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이라고 하면 어떤 스테레오타입이 떠오른다. 도로와 거리 등 공공장소를 점거한 채 혐오발언을 일삼는 시정잡배들이나 주변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카메라 앞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망언을 반복하며 정치적 잇속을 챙기는 정치인들 같은 것 말이다. 패전 이후 자신들의 상처받(았다고 느끼는)은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려는듯한 이들이 과연 진정한 우익일까. 누군가의 표현대로 이들은 그저 '우익의 타락'일뿐이지 않을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천황과 도쿄대>에서 일본 우익의 역사는 실로 깊은 정도가 아니라 이들을 빼놓고는 아예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의 근현대사 자체를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그 중에서도 패전 전까지 고위 관료와 정치인, 언론인, 학자를 배출한 제국대학, 그 중에서도 핵심인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치열한 사상투쟁과 배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서문과 보론에 의하면 도쿄대를 비롯해 질적으로 저하된 현재 대학교육 전반의 문제를 파헤치겠다는 다치바나의 애초 계획은 일본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점차 바뀌면서 온갖 문헌을 뒤진 끝에 우익의 부상과 득세를 중심으로 근대 일본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그 결과 지금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신 이후 일본을 설계한 엘리트를 배출한 '도쿄대' 그리고 그 치열한 사상투쟁과 갈등의 중핵인 '천황', 이 둘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 특유의 집요하리마치 상세한 문헌수집과 그를 바탕으로 한 다량의 직간접 인용으로 채워져 권당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엄청난 분량임에도 평이한 문장과 빠른 전개로 읽기는 수월하고 다른 문헌으로부터의 풍부한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거기에 더해 본디 주간지 연재물답게 본론과 별 상관없는, 이를테면 두 번이나 도쿄제국대 총장을 역임한 야마카와 겐지로가 두 번의 총장 재임 사이에 가짜 초능력자들을 식별해냈던 일화 같은 곁가지들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처음부터 관료양성이라는 확실한 목적을 위해 설립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지성을 길러내기보다는 국가에 직속되어 체제 존속을 위한 편향된 지식의 일방적인 암기를 강요했던 도쿄대의 교육방식과 그 과정에서 배출된 법조, 언론, 정치, 행정부, 학계의 엘리트들이 좌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하며 일본 현대사를 이끌어간 과정을 다치바나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빠른 필력으로 그려낸다. 그 안에는 메이지 초기 서양 지식의 학습 수준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던 수준이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지식을 흡수하고 축적하고 가르쳤는지 등의 시대상도 포함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육성되고 배출돼야했던 엘리트들, 그 과정에서 난립한 각종 우익 결사체들과 그에 의한 조직적인 좌익과 지식인 숙청의 기록 등은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역사서보다 더 복합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만이 벌일 수 있는 사상투쟁과 난동, 테러 그리고 전쟁 과정 동안의 세세한 일화들은 읽고 있으면 어떻게 가능했을지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다. 

 

물론 그 중 단연 압권은 우익들의 무차별적인 지식인 숙청이다.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다뤄지는 대부분의 일화들의 내용 전개는 일관적이다. 즉 서구로부터 기원한 근대 수입물로서의 대학 제도, 그리고 그를 떠받치는 자유로운 학문 연구의 자유와 비판적, 합리적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익들의 전방위적 난동과 폭력, 그리고 그에 대한 대학과 지식인들의 대응과 실패가 바로 그것이다. 도미즈 히론도, 우에스기 신키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타 잇키, 이노우에 닛쇼, 히라이즈미 기요시, 미노다 무네키, 히지카타 세이비 같은 우익 이데올로그와 정치인의 선동과 공격 그리고 그 결과로서 도쿄제국대학의 초대 총장인 가토 유키히로의 (자의에 의한) 저서 절판부터 가와카미 하지메, 다키가와 유키토키, 미노베 다쓰키치, 쓰다 소키치, 야나이하라 다다오, 오우치 효에, 가와이 에이지로 같은 지식인들의 숙청이라는 패턴이 줄곧 반복됐다 (물론 그 중에는 깡패와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살인과 폭력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일련의 갈등들이 결국 하나같이 메이지유신의 골자이자 일본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인 천황과 천황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천황의 법적 정치적 지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한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례인 천황기관설 논쟁에서 보듯 왕정복고는 어쨌든 개념상의 공백을 남겨두는 것이 불가피했고 그 공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문제로 일관한 갈등을 유발했다. 다만 그 논쟁과 사상투쟁의 수준이라는 것이 실로 조야했던 것이 '놀라운 일들의 연속'인 이유다. 다치바나도 말하듯이 실제 그 내용보다는 우선 천황을 '기관'이라 지칭한데 대한 반발에서 시작했음이 분명해보이는 천황기관설 '논쟁'을 포함해 그 논쟁이라는게 대개 아래와 같은 식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 국체와 맞지 않는다고 보이는 주장은 전부 공격 대상이었다. 미노다등의 말을 빌리면 일본 국체란 천황의 권위와 의지를 무조건 최상위에 놓는 절대적인 천황중심주의이다. 따라서 천황기관설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도 안 된다(민이 주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는 어디까지나 천황이어야 한다). 의회중심주의도 안된다(의회에 허용되는 것은 천황 중심의 정치를 보좌하는 것 뿐). 미야자와 도시요시는 여전히 천황기관설을 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고 로야마 마사미치는 의회 중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안된다. 야베 데이지는 중민정이라는 이름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안 된다. 그리고 세계법 이론을 주장하는 다나카 고타로는 천황보다 세계법을 위에 두기 때문에 안 되며, 국제법의 요코다 기사부로도 천황보다 국제법을 위에 두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각국 헌법 위에 자연법 또는 국제법이 있다고 보는 것은 천황기관설이상으로 흉악”). 2권 693 694

 

무오류의 현인신으로서의 천황이라는 존재가 서구로부터 기원한 대학이라는 교육 제도를 떠받치는 합리주의 및 비판적 정신과 근본적으로 대치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갈등의 본질이다. 결과적으로 전근대적인 천황이라는 존재를 근대적인 입헌 국가 체제와 어떻게 접합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일본국의 핵심 즉 국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양상으로 비화했다. 그나마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보장되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1930년 이전까지의 좌익의 시대가 끝나고 31년 이후부터 시작된 우익의 득세는 사회 전방위적으로 그들이 정의한 천황중심의 국체를 최우선해야한다는 사상투쟁으로 번졌고, 그 결과 35년 천황기관설 논쟁과 이후 국체명징운동, 36 2.26 사건을 분수령으로 군국주의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준비가 일단락되었고 그 총집결판이 이듬해인 37년의 중일전쟁 발발과 38년 국가총동원체제인 것이다. 이런 맥락 하에서 당시 우익들은 이미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까지도 모두 국체명징운동의 확장판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일본이란 곧 일본 국체이며 항일이란 곧 일본 국체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므로 황군의 응징 대상은 이 일본 국체에 대한 저항 의지이다. 황군의 의義전은 국체명징전이다. (중략)

신국 일본을 지켜주시는 신령국체명징의 의지이며 신의 뜻에 순종하는 간나가라의 길은 신민에게는 충의신도이다. 국체란, 말하기도 황공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한 분 외에 일본국민은 전부 신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도덕은 충의신도이다. 또 주권재민의 데모크라시 민주정과 그 분파인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황군의 응징대상이며 현재 지나사변은 이 국체와 상용할 수 없는 항일 의지를 쇄파하는 국체 명징전이다. <<원리일본>>1937 9월호 권두언 <신령은 국체 명징 의사이며 황군은 국체 명징 의지의 행동이다> 중에서. 2 805.

 

메이지 초기부터 시작된 논쟁부터 대동아전쟁까지 그 모든 일련의 사태가 결국 이전과 달리 천황중심주의로 한정된 국체를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1930년 이전까지는 공산당을 포함한 사회주의와 좌익 세력의 견제가 그나마 가능했지만 1931년과 32년 발생한 혈맹단 사건, 5.15 사건, 신병대 사건등의 우익 테러를 기점으로 그리고 그 전부터 우에스기 신키치와 이노우에 닛쇼 등의 우익 이데올로그의 사상 투쟁으로 흐름은 우익에게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고 따라서 30년 이후부터는 우익 운동의 흐름을 보아야 현재까지 이어지는 일본 역사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 다치바나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필화'의 형식, 즉 출판물을 통한 지면상의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나중에 공권력에 의한 판매금지와 절판 그리고 복자간행이라는 방법을 택할지언정 어쨌든 당시 일본에서는 다종다양한 출판물이 간행되며 공론장이 펼쳐졌고, 그 논리와 논쟁의 내용과 질은 차치하고라도 좌우익의 지식인들이 지면을 통해 논쟁하는 문화가 성립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천황제 파시즘은 형식적으로라도 논쟁이나 토론 일체를 허용하지 않은 채 강력한 검열과 탄압에 의해 출판과 언론의 자유를 사전에 제압하고 사상투쟁이 아닌 공작과 고문, 사법제도를 활용해 정적을 축출했던 철권통치의 6,70년대 대한민국 독재정권보다 어떤 면으로는 자유의 틈새가 넓었던지도 모른다. 칼 슈미트 식으로 말하면 예외상태를 규정하고 선언할 수 있는 최종주권자로 천황을 볼 것인지 그게 아니면 서구 입헌군주와 똑같이 헌법이 정한 제한된 자유만 갖는 제한권력자로 볼 지를 두고 지식인과 정치가들이 언론 활동과 의회를 아우르며 논쟁하는 광경은 우리에게 제법 낯설다. 이러한 논쟁 문화, 그리고 학내 신문인 <제대신문>이 주요 언론으로서 기능했고, 기본적으로는 학내 갈등인 교수들간의 파벌 다툼이 주요 일간신문을 통해 일거수일투족 보도될만큼 제도권 내 대학 구성원으로서의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지금과는 판이했던 시대상은 당시 사회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역동성의 중심에는 역설적이게도 반동적 우익 운동이 자리한다. 당시 우익들이 보기에 도쿄제국대학은 학과를 불문하고 사상적으로 불온한 교수들로 그득했다. 그렇게 많은 교수들이 의심스럽게 보인다면 그건 그렇게 바라보는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의심스럽고 불온하다는 방증일 뿐이다. 즉 그들은 대학이라는 제도로 대표되는 서구로부터 기원한 근대성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좌익과 자유주의 계열의 교수들이 쓴 글 속 아주 사소한 단어나 문구 하나에도 발끈하며 학교 밖으로 내쫓아야한다고 선동했다. 처음 발표되고 출간된 지 몇 십 년은 지난 학설과 출판물을 다시 시비 삼는데도 그것이 받아들여져 출판금지와 면직을 당했다는 사실은 지금보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조지 오웰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던건 그만큼 대학 바깥의 사회도 우경화했고 그 흐름에 쉽사리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가 가능했던 과정과 이유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연구가 있을텐데 어쨌든 지식인만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우익을 견제하지 못했다는건 기본적으로 천황제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와 지지가 널리 공유되었음을 증명한다. 왕정복고는 그만큼 국민들에게 강하게 소구됐고 천황의 존재로 인해 우익은 자신들의 활동에 강력한 모멘텀을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천황의 존재 자체인 것이다. 

 

이 책을 읽는동안 내내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도 그래서 전쟁기간동안 천황의 책임과 관련한 것이었다. 알다시피 종전 협상 과정에서 천황을 통해 일본 사회의 급격한 동요를 막고자했던 미국의 이해와 맞물리면서 국체호지, 즉 천황제는 유지되었고 히로히토는 어떠한 처벌이나 책임도 지지않았다. 그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기대했는데 오로지 이 책의 내용만으로 종전 결정 과정에서의 히로히토의 행보 혹은 그의 진의를 유추해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45년 당시 시점에서 본다면 히로히토는 유신 이후 100년도 채 안 되어 천황제를 폐지하고 황통이 끊어지는 수치를 당할 수는 없다. 하지만 또한 형식적 입헌군주로서 대신들의 뜻을 재가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어쨌든 개전을 최종 결정한 자로서 법적, 정치적 책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에게 고통을 가한데 대한 응분의 도덕적 책임을 지는 자세 또한 보여야 한다. 그럼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 결과가 바로, (스스로 어느 정도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하는) 폐위가 아닌 차선으로서의 46년 1월의 '인간 선언' 그리고 직접적인 공식적 사죄를 반대하고 나선 중신들이 들고 나온, 특히 지금 기왕의 추이를 깊이 반성하고 서로 戒愼(경계하고 삼감)하여 잘못을 거듭하지 않을 것을 굳게 명심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같은 3인칭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국민들이 피해와 고통을 입지 않도록 막겠다는 것이 성단의 이유였다는건 그저 하나의 명분에 불과했다고 종전 공작 가담자들과 실제 참여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천황중심주의자들은 흔히 히로히토가 중신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그저 재가만 했을 뿐이기에 개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형식적 승인과 내심 속 암묵적 동의를 배태한 승인 간의 구별을 본인 외에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각의 의견을 종합하고 그것을 대신하여 최종 승인할 뿐인 말그대로 입헌군주로서의 역할만 했다고 하기에는 재위기간 동안 2.26 사건을 비롯해 히로히토가 자의로 정치에 개입한 사례들이 무수하다. 히로히토 어록에 의하면 전쟁기간동안 자신은 단 두 번의 자의적 개입만을 했고 그를 계기로 변했다고 반성하듯 말하지만 이는 신뢰하기 힘든 자기합리화의 발언일 뿐이다.

 

"히로히토는 중립조약을 맺고있던 소련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해서, 히틀러 독일의 군사력을 '공통의 적'인 영미쪽으로 돌리려는 전략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회고가 사실이라면 이 또한 명백한 헌법개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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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사태에 대해서 참모총장이나 군령부 총장을 통해 명령을 내리는 봉칙명령이 아니라, 히로히토 자신이 직접 군사령관에게 '불확대'명령을 내려 이를 실행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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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의 의향이 실제 작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군관계자가 남긴 많은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필리핀의 바타안 요새 공격, 과달카날 공방전에서 있었던 항공대 출동, 혹은 과달카날 철수 후에 있었던 뉴기니에 대한 새로운 공격명령등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요시타 나리히코, <히로히토와 맥아더> 중에서.

 

오히려 패전 후 스스로 '인간'의 지위로 내려온 다음 미군 점령기간동안 히로히토 본인의 의사에 의한 정치개입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 보전과 함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맥아더를 비롯한 점령군 사령부와의 지속적 접촉을 통해 철저한 반공체제 정착을 도모했다. 히로히토에게 '국체'란 반공에 의한 안보체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루어 본다면 그가 종전 결정 당시 폐위를 고려했다거나 중신들과 달리 국체호지에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않았다거나하는 소문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패전 이후 상징천황제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천황기관설 '논쟁' 같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논리 싸움과 사상투쟁의 재발은 제도로서의 천황제가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변 아시아 국가와 불화하기만하는 현재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롯한 우경화는 결국 국체호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45년 8월의 '성단', 그 이전에 35년 미노베의 축출과 국체명징운동, 그리고 그 이전에 현인신의 후예가 지배하는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의 이데올로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복하자면 그래서 일본의 근대란 천황이라는 신화를 어떻게든 '민주(벌써 이 명칭부터 천황제와 모순이긴하지만)주의 체제' 안에서 접합해내려는 작위의 시도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식민체제로부터 해방된 45년 이후의 한국에서 전개된, 서구로부터 수입한 형식적 민주주의 아래 관철된 오랜 독재체제라는 모순된 표리와 함께 아시아에서의 근대성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느냐는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게 한다.


일방향의 진보라는 근대의 계몽주의적 가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금의 일본 상황은 만주사변을 즈음한 시절의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크게 모자라지 않다. '정상국가'로의 복귀를 바라마지 않는 현 일본정부의 염원은 미국의 암묵적 승인 아래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넷우익'을 비롯한 우파의 선동과 역사 다시 쓰기 같은 사상 투쟁도 가열차게 진행중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의 일본 우파는 천황중심주의를 대놓고 외치기보다는 전세계의 다른 우익과 마찬가지로 성소수자, 여성, (자이니치를 포함한) 외국인 같은 그 사회의 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순수한' 내부 집단 결속과 국가주의라는 모든 전세계 우파들의 공통 목표를 향하고 있는건 매한가지다. 그럼 그때처럼 우익에게 공격을 당하고 배척될 정도의 비판적 지식인 무리가 지금 일본 사회에 형성되어 있을까.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려보면 과연 언제가 비극이고 언제가 희극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부정적 상상엔 한도 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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