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만으로는 절대 여배우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둘 다 좋다고 하는 것은 비평이 되지 않을 것이고 억지로라도 선택을 하는 것의 비평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평가는 이토록 단호하다. 이 단호함에 대해서는 이미 <감독 오스 야스지로>에서 접한 바 있다. 그 책의 ‘종장’을 읽고도 영화비평을 하겠다고 나설 이가 있을까. 이를테면 그 맨마지막 문단 속 한 문장. “해석이 시작되는 순간 사람들은 이미 눈동자의 폐기를 도중에서 멈추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서로를 반영하는 이 화면, 저 화면의 초점에 몸을 둔 채 거기에서 스스로의 소실을 체험해야 한다” (200). 지식의 박람을 전시하는 장으로 영화비평이 변해버린 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 영화를 대하는 일반적 자세가 되어버린 지금, 다시 영화를 ‘보는’ 일은 가능할까. 과연 ‘스스로의 소실을 체험’할 수 있을까. ‘이해’ 이전에 ‘인지’하라는 요청에 지금 관객은 응답할 수 있을까.
그의 주저 <표층비평선언>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서 번역출간된 선집 <영화의 맨살>이 하스미 시게히코 비평세계의 진경을 보여주기에 턱없이 모자르다는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개괄적인 영화론과 메타비평이 모여있는 1부의 글에서 접하는 하스미라는 비평가의 첫인상이 까다로운 이론가에 가깝다면, 개별 작품의 평과 감독론이 담긴 2,3,4부에서 자신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본인이 지향하는 영화 글쓰기의 윤곽을 그려내는 하스미는 1부와 달리 이론가라기보다는 전투적인 논객, 유려한 에세이스트, 꼼꼼히 지도첨삭하는 선생님 같은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다. 본문을 읽는동안 그의 글로부터 받았던 세가지 인상을 짚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가 영화를 읽어나가는 방식에서 예의 일본 비평가다운 일면을 확인했다. 즉 어떤 디테일이나 코드를 하나 잡아 영화 전체를 또는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일거에 관통해버리는 것이다. 그건 가시적인 사물이나 기호일수도, 혹은 비가시적인 서사상의 패턴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존 포드의 하얀 에이프런, 히치콕의 낙하(종의 세계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운동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의 존재론적 약점이라는 통찰), 곡선의 세계로서의 프리츠 랑, 존 포드 영화 속 ‘던진다는 것’ 등등. 이들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주제론적 세부'에 속하는 것들이다. 특정한 디테일의 세부를 통한 텍스트 이해는 장르는 다르지만 문학에서의 가라타니 고진, 서브 컬처에서의 아즈마 히로키 같은 다른 일본인 비평가나 사상가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면모이기도 하다. 일본 비평이나 사상공간의 어떤 특징인걸까.
두번째, dvd 등장 이후 영화광들이 온통 영화의 고고학자가 되어버린 탓에 정작 동시대의 영화와 호흡을 같이하려는 움직임이 줄어드는데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그는 영화의 현재성에 집중하는 리얼타임 비평을 권유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젊은 비평가들의 등장과 그들의 작업을 기대한다. 그가 뽑는 베스트목록에는 여전히 고전이 수두룩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개봉하는 영화에 관한 비평을 통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시점”을 얻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조금 억지라도 좋으니까, 그 집착을 어떻게든 언어로 옮깁니다”.
마지막으로 부수적인 재미로서 80년대 세계영화계를 주름잡던 감독들과 평론가 간의 유대와 친목의 풍경이 흥미로웠다. 영화평론가가 특정 감독들과 이 정도의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광경이 가능하리라고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스미는 고다르가 스위스의 자택으로 초대해 편집중인 작품의 초기 시사의 기회를 얻은 이들 중 한 명이며, 에드워드 양이나 다니엘 슈미트와의 지속적이고 각별한 사적인 우정도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영화의 황금기로 구로사와를 빼고 오즈와 미조구치, 나루세를 뽑을 때, 그러면서 구로사와를 외국에 그럭저럭 알려진 감독쯤으로 치부해버릴 때, 또 시드니 루멧을 ‘2류 감독’으로 분류해버릴 때 보이는 단호함은 만약 비평가에게도 자격증이란게 있다면 최우수등급 자격소지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대가의 풍모에 가깝다. 누벨바그의 한복판인 60년대 초 파리라는 시공간에 있었으면서도 박사학위논문을 위해 일체의 영화관람을 포기했고, 그런 가운데 자국의 필름 메이커인 오즈의 죽음을 프랑스 신문에 난 토막 기사로 접했다는 일화 등은 그가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시대를 거쳐왔는지를 새삼 상기하게 한다. 즉 대부분의 현재 영화 관객과 달리 그가 무성영화부터 실시간으로 보아왔고 따라서 엄청나게 방대한 아카이브를 염두에 두며 지금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60년대 누벨바그를, 서부극의 융성과 소멸을,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가능케했던 스튜디오 시스템의 몰락과 감독 3대장의 퇴장을, 또 그밖에 수없이 명멸해간 전세계 영화의 운동과 흐름을 실시간으로 목도한 비평가가 지금의 젊은 관객이나 비평가와는 다른 비전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스미의 초기 저서들은 추상적 사유와 특히 난삽한 문체로 악명이 높다고 하고 이 책에서도 맨 앞에 실린 초기 글인 <영화, 이 부재하는 것의 광채>에서 그런 일면을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불문학자가 아닌 영화비평가로서 그의 문체는, 비록 이해를 돕기위한 우리말 번역을 거쳤음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이 책에 실린 글에서는 읽기 어렵지 않다. 오히려 학자가 아닌 비평가로서 그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 비평가의 의견만을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누구도 영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저 자신의 이해를 타인에게 최대한으로 설득하고 거기에 책임만 지면 될 일이라고 할 때 그리고 억지로라도 선택을 하는 것의 비평성을 말할 때 그는 이론가이길 거부함과 동시에 비평을 주체적 결단의 행위로 바꾸어 버린다. 하지만 이 역시 비가역적인 해석의 정전을 독점하는 주권자의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반대다.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해답으로서의 비평은 어불성설이며 비평을 번역으로,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번역으로 가정해야하고 그래서 비평가가 과거의 입장을 바꾸고 말을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진정 따져야 할 것은 말을 바꾸었다는 사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 말바꾸기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얼마든지 말은 바꿔도 된다, 거기에 책임만 질 수 있다면. 영화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최후까지 수호하는 이는 어쩌면 창작자와 제작자가 아닌 비평가일지도 모르겠다.
영화평론가는 금주 개봉 영화의 가이드, 최신 이론의 주석 작성자, 혹은 '별점테러'하는 전문적 폄훼꾼만은 아닐 것이다(그 전부일 수도 있지만). 하스미에게 영화는 물신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서 다른 그 무엇에도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내주지않는 독립된 그 무엇임에는 분명하다. 한 편의 영화를 둘러싼 세세한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지식에 구속되기보다 오히려 ‘창조적인 무지의 적극성’을 옹호하는 것은 그가 영화의 심미적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어떤 식으로든 견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며 이는 표층비판선언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사건은 오로지 육체의 표면, 사물의 표층에서 일어난다”.
주변에 널린 ‘영화비평’을 한다는 책들에 비하면 순조롭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저자가 벗겨낸 영화의 맨살은 부드럽지는 않지만 그 서걱거리는 맨살의 구석구석에는 사유의 조각들이 붙어있다. 그리고 저자가 거쳐갔을 그 서걱거리는 생각의 속살을 더듬는 가운데 촉지할 수 있는 어떤 느낌이 분명히 있다. 저자의 다른 글을 통해 그 맨살의 촉감을 더 느끼고 싶다. 글은 더 읽고, 영화는 더 확실히 ‘보는’ 것이다.
사족
번역상의 비문과 자잘한 오기 등이 적지 않은건 아쉽다. 그나저나 자크 베케르의 영화에서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았던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