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있고, 더 자격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 (그럴 힘이라도 있었겠는가?),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 (맡겨지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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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 95-97
조르주 아감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근원적 궁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품위가 아닌 것이 되는 장소, 자신의 존엄과 지존을 잃지 않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장소"인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에게 최악을 경험한 사망자를 대신하여 그곳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은 이 물음에 대해 답을 하려는 시도이다.
1장은 일반적인 통설, 즉 수용소 체험의 증언 불가능성이라는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념을 반박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아우슈비츠를 '말할 수 없다'거나 '불가해하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것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것에 다름없다. 즉, "아우슈비츠의 영광에 기여하는 것이다". 증언자는 '증언의 불가능성의 이름으로 증언을 해야한다'(51). 그러나 과연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선언하듯 당위를 설파한 다음 아감벤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2장은 아우슈비츠가 불러온 죽음의 격하와 그 상징이자 이 책의 중심 소재인 '무젤만', 즉 '이슬람교도'를 탐색한다. '이슬람교도'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최소한의 인간성마저도 박탈당한 채 인간으로부터 비인간으로 넘어가는 상태에 처해있던, 그래서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수용자를 의미하는 수용소 내 은어다. '이슬람교도'의 존재는 삶의 존엄이 아닌 죽음의 존엄마저도 찬탈함으로써 마침내 죽음이 격하되는, "삶과 죽음 너머의 실험이 일어난 장소"로서의 아우슈비츠를 증명한다.
3장은 그런 '이슬람교도'의 존재를 증언하는 생존자의 '부끄러움', 즉 살아남은 이가 죽은 자로 인하여 느끼는 죄책감과 수치를 비롯한 심적 분열을 돌파해내려는 아감벤의 지적 시도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주된 방법론인 개념이나 단어의 언어학적 기원을 추적하는 한편으로, 법전, 증언 문학 그리고 여타 관련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대체로 이 장에서 그의 논지는 대략 두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첫째, 부끄러움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간이 근본적으로 벗어던지는 것이 불가능한 내재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부끄러움이란 자기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싶은 충동에 근거하고있으며 따라서 애초에 불가능한 그 욕망은 곧 우리 존재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탈출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존재론적인 상황에 다름없다. 아감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를 타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 진전시킨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타자의 존재를 상정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란 주체화와 탈주체화가 … 절대적 공존 속에서 산출되는 과정이다” (161).
둘째, 이번에는 언어학적 차원에서 말하기 행위를 통해 발현되는 주체의 지위를 검토한다. 현대 언어학의 이론을 빌려 언어와 담화(행위)를 구분하면서 아감벤은 언표로부터 담화과정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어긋남과 불일치, 그의 표현으로는 '환원불가능한 이접'을 핵심적 논리로서 여러번 반복해서 내세운다. 어떻게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메워지지않는 불일치를 인정하게되면 '불가능성이야말로 증언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194)임을 이해하게된다. 즉 증언이라는 발화 행위 자체에 내재하는 불가능함을 내세워 이를 돌파해내려하는 것이다.
담화-사건의 절대적 현재 속에서는 주체화와 탈주체화가 매순간 일치하므로 살아있는 구체적 개인도 또 언표화의 주체도 완전히 침묵한다. 달리 말하자면 말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언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바로 말하기의 불가능성이 말하기를 장악했음을 –어떻게 그리 했는지는 모르지만- 의미한다. 176
담화라는 순수한 현재 속에서의 언어-사건은 감각과 경험들을 하나의 통합적인 중심에 귀속시키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러한 감각 및 경험과 그것들의 자기 현전(자기 앞에 있음)을 되돌릴 수 없게 분리시킨다. 184
따라서 어떤 주체가 처음 의식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앎과 말함의 어긋남이라는 형식을 띤다. 아는 자에게 그것은 말함의 불가능성이라는 쓰라린 경험이고, 말하는 자에게 그것은 그만큼 쓰라린 앎의 불가능성의 경험이다. 185
요약하자면 담화 행위 속에서 살아남은 자와 말하는 자도 모두 (일시적으로) 물러나고 언어만이 남게되면서 증언의 자리가 마련된다. ‘불가능한 말하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추상적이고 사변적 논증을 통해서 그는 연거푸 말을 한다는 것은 근본적 불일치를 감당하는 행위임을 역설하면서 증언 행위를 정당화하려고한다. 이는 다음 장에서 아감벤의 주체에 관한 이론으로 한층 발전한다.
4장은 푸코의 ‘문서고’ 개념과 증언의 관계를 탐구한다. 아직 말해지지않은 비규정적 대상이 모여있는 장소로서의 문서고는 그런 점에서 담론 및 담화, 그리고 무엇보다 증언 행위에 대한 비유가 된다. 여기서 앞에서 나온 아감벤의 주체화 이론이 한층 심화된다. 그가 보기에 주체는 무규정적 대상으로서 생명을 지닌 존재자와 말하는 존재자 사이의 이접이 빈자리를 드러낸다. 이런 주체의 빈자리와 마찬가지로 증언 역시 말의 가능성과 발생 사이의 우연적 관계로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말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불가능성을 증언하는 주체성을 요구한다. 이로부터 주체성이란 이렇듯 단순히 살아남은 자가 아닌, 빈자리로서의 주체 즉 증인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증인은 말할 수 없는 자를 위해 말을 할 수 있게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 다음, 이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작자’라는 뜻의 라틴어 어원인 auctor이 추적된다. auctor는 ‘작자’ 외에도 ‘매도인’, 조언하는 자, 설득하는자 그리고 무엇보다 ‘증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그리고 이를 아감벤은 증인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증거로 삼는다. 'auctor'는 단독으로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을 도와 증거능력을 제공한다. 이는 증인에 선행하는 말이나 행위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고 무능력함을 의미하고, 따라서 증언이 그 무능력한 행위를 도와야만, 즉 “증언할 수 없는 자의 증언을 통하고 보완할 때만 진실성과 존재 이유가 있다”. 따라서 생존자와 ‘이슬람교도’는 분리될 수 없다. 오로지 양자의 통일이면서도 차이인 것이 증언을 구성한다 (222).
'이슬람교도'를 그의 주저인 호모 사케르와 연관짓는 것으로 논의가 마무리된다. 아감벤이 보기에 푸코가 최초에 제시한 생명 권력 개념과는 달리 현재의 생명 정치는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으며 그저 '살아남게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채 그저 목숨이 붙어있을 뿐인 식물인간적 삶, 그의 표현을 빌자면 '벌거벗은 생명'의 극한적 예로서 이슬람 교도는 "절대적인 생명 권력적 실체"(230)이다. 따라서 이슬람 교도처럼 생존과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둘간의 불일치로 인해 증언이 가능해진다. 역사의 과정들 속에는 반드시 환원불가능한 이접이 남아있으며 그 이접 속에서 각각 남은 것들이 증언할 수 있는건 증인이 갖는 근원적 불일치를 받아들일 때, 즉 말함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승인하는 조건 한에서이며 그렇게될 때 증언은 절대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증언 주체의 본질적 분열"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 책의 개괄적 요약이다. 보다시피 그는 말하는 주체의 지위에 관한 추상적 논의에 집중하고있다. 고정적인 무엇인 아닌 인간은 항시 분열적 상태에 처해있으며 그 불안정함과 분열된 상황으로 인해 오히려 말을 하는 자와 생명을 지닌 자 사이에서 증언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증언하는 이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하려는 시도가 기여하는 바는 분명히 있다. 증언하는 자는 그저 죽은 자에게 몸을 빌려주고 말을 대신 전하는 '신들린 육신'이나 기계가 아니다. 비록 그 둘은 애초부터 환원불가능한 이접의 것을 남겨둔 채 조우하지만 그럼에도 증언이라는 행위 속에서 임시적인 하나의 통합된 주체를 이룬다. 주위에 도움을 구하기는 커녕 제대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지도 못한 채 죽어갔던 '이슬람교도'의 존재는 증언자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그나마 현재까지 성취한 역사적이며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인류의 반성과 성찰도 가능하지않았을 것이다. 발화가 통합적이고 완결된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일테다. 그저 입 밖으로 흘러나온 '언어'가 아니라 어떤 힘을 갖고서 그걸 들은 이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이끌어내게될 때, 그 말만이 '발화'인 것이다.
논지와 별개로 아감벤의 이러한 추상적인 논증 시도가 얼마나 실천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요는 실천적 차원에서의 논쟁을 추상적 층위에서 해결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혼란이다.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혹은 ‘위안부는 없었다’등의 발언을 둘러싼 논쟁은 구체적인 판단이나 (잠정적) 결론이 세세하게 내려져야하는 사법적 판단이나 학술적 차원에서 행해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언의 진위여부를 점점 더 검증하기 어려워지고 실제 직접적 행위자나 관련자의 목소리를 듣기가 힘들어짐에따라 그 목적을 이루기가 곤란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아감벤은 살아남은 증언자의 주체(성)를 재규정함으로써 이를 논파해내려는 추상적이고 사변적 논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제 있었던 사실에 관한 동일한 증언도 그 의미와 무게는 조금씩 퇴색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직접적 관련자가 아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힐난에 대해서도 증언자는 매번 어떻게든 스스로 신뢰성을 입증해야하는 힘겨운 부단한 노력을 수반해야한다. 이런 상황에서 증언자 본인의 주체적 지위를 굳건히 정립하는데에만 초점을 맞춘 아감벤의 논증이 과연 어느 정도 실천적 효용을 발하게 될지 대답하기란 쉽지않다. 물론 여기에는 구별되어야하는 두 가지 지점이 혼합되어있다. 증언자와 증언 내용의 사실여부 및 신뢰성을 걸고 넘어지는 '음모론자들'에 대한 항변이 애초 이 책의 목표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감벤이 여기서 하고자하는건 외부로부터의 의심에 찬 시선이 아닌 증언자 스스로가 겪는 수치 및 심적 분열에 대한 일종의 변호에 가깝다. 따라서 이 책이 얼마나 실천적 효용을 갖느냐는 질문은 방향이 잘못된 우문일 수 있으나 두 지점이 또렷이 구분이 되지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발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주체가 도래한다는 주장은 증언자의 지위를 되려 약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지않을까. 차라리 세세하고 구구한 이유와 논리를 찾기보다 증언자의 무결함을 당당하게 선언하는건 어떨까. 인류의 역사를 앞으로 끌고나가는 보편성을 구현하는 체험자로서의 지위는 어떠한 진영논리나 정치공학적 계산 또는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거치기보다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으로 던져지듯 선언되는게 맞는게 아닐까. 수정주의 역사관이라며 '주의'를 자칭하는 그저 반동적이며 퇴행적인 수사에 대해서는 특히 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해를 해본다면 아감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수사는 (반쯤은) 옳고 또 옳다.
여하튼 아감벤의 주장이 증언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갖는 중요성을 핵심적으로 간취해내고있음은 분명하다. 부끄러움은 존재에 내재적이며 주체의 윤리적 각성을 일깨워 증언을 비롯한 구체적인 책임의 행위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오히려 필수적이기까지 하므로 증인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죽은 자를 책임지는 일이란 무엇보다 기억의 책무를 행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결단코 변하지않는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빨리 잊으라는 폭력적 강요에 저항해야하는 이유는 단순히 죽은 자를 잊지않고 애도해야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행위를 통해 남은 자들마저도 ‘이슬람교도’로, 비인간으로 전락하는걸 막고 진정한 인간이라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으며 또 그것만이 “항상 이미 반복되고” 있는 아우슈비츠의 회귀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