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정신적 위안과 신체적 안락함을 제공하며 또 이를 통해 노동력을 재충전하는 물리적 공간이다. 사적인 일상의 대부분을 영위하는 내밀한 공간으로서의 집은 그러나 동시에 거액의 화폐 가치를 갖는 엄연한 하나의 자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산이라는 추상적 관념과 물리적 공간이라는 구체적 실질이 합쳐졌을 때 집이라는 개념이 온전히 완성된다. 물론 여기에는 '집'으로부터 '가정'이라는 또다른 개념으로 전환하기위해 요구되는 다른 요소에 대한 고려는 아직 없다.

 

Exhibition(2013)은 집의 추상성이 구체성에, 즉 소유관계의 변화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삶에 균열을 야기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시작한다. 집을 팔려고 내놓은 이후 주인공인 거주자들의 삶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하는데 이는 사고파는 상품으로서의 자산이라는 개념이 갖는 소유관계 변화가 구체적인 생활의 양상까지 바꾼다는 암시다. 이후부터 영화는 변하지않고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가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여기서는 변하지 않고, 쉽게 변할 수도 없는 고정화된 사물로서의 주거공간이 그 권태의 원인이다. 이제부터는 추상적 권리가 아닌 구체적인 물성이 문제다.

 

법적인 부부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동거인인 중년의 두 남녀는 주거 공간과 각자의 작업실을 함께 갖춰놓은 런던의 한 주택에서 생활과 일을 모두 한 곳에서 처리하는 자족적 생활을 하고 있다. 낮시간에 일을 할 때는 인터폰으로 연락하면서 자신만의 공간을 독점적으로 점유하지만 식사와 수면 등 일상적인 생활은 여느 부부처럼 같이 영위한다. 그러나 일터와 주거의 공간이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양 편의 경계는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 지속되기 시작하자 남자가 작업실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여자는 주변 소음에 극히 민감해지고 조금씩 관음에 탐닉한다. 창 밖에서는 이웃집이 개조 공사중이고 거리 위 수상해보이는 사람들의 행동도 눈에 들어온다. 이를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극복은 없다. 굴복만 있을 뿐. 이러한 일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지 여자는 멀쩡히 사용하던 의자를 돌연 자위의 도구로 쓰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성적 일탈에 집착한다. 그 과정에서 남자와의 섹스 거부는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남자가 자신과 집을 떠날까봐 극도로 두려워한다. 이는 남자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철저히 집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정해진 일상의 루틴으로부터 벗어나는 어떠한 행동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남자가 그토록 갈구했던 두 사람의 섹스가 이루어진 장소가 그들의 집이 아니라는 점은 정곡을 찌른다. 익숙한 루틴을 반복해야하는 일상의 공간은 급기야 일상의 삶 자체를 조금씩 옥죄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점점 생활 자체가 불편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자기 집에서마저 느끼는 불편함과 불안전한 느낌. 사적 공간에서마저 소외된 이방인 되기. 그러나 성적 일탈마저도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궁극적 답이 되지는 못한다. 엔딩에서 여자는 영화가 시작할 때의 권태에 찌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있다.

 

이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내가 아니라 아주 잠깐 나오는 심야의 런던 거리 스케치다. 거의 하얀 색에 가까운 가로등 불빛으로 인한 극명한 빛의 콘트라스트 속에서 극도로 조용한, 차라리 일체의 움직임이 사라진 정물에 가까운 런던 거리 이곳저곳을, 결코 산책이라 할 수 없는 빠른 걸음으로 통과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익숙한 실내에서의 여유롭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장 정적인 공간에서의 가장 동적인 움직임. 실내에서는 불가능한 연속 보행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의 그동안 억압됐던 심리를 보여주는듯하다.

 

등기부 등본으로 대표되는 추상적 소유관계상의 지위는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서로 다를지 몰라도 어느 공간이건 그 안에서 사람 사는 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사를 해보면 누구라도 안다. 인간은 건물과 공간에 철저히 맞추어 살 수 밖에 없음을. 집을 줄이면 아무리 값비싼 살림살이라도 포기해야하고 식사, 세탁, 청소, 휴식, 수면 등 구체적 영위들도 이전과는 그 양태가 바뀐다. 집이 좁아지면 우선 사람과의 거리가 신경에 쓰이고, 집 주변으로부터 얻는 편의가 줄어들면 생활이 조급해진다. 누구도 고정화된 사물로서의 공간을 당장 혼자 힘으로는 변화시키지 못하니까. 그 고정성을 해체하거나 변형하지않는 한 그 안에 어떤 성격과 계급, 지위를 가진 사람이 살건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공간에, 건축물에 적응을 해야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집은 실제로 60년대 준공 이후 몇번의 리노베이션을 거쳤다고 하는데 나선형 계단과 슬라이딩 도어도 처음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초 완공 이후부터 지금까지 집이 겪은 내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이곳을 거쳐간 주거자들의 생활 양상도 상이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집이 인간의 삶(목숨)을 획정한다는 명제의 극단이라할 흉가 배경의 공포영화도 비로소 이해가 된다.

 

내부 장면을 전부 카메라를 고정한 채 찍음으로써 집의 전체적인 구조가 어떠한지 관객이 짐작하기는 어렵다. 제한된 프레임과 미장센 하에서는 아무리 실제로 쾌적하고 편리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관객에게는 답답함과 폐소공포증만 유발하기 쉬운데 오히려 이런 면을 부각함으로써 영화는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인간관계와 그로 인한 권태, 또 그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과정을 실내극이라는 한정된 조건임에도 마치 스릴러를 보는듯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정작 영화가 끝날 때까지 딱히 일어난 사건은 없는데도 말이다. 고정화된 공간에 너무 푹 잠기면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정신의 활력마저 고정된다. 영화 속 두 인물들의 일탈 행위마저 지리멸렬해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정화된 공간, 이동하는 신체, 그리고 유동하는 정신. 바로 이 삼각 구도하에서 인간의 삶이 전개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 균형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삶의 혼란과 붕괴를 그려낸다. 유동하는 정신이 점점 고여가는 과정을 분위기 그대로 현시하면서. 건조하게 그리고 아주 권태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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