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리 세대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건 2013년에 나온 어느 일본 드라마에서였다('사토리'가 아니다). 승진이나 출세에 대한 욕망은 커녕, 엄한 선배들 밑에서 늘 기죽어있고 시무룩하며 사건 수사에서마저 별다른 의욕이나 열의를 보이지않은 채 자잘한 실수를 저지르는 젊은 형사를 타박하면서 그의 선배들이 낙인찍듯이 이봐 유토리’, ‘저 녀석은 유토리라서 안돼하고 부르는 식이다. 찾아보니 유토리 세대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학습의 수월성보다 전인 교육에 초점을 맞춘 이른바 유토리(여유) 교육정책의 대상자인 2002년부터 2007년까지의 학생 세대, 즉 대략 1987년부터 99년까지의 출생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용어는 점차 특정 교육 정책의 대상자를 가리키는걸 넘어 젊은이 일반을 향한 기성세대의 경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했는데 대체로 리스크가 크고 도전정신이 필요한 일이나 힘든 일을 기피하고, 남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책임보다 권리를 우선시 하거나 매사에 열정적이지 않고 적당히 하자는 사고방식을 가진 가상의 젊은이상을 의미한다고한다. 버블의 끝물이나 이후 잃어버린 10이라 불리는 시기에 태어난 이들을 향한 그 경멸섞인 호칭엔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세대 전체를 대표하기도하고 반대로 그가 속한 세대가 공유하는 집합적 특징을 한 개인이 오롯이 체현하기도 한다는 가정이 응축되어있다.


본디 사회학은 늘 세대보다는 계층이나 계급, 그리고 인종과 젠더등에 더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것은 세대라는 개념이 사회()적 단위로서 덜 중요하거나 불필요해서기도하겠지만 애초 그것이 가늠하기 꽤 어렵고 난처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만하임은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자연법칙적인 규칙성과 더불어 작동하고 존재하는 세대요소는 정신적-사회적 수준에서 가장 정의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만하임, 2013:94) 학문적 대상으로서의 세대 개념의 난점을 지적했다. 일군의 동일한 개인을 두고 어떤 특징에 따라서는 a세대라고, 또 다른 특징에 의해서는 b세대로 분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계층이나 계급만큼 사회과학적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근거나 논리적 정합이 또렷하지 않은 것이다. 만하임에 이어 세대 개념 규정의 난점을 주장하는 어느 학자 역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특정한 현상은 과연 그 세대 특유의 것인가 아니면 제도의 변화를 반영하는 행동방식의 변화인가? 제도의 변화를 불러온 사건은 특정 연령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가? 거기에서 왜 하나의 세대를 따로 추출해 분류해야하는가? 경제불황이나 전쟁 같은 경험을 특정 세대만이 전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대, 정확히 말해서 세대라기보다는 특정한 코호트의 크기와 규모는 사후에 규정된 결과이기 쉬우며 이는 다시 말해 코호트의 체험이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기억의 맥락을 조직화하고 제도화함으로써 보존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세대는 종종 하나의 귀속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만하임의 표현대로라면 모호하게 정의된 세대위치에 속한 뒤 집단적으로 경험한 기억이 사후에 귀납되는게 아니라 연역되는 것이다 (렙지우스, 2014). 다시 말해 '세대'란 한 개인의 실존을 구성하는 온갖 수많은 정체성을 추출한 다음 거기에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곱하거나 더하여 사후에 붙인, 말그대로 세대 보다는 코호트를 표시하는 그저 하나의 사회적 사실에 귀납적으로 갖다붙인 별명에 지나지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라는 개념이 유효할 수 있다면 그건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명명법을 택함으로써 호명하는 이들이 그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보았는지, 더 정확히는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일군의 연령대에 속하는 사람들을 묶어 특정한 이름으로 호명한다는 것은 타자의 정체를 가늠해보고 싶어하는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그러나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다. 특정한 연령대에 속한 이들이 공유하는 생각, 가치관, 행위, 습속등을 통계처리하듯 집산하고 그로부터 공통적인 속성을 추출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무척 편의적이긴하지만 결국 호명당하는 이들보다는 호명하는 이들의 욕망이 더 또렷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학술적 저널보다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대중매체에서, 또 학계보다는 광고계나 마케팅쪽에서 이러한 속류사회학스러운 개념을 꺼내들며 호들갑을 떠는 장면을 보는 것은 일면 자연스럽다.


'사토리 세대’('유토리'가 아니다), ‘88만원 세대'같은 용어들은 해당하는 일군의 세대들이 처한 불우한 정치경제적 현실과 그에 대한 대응방식을 두고, 각각 이들이 자신들이 처한 궁지를 극복하지못한 채 체념했다고 진단하거나, ‘비참한사회적 사실로서의 상태만을 적시한다. 두가지 모두 공통점은 해당 세대에 속하는 구성원들의 집합적 특징을 그저 그들의 바깥에 위치한 외재적 현실로부터의 강제와 압력에 대한 반응과 수용과정으로 집약하는 것이다. 이름은 쓰는 자에게 달려있고 이름이 곧 전부라는 식의 역시 흔해빠진 유명론을 끌어오지않더라도 어떤 특정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들이 거꾸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추상화된 현실이나 가상으로부터 붙들려버리는 수행적(performative) 발화를 행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덧 가난은 디폴트 세팅 같은 것이 되어버린 탓에 누구나 다 힘들고 어려우니 불우한 세대론에 포박되어버린 나도 같이 절망해야할 것 같고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누가 더 불우한지를 내기하는듯한 절망의 경연 속에서 자학에 빠진다. 젊은이들이 다 나약해빠져서 그렇다는 기성세대의 저주에 가까운 비난이든 그것이 윗세대가 아랫세대를 착취하는 허위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라는 사회학적 진단이든 작금의 세대 담론엔 분명히 젊은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타자를 대상화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리고 거기엔 그들의 수동성이 온존하기를, 혹은 정반대로 정치적 각성을 통한 급진적 운동으로의 전환을 바라기도하는 양면적 가능성이 모두 잠재할 것이다. 아마 조선일보가 일본과 한국간의 시공간적 맥락의 차이에 의도적으로 무지한 채 담론화하고자했던건 저임금을 받아도, 충분히 누려야할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해도, 자유로운 개인의 의견을 표명하거나 개진할 수 없어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쯤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했던건 아니었을까. 세속의 장삼이사에게 '달관'이란 '세상이란게 원래 그래'같은 식의 체념을 긍정하는 것에 다름 아닐테고 이것이 바로 호명하는 자가 보고자했던 숨은 욕망일 것이다.


세대론에 관한 논의가 번번이 허망하게 공전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 특정 세대에 관한 사회과학적 논의가 아닌 서로의 시각차이로 인한 세대간 논쟁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또 그것이 명명하는 자의 욕망이 투사된 타자화된 대상의 상징을 선취하려는 다툼으로 비화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대론에 관한 논쟁을 두고 앞에 말한 잠재하는 양면적 가능성 둘 다를, 아니 차라리 세대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저런 딱지붙이기를 오롯이 거부하고 차라리 그런 딱지들이 어떻게 붙여지고 포장되며 또 수긍하게끔 탈색되어 쓰이고있는지를 살피는 일일 것이다. 거기에 바로 온갖 xx 세대를 만들어내려는 이들의 욕망과 그 대상이 되는 이들 사이의 오도된 대립과 긴장이 있다. 물론 그 대립의 주체는 실제로는 세대가 아니라 계급일 것이다.

 

 

<참고>

카를 만하임 (2013), 세대 문제, 책세상.

미하엘 빌트, 울리케 유라이트 엮음 (2014) 세대란 무엇인가?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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