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2016) /<무라카미 하루키론>(2007)을 읽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그를 시종일관 긍정하고 상찬하는 책과 전면적인 비판을 하는 책을 나란히 읽는다. 아무래도 칭찬보다는 비판하는 책이 더 눈길을 끌기 마련인데 후자의 책은 무려 하루키를 여성혐오와 역사 망각 및 소거를 부추기는 반문학적 작가로 규정한다. 지나친 단정이나 비약같아 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며 논지를 전개한다. 전자가 하루키 소설 속 ‘아버지의 부재’를 전세계적 공감의 유력한 이유로 제시한다면, 후자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여성 혐오와 유사 오이디푸스 신화에 기댄 단카이 세대의 자기 혐오 및 자기 살해라는 알레고리를 발견하고 그 원인으로 전후의 단카이 세대가 그들의 상징적 아버지인 히로히토 ‘살해하기’ 즉 그를 단죄하고 법적 정치적 책임을 부과하는데 실패한데 따른 욕구불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얼핏보면 동일한 코드를 각각 하루키 긍정과 부정의 이유로 제시하고 있는 셈인데 아무래도 문학비평가들은 ‘아버지’ 운운하는 정신분석적 비평으로부터 쉬이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하다. 플롯 같은걸 미리 정하지 않고서 쓴다고 인터뷰마다 반복해왔지만 후자를 읽다보면 하루키가 굉장히 치밀하게 복선과 플롯과 알레고리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냥 붓가는대로 쓴다'는 투의 작가의 말은 애초에 그다지 믿을만한게 못되긴하지만, 만약 고모리의 주장 그대로가 진정 하루키가 의도했던 바라면 좀 선뜩하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들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살아 숨쉬는 여자'가 기억하고 있는 것 따위 잊어도 상관없다는 용납과, 역사 인식이 공허해도 상관없다는 허용을 모든 독자에게 주는 것, 그것이 <해변의 카프카>가 '치유'를 주는 최대의 이유인 것입니다.
2002년에 20대였던 독자는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시절에 '종군위안부'문제를 알게 된 세대입니다. 그 사실과 맞닥뜨렸을 때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대치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대로 통째로 버려도 된다는 '해리'로 유인하는 것이 <해변의 카프카>인 것입니다.
고모리 요이치, <무라카미 하루키론: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중에서, 224
2.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 아직도 자신을 '젊은 작가'라고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1 이 책에서의 하루키는 과거에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익숙한 노작가의 전형이다. 80년대부터 줄곧 해왔던 발언들의 동어반복. 지겹지는 않지만 신선하지도 않은. 이토록 집요하게 되풀이하는걸 보면서 그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지켜내려고 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문단으로부터의 자의적 고립과 비평계로부터의 비판 혹은 시기와 질시(물론 순서는 앞뒤가 바뀌었겠지만). 이전까지는 독자로부터의 열렬한 지지와는 반대로 문단이나 비평계로부터 외떨어진 섬처럼 되었어도 이를 크게 개의치는 않았으나 이제 이를 마냥 방관할 수만 없다고 느꼈는지 어떤 식으로든 코멘트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듯하다. 실제로 이 책에는 자신을 향한 일본 문단으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언급이 꽤 잦은데, 과거와 달리 변명 아닌 변명, 혹은 특유의 '개인적' 방식으로 대응을 하려는듯한 대목이 더러 나온다.
이런 글이 나가면 세간에는 '아, 그렇구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쿠타가와 상을 못 타서 그렇게 문단을 멀리하며 살아왔구나'하고 순진하게 믿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그게 통설이 될 우려도 있습니다. ...하긴 똑같은 말이라도 예전에는 '문단에서 상대도 안 해준다'고 하더니 최근에는 '문단을 멀리한다'고 해주니까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62 63
이 책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건 하루키 특유의 소극적 '개인주의' 윤리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소설가의 자작론이라기보다는 소세키의 강연문 제목을 빌리자면 하루키판 '나의 개인주의' 선언서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이마저도 엄밀히 말하자면 개인주의라기보다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에고이즘에 더 가깝다. 자기가 하고싶은 일은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해야하며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또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제한이나 영향을 받기도 원치않는, 그래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만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됐고, 설명보다는 즉물적 혹은 비유를 동반한 묘사를, 이론과 지식보다는 관찰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소설가뿐 아니라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길 라이프스타일을 몸소 성취한 끝에 체득한 태도라 할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출몰하는 단어들은 '개인' 혹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라이프스타일에서 얻었을 ‘감촉’, '체감', ‘느낌’, ‘감개’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하루키 본인에겐 실정적 사물에 가까운 분명한 ‘감촉’, '체감', ‘느낌’, ‘감개’가 있는 것이다. 특정 직업세계나 하위문화의 세부를 깊이 묘사하지 않는 대신 평범한 일상과 생활을 돌연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바꿔버리는 문장가 하루키에게 ‘감촉’, '체감', ‘느낌’, ‘감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본인만의 무엇을 언어화하기위한, 그래서 ‘소확행’을 이야기하는 자기본위의 에고이스트 최후의 보루이자 최대의 미덕이다.
3.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읽다. 여행기에서 늘 그랬듯 여기서도 하루키는 먹고 마시고 듣고 달리는, 그러니까 여행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상을 영위하기위한 행위들에 집중한다. 일상의 연속이자 갱신으로서의 여행. 미식가가 아닌듯한 미식가이고, 자기 작품에 대한 비평은 그렇게 멀리하면서도 시종일관 음식과 음악과 도시를 품평하는 남다른 감식안의 비평가가 된다.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지역민처럼 직접 시장을 보고 탁발승에게 시주를 하고 LP판을 뒤지고 공연을 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확장된 일상을 사는 여행. 기실 여행자이기 이전에 그는 실제로 장기체류자이기도 했는데 해보면 알지만 장기체류자에게 일상과 비일상은 기묘하게 뒤섞인다. 서서히 익숙해지지만 그럼에도 결코 완전히 편입될 수 없는 낯선 타자의 공간에서 일상은 늘 어떤 공동을 남겨두게 마련이다. 여행지도 일터가 되는 작가라는 종족은 그 공동을 의식하면서 일상과 비일상 간의 간격을 예민하게 관찰하는데 여기서 하루키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 속 '행위'를 하면서 동시에 외부자의 시선에서 줄곧 '품평'을 멈추지 않는다. 이전에도 썼지만 특히 저 외국 자동차와 음식에 대해서는 실로 집요하다.
한번도 writer’s block을 느끼지 못한 채 글쓰는 재능을 유지하고 의지까지 충만한 하루키의 자기본위적 쾌락에 기반한 소극적 개인주의 윤리는 아무나 체득할 수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영감의 부족, 재능의 고갈, 망가진 건강, 가족과 친척, 업계 종사자등 온갖 잡다한 인간관계로부터의 스트레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본인만을 위한 시간과 환경을 확보할 물질적 기반의 부족등등.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로지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오랜 시간동안 공을 들여 구축해 그 환경과 루틴 아래에서 쾌락을 동반한 채 오늘도 그는 글을 쓰고 있다. 그럼 혹시 이러한 자족적 세계의 완성과 작품간 상관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생전의 안자이 미즈마루(그리고 우치다 타츠루도)는 제일 좋아하는 하루키 단편으로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을 꼽은 적이 있는데 그 단편에는 시종일관 안정적이며 깔끔하게 완결되고 정리되는 안온한 자족적 세계가 명징하게 재현되어 있다. 본인도 말하듯 경력 초기의 어떤 경향이겠지만2 최근의 장편들처럼 확장하거나 퍼져나가지 않고 또렷한 경계를 가진 자기완결적 세계의 서사 그리고 본인만이 가장 명징하게 '체감'할 '느낌', '감개', '감촉'처럼 언어의 불능성을 의도치않게 노정하는(사실상 하나마나한) 한계적 언어 표현은, 소설 창작이라는 공적 세계는 물론 사생활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한 작가만이 '체감'하거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물성의 양면은 아닐까싶다.
최종수정 2016.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