마뜩찮게 보인다면, 그건 개별 작품에 대한 진지한 내재적 비평이라기보다 기성 문단의 하루키 비판에 대한 반론이자 메타비판이라는 인상이 강하고, 또 크고 작은 범주 구분과 그에 상응하는 적지 않은 수의 키워드가 등장함에도 그들간의 관계가 응집력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적으로 검증이 쉽지 않은 하나의 잠정적 가설로서 읽을 때 문학비평은 가장 흥미롭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비평가가 정의내리고 규정한다고 해서 문학의 계보가 최종완성 되지 않으며 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총괄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추수하고 교정하는 데는 능할지 몰라도 바로 지금 현재라는 이 자리에서 혼란스러워하는건 비평가 역시 일반 독자와 마찬가지이며, 그래서 작금의 비평은 성공할지 몰라도 먼 미래에는 실패하기 쉽다. 늦든 빠르든 비평가는 결과적으로 당대의 대중과 발을 맞춰가면서 접점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지금 무라카미 하루키가 근대 이후 일본 문학의 계보 바깥으로 이탈되어 있을까. 가토의 노력이 없다하더라도 향후 쓰여질 일본 문학사를 논할 때 과연 하루키의 이름을 제외하는게 가능할까. 소설가는 큰 주제를 천착하는 것이 가능한지 몰라도 시간과 역사 앞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비평가는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래서 무라카미를 네이션에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큰 주제에 매달리는 가토의 지적 분투는 어쩔 수 없이 패전후론의 기시감을 불러온다. 결국 이렇게 네이션에 매달리는 비우익 지식인의 역설적인 논리는 일본 사회의 자칭 리버럴세력의 자기 분열이라는 비판적 주장을 환기시킨다.

 

늘 상찬만 받는 작가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며 "가끔은 이런 매정한 바람을 맞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냐는 너스레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정작 비판적이라 할 만한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이다. 그 원인은 가토의 비평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해서도, 일본 문단 또한 우리처럼 주례사 비평이 주류여서도 아닌 처음부터 가토에게 비판적 독해의 의도가 없었던데 있는 듯하다. 국제 컨퍼런스에서 자국 작가를 폄하하는 이웃 나라의 지식인들을 보고서 본격적으로 그 작가를 옹호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문학비평가에게는 무라카미는 어렵다고 단언할 근거가 명징하겠지만 독자들에게는 특유의 문장이나 불충분한 논의 전개 방식을 차치하고라도 특정 작가의 작가론 그 이상의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어하는듯한 의도로 인해 가토 노리히로야말로 어려울 것이다. 과연 하루키는 자신을 두고 일본 공동체의 재생과 치유를 기원하는 작가라는 진단에 동의할까.

 

사족. 1.본문에는 몇 개의 표가 나온다. 그 중 1977년이 마지막으로 우치게바에 의한 두 자리수 사망자를 기록한 해라면서 언급되는 <3. 우치게바에 따른 사망자 수>의 경우 적어도 번역본에는 그 출처가 나와 있지 않다.

2.하루키에 대한 가토의 이전 비평집인 <무라카미 하루키 옐로 페이지>(2009)를 읽어보면 그의 하루키론의 전모를 더 자세알 수 있음과 동시에 신간과 비교할 수 있을텐데 이 책은 미번역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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