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풀러는 존 그레이를 가리켜 '우리시대 영국에서 위대한 풍향계 지식인 (weathervance)'이라 명명하며 경력 내내 이어온 그레이의 기민한 '지적 전향'을 풍자한 바 있다(풀러, 2007: 155). 노동계급 출신으로 옥스포드에서 학위를 받은 그레이는 70년대 중반까지 일반적인 노동당 지지자였으나 이후 기존의 좌파가 기술발전, 금융시장의 성장과 새로운 경제 블록의 등장 등 변화하는 세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자유주의 우파로 분류되는 소위 '신우파'로 거듭났다. 이런 흐름 하에서 그레이는 80년대 <Hayek on Liberty> 출간을 계기로 하이에크를 옹호하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자 그레이는 한번 더 지적 전향을 감행하는데 소비에트 블록 해체 후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와 보수주의 간 대립구도의 유효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블레어의 '신좌파'에 우호적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전향은 이전보다 더 근본적인데 그 이유는 자유주의를 연구하는 정치철학자인 그가 점차 자유주의 자체를 의문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8년 출간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에서 그레이는 일차적으로는 지나친 자유 시장과 기업의 세계화를 경고하는듯 보이지만, 단순히 정치경제학적 차원을 넘어 자유시장경제 자체를 서구세계의 패권과 지위를 유지하기위한 이데올로기이자 인류의 역사이래 계속된 계몽적 유토피아주의 프로젝트의 하나라고 단정한다.

 

단일의 전지구적 시장은 보편적인 문명을 지향하는 계몽주의 프로젝트에서 마지막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거짓된 유토피아적 구상으로 점철된 20세기의 프로젝트 가운데 보편적 문명을 지향한 프로젝트의 유일한 변형은 아니다. 구소련은 시장을 중앙계획으로 대체함으로써 보편적 문명을 추구하려는 또 다른 계몽주의 유토피아를 구체화시켰다.

 

... 이들 유토피아가 공유하고있는 공통점은 그 차이보다 더욱 근본적이다. 이성과 효율성에 대한 숭배, 역사에 대한 경시, 빈곤이나 파멸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생활방식에 대한 경멸에서, 이들 양자는 공히 계몽주의 사고의 역사를 통해 중심적 전통으로 자리잡은 합리주의적 오만과 문화적 제국주의를 바탕에 깔고있다.

 

전지구적 자유시장은 보편적인 문명을 추구하는 계몽주의 유토피아의 다른 모든 변형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 중에서

 

이 책은 그레이의 반유토피아주의자이자 반휴머니스트로서의 전향성명서에 가까운데 이후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의 전방위적 비판은 이러한 기조 아래 한층 더 과격해진다.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와 종교근본주의 비판이 격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레이는 인간의 복지와 편의를 지구상 그 어느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인간중심적인 서구의 모든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사상, 과학기술, 유토피아주의, 그리고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레이는 공공연히 자신이 그 어떠한 주의, 원리, 신념도 신봉하지않는다고 말한다. 무차별적인 전세계적 금융약탈과 각종 민족, 인종, 종교분쟁 등으로 인해 불신과 회의 그리고 급진적 비판이 어느 때보다 관심을 얻을 수 밖에 없는 작금의 시대에 그레이의 이러한 반-인본주의로의 전향과 종교 비판은 이전까지 그가 행했던 그 어떤 지적 전향보다도 많은 지지를 얻는 것으로 보인다.

   저술에 집중하기위해 대학교수직을 내려놓고 캠퍼스 밖에서 더 열심히 활동하는 공공지식인이 된 그레이는 강의실이 아닌 bbc 라디오 4 <a point of view>같은 교양프로그램의 단골게스트로서 부단히 자신의 주장을 전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이 프로그램에서 발표한 그의 글의 제목을 일부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와 사회 진화의 신화

-이성을 믿는 것은 어린아이같은 짓이다

-근대라는 신화

-유물론의 한계

-자유라는 이야기에 담긴 문제

-불멸의 패러독스

-신념을 신뢰하기

-셜록 홈즈와 이성의 로맨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이 전향 선언이라면, 전형적인 학술서적의 형식이 아닌 비체계적이며 단편적인 글이 모여있는 일종의 수상록이자 독서에세이인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이후부터 계속될 그의 사상적 전회의 본격적인 출사표이자 회의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남김없이 드러낸 신분증명과 같다. 이 책을 관통하는 급진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이 지금의 어지러운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나아가 현재 인류가 겪는 고통과 혼란을 견뎌내기위한 아이러니한 지적 시도로서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이러한 근본적 혹은 심원한 회의주의가 과연 어떤 실제적 효과를 내는냐는 것이다. 풀러는 그레이의 풍향계 지식인으로서의 궤적이 너무 변화무쌍한 나머지 그 요점을 알 수 없다고 비꼬았고, 데이비드 하비는 여전히 그를 '보수적 정치철학자'로 분류한다(하비, 2011:353). 테리 이글턴은 정도가 지나친 그레이의 허무주의가 진보라는 관념을 조롱한다고 비판한다. 모든 목적론적 사고를 부정하는 그레이의 사유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무위로 돌린다는 비판은 대체로 공통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급진적 '전향' 이전에 그는 과연 어땠을까. 1994년에 2판이 나온 자유주의 이론 개설서인 <자유주의>는 국내에서 2007년에 다른 두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에 의해 출간된 바 있다. 국내 인터넷 서점에는 그가 <호모 라피엔스><추악한 동맹>, <동물들의 침묵>, <불멸화위원회>를 쓴 그 저자와 동일인인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서 마치 동명이인인 것처럼 저서 목록이 나뉘어 있는데 실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감한 의도적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유주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사이에 벌어져있는 사유의 격차를 상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자유주의>에서 그레이는 연구자이자 정치철학자로서 자유주의 이론의 역사와 계보를 리뷰할 뿐 아니라 그 현실적 근거와 유효성 또한 평가한다. 다시 말하자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 이 책의 전반부는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태동한 근대 정치이론으로서의 자유주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긴 역사를 지닌 지적 구조물이자 서구사회의 근간을 이루어온 정치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 역사를 회고하고 후반부에는 구체적으로 자유주의의 근거와 토대를 점검한다. 후반부만으로 한정하면 이 책은 이론과 개념을 개관하는 단순한 입문서라기보다 자유주의의 현재 위상을 점검하는 비평서에 더 가깝다.

그레이는 자유주의의 네가지 특징으로 개인주의, 평등주의, 보편주의, 개량주의를,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필연적 구성요소로서 합리적 권위에 대한 보편주의적 언명과 개량주의적 역사철학을 든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천부 인권으로 대표되는 자연권을 그 주요 근거로 하는데 자연권은 다시 자연법에 크게 기대고있다. 그런데 자연권의 다원성이 과연 자연법 윤리가 배척하려 하는 권리들간의 다원주의적 균형을 피할 수 없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이냐가 자유주의 관념의 최대 난점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기실 서로 양립불가능해보이는 원칙들이 늘 어떤 식으로든 맞서면서도 동시에 공존해온 것이 자유주의의 존재 양식임을 그레이는 밝혀나간다. 비타협적 개인주의와 집단적 공리주의, 의무론과 목적론, 자유에 관한 소극적 견해와 적극적 견해, 사유재산을 바라보는 칸트와 흄의 차이 등등 이러한 (그레이의 용어를 빌리자면) 적대적인 구성적 도덕들이 모여 단일한 전통으로서의 자유주의 이념의 보편성과 지속성 그리고 그 위기까지 모든 것을 야기했다.  

 

언급했듯 이 책은 단순한 입문서가 아니라 그레이 본인이 바라보는 자유주의 개념에 관한 비평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객관적인 사회과학자나 연구자가 아닌 주관적 판단을 내리는 비평가로서 자유주의를 옹호하면서부터 본문은 조금씩 서로 모순을 빚거나 무리한 시도를 감행한다. 사유재산이 기본적 자유들을 실질적으로 또 적극적인 형태로 구현한다고 주장할만큼 그레이는 시장적 자유를 자유주의의 핵심적 구성요소로 판단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등장한다.


현존하는 모든 사회들은 재산권 침해라는 형태의 선행하는 불의한 행동들, 계약론적 자유의 제약들 그리고 경제력의 불공평한 사용 등 여러 요인들로부터 생겨나는 자본과 소득상의 배분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롤즈의 차등의 원리를 과거의 부정의를 교정하는 실용적인 방법으로 채택하자고 노직이 주장한 연유인 것이다.

   노직이 엄격한 소득재분배 원칙을 과거의 부정의라는 역사적 부담을 교정하기 위한 응답으로 추천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소득과 부의 재분배 양식을 만들어내려는 어떠한 시도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들에 의해 생겨난 유형을 파괴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하는 것이 되는 만큼, 정책 목적은 어떠한 유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 있었던 평등한 자유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득 재분배라고 하는 평등주의적 정책에 의해서 가장 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 재분배상의 부정의라는 현실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반응은, 무산자에게 이전의 부정의의 효과들을 상쇄시킬 수 있도록 세습재산을 이전해 줄 역자본세nagative capital tax 형태의 자본 자체의 재분배이다. 만일 국가자산을 매각하며 재원을 마련할 수 있고 그래서 정부가 당연히 사적 자본을 침해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고전적 자유주의 관점에서 그러한 재분배 정책은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실천 가능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을지와는 무관하게, 경제적 자유의 복원이 정의의 면에서는 자본 소유의 재분배를 가정한다는 점은 사회주의 사상의 소중한 통찰이며 공공선택 학파의 이론가들에 의해서도 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굵은 표시는 인용자) 142


불의한 행동들의 대상으로 "자본과 소득상의 배분"이라고 분명하게 지칭했던 것이 문장이 점차 진행됨에 따라 과거의 부정의로 한번 모호하게 표현되더니 그 다음에는 돌연 자본은 빠진 채 소득의 재분배라는 "평등주의적 정책"만은 안되는 것으로 축소된다. 왜냐하면 소득과 부의 재분배양식을 만들어내려는 어떤 시도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재분배상의 부정의에 대해서는 역자본세라는 재분배 방법을 제시한다. “자본 소유의 재분배사회주의 사상의 소중한 통찰로서 사적자본을 침해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러한 재분배정책은 장점을 갖기 때문이다.

이렇듯 처음에는 자본과 소득 모두에 대해 배분상의 부정의라고 하다가 별다른 근거없이 갑자기 자본만, 그것도 정확히는 국가자산 형식의 자본에 대한 재분배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다. 이전의 부정의를 상쇄하는데 있어서 왜 "사적 자본"은 놔두고 "국가 자산"을 매각해야할까? 소득과 부는 재분배하면 안되지만 왜 자본은 가능할까?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그가 말하는 자본은 뭘 가리키는 걸까. 소득 재분배를 이야기하다 바로 문단을 바꾸어 "자본 재분배상의 부정의"를 주장하지만 두 문단 간의 전환 간 관계도, 구체적인 논거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교묘하게 단어들을 병치하거나 분리해내면서 유리하게 논의를 전개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상세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그레이가 지향하는 자유주의의 모습과 그 위상을 가늠하기가 결코 쉽지않다는 것이다. 그의 급진적자유주의를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로부터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지만,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 허버트 스펜서와 그가 쓴 <윤리학 원리>가 매우 적극적인 긍정적 평가를 통해 자유주의의 정수를 담고 있는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등극할 때,


하이에크는 1960년에 그의 걸작 <자유의 헌법>을 출판하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금세기 자유의 문제에 관한 가장 심오하고 유명한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를 1970년대 말까지 받지 못했고 사회정의와 복지주의라는 수정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들은 쇠귀에 경읽기였다. 72

 

그러나 우리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평등한 자유의 원리를 법률과 입법의 다양한 영역에서 가장 완벽하고 체계적으로 적용시킨 예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스펜서에서이며, 바로 그 이유에서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는 가장 크고 항구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62

 

자신의 자유주의 가치관이 스스로 그토록 경계하던 (자유지상주의자라는 이름의) 정초주의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설마 인지하지 못한걸까.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에 대해 강력한 선호를 갖고 있었고,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결코 개인주의적 최소주의를 바라지 않았으며 완전한 자유방임주의는 역사상 한번도 실현된 바 없다는 등의 사실을 적시하고 일반균형이란 어떠한 경제체제에서도 기대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주장을 할 때 그레이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다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보고 있자면 독자는 헷갈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때로는 시장이 이러한 기준에 미흡하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만일 정부가 더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대의 효율성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개인들의 선택을 무시함으로써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18

 

이러한 적극적인 정부의 임무들은 분명히 목적달성 면에서도 효과가 크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과 사회봉사 분야에서는,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국가 서비스에 의존하는 대신 모든 사람들이 사적인 대책들을 마련할 수 있는 세액공제와 바우처 계획 제도에 대해 언급할 것이 많이 있다.  129 130

 

롤즈와 뷰캐넌의 입헌적 계약론적 접근을 향한 우호적 평가와, 시장을 최우선하고 정부와 계획을 일체 불신하는 노직 같은 자유지상주의자의 면모가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듯이 중립적인 학문적 서술 안에 주관적 가치 판단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그레이의 명민한글쓰기 방식은 이 책에서 줄곧 관철된다. 어떠한 부연없이 시장에도 조절을 향한 경향성이 관찰된다는 주장이 등장하는 한편, 자연권처럼 스스로 부여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로크적 시각의 논리적 부적절성을 극복하기 위한 절차적 정의의 시도로 롤즈와 하이에크를 같이 묶어내는 시도 같은 건 해당 분야에 정통한 연구자만이 할 수 있는 통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들이 결론에서 종합되지 않는다는데 이 책의 특징이자 어떤 의의가 있다.


일찍이 80년대 중반 초판이 출간된 이 책에서 이미 그레이는 향후 자유주의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지 않고 있다. 근대에 태어난 정치이론으로서의 자유주의가 탈근대시기에 적절히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유주의적 문제’liberal problem, 즉 화해불가능한 세계관들간의 공존의 조건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 현재의 자유주의는 무기력하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는게 그의 견해다. 21세기의 첫해를 911로 맞이한 이후,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리한 논쟁 속에서도 서구사회와 이슬람의 갈등이 격화되어온 지난 15년을 돌아볼 때 그레이의 예견은 냉정하지만 결코 틀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훗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에서도 반복하게 될) 소비에트 몰락은 서구 계몽주의 기획의 붕괴이며 자유주의 국가들은 다른 비자유주의적 문화 및 정치들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당부하던 그레이는 어느새 인류의 이성을 불신하는 급진적 회의론자로 거듭났다.
   <호모 라피엔스>이후의 그레이는 대안없는 허무주의를 자극한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들어왔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인간의 이성을, 근대적 기획을 불신하고 인류의 미래를 비관한다. 근대 이후 인류사는 계몽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치명적 오류로 점철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앞으로도 결코 낙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반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 진영간의 사상투쟁으로 점철된 20세기가 끝난 뒤 그 자리를 대신한건 종교와 민족들이 서로 교차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수많은 자잘한 분쟁과 국지전 그리고 특정 국가나 조직이 아닌 그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적들에 의한 테러와 비규정적 주체들의 폭동,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실질적 삶을 파괴하는 금융자본주의이다. 그리고 어떤 희망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호모 라피엔스>로부터 거의 20년전 <자유주의>를 쓴 그레이에게서는 아직 염세적인 비관주의자가 되기 전, 냉정하고 이지적인 겉모습 아래 조금씩 믿음이 흔들리는 합리주의자의 균열이 보인다. 그는 과연 지금도 시장을 열렬히 신봉하고 있을까. 전향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게 일반적이지만 자의식의 내재적 변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거기엔 세상을 주관화하고 판단하는 나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어떤 식으로든 선행한다. 근대의 계몽주의라는 기획을 의심하면서부터 그가 근대의 정치적 기획의 중핵인 자유주의까지도 불신하리라는건 비교적 자연스러운 유추다. 현재 자유주의가 처한 최대의 난점인 다원주의적 가치관 하에서 어떻게 자유주의의 우위를 관철할 수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적어도 이 책을 쓸 시점에서 그는 흔들리고 있다. 그 답이 계몽주의 역사철학이라는 순환 논증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162). 그렇기 때문에 앞에 언급한 명민한 암시적 서술 방식과 결론부에서의 이러한 주저함은 이 책에 묘한 불균형과 어색함을 빚어내고 있다. 하이에크 신봉자에서 탈근대적 회의주의자라는 극에서 극으로 이동하는 전향의 과정에 분기점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는 그 학술적 가치 이상으로 흥미로운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