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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말 새로운 기운으로 꿈틀꿈틀하던 맨체스터 음악씬을 되짚고있는 <24시간 파티피플>의 주인공은 그라나다 TV의 쇼프로그램 진행자이자 한눈에 '되는 물건'을 가려낼줄 알았던 영민했으며 능글맞았던, 훗날 팩토리 레코드사의 사장이되는 제작자 토니 윌슨이다. 영화에는 해피 먼데이스와 함께 당시 그가 픽업했던 주요 뮤지션중 하나였던 조이디비전이 한꼭지를 차지하고있는데 보컬리스트 이언 커티스를 왠지 태어날때부터 예술가였을것만같은 인물로 그리고있다. 그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유니크한 무대매너를 가지고있고 말수가 적으며 자신의 속내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않은채 혼자 고뇌하는. 따라서 그의 자살에 대해 영화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않고있다. 그리고 커티스 사후 27년이 지난 지금, 조이디비전의 데뷔초부터 그들의 뮤직비디오와 스틸을 찍었던 안톤 코빈이 직접 무대 안밖에서의 커티스의 삶을 그려냈다. 그것도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로.(따라서 <24시간 파티피플>과 반대로 이번에는 커티스가 주연, 토니 윌슨이 조연이다.)

이안 커티스의 부인이었던 데보라 커티스가 쓴 책을 토대로 각색한 시나리오는 조이 디비전의 탄생보다 이안 커티스의 개인사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그 결과 뜨거운 음악영화라기보다는 차분히 가라앉은 멜로드라마로 완성됐다. 발화점은 없고 냉각기만 뒤에서 조용히 돌아가는. 밴드의 탄생과 그들의 성장사도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만(영화에 따르면 피터 훅과 버나드 섬너가 이미 밴드를 갖춰놓은 상태에서 커티스가 보컬리스트로 나중에 합세하고있다.) 그보다는 뮤지션이기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한때나마 직장도 가졌었던 커티스의 개인사를 조명하고있는 것이다. 귀기어린 스테이지 매너와 곧바로 이어지는 발작이 상징하는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보다 부인인 데비와 연인이었던 아닉 사이에서 꼼짝하지못한채 갇혀버린 남성으로서의 모습이 그의 진정한 실존이었노라고, 음악적 고뇌보다는 좀체 출구를 찾지못했던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야말로 자살의 실제 원인이었을지모른다고 영화는 말하고있다. 불완전한 육신과 나약하고 유리같은 정신을 가진 고뇌하는 뮤지션이기 이전에 두 여자사이에서 꼼짝하지못하는 멜로드라마의 남자주인공으로 그리고있으니 커티스를 커트 코베인과 동일시하며 더 거대한 무엇을 기대했을 팬들로서는 적지않은 충격일듯하다.

<컨트롤>은 대중에게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는, 게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여지곤하는 요절한 스타의 삶에 드리워진 아우라를 확실하게 벗겨내는 작업이긴하다. 이는 스타에게 곧잘 행해지는 '사후 교정' 차원의 재조명으로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실존인물의 전기를 대할 때의 경계사항 하나를 다시금 재확인하게한다. 이제는 더이상 어떠한 개입이나 수정이나 가감도 불가능한 굳건한 바위같은 사물에 대한 뒷날의 호사가들의 부지런한 입놀림 말이다. 이 영화가 커티스의 죽음의 실체에 과연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있을까. 그와 살을 맞대고 살았던 가장 가까운 이의 기록은 마냥 공평무사하기만할까. 너무 닳고닳은 뻔한 말이지만 한 인간의 삶의 총체에 다가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할 뿐이며 이 영화에서 관객이 보는 것도 그저 편향된 하나의 관점일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그 내용의 불편함에 대한 관객의 과민반응 또한 불필요하다. <라스트 데이즈>처럼 창작자의 자의식이 투철하게 반영되어 전기로부터 영감만 받은(그래서 흔적만 남은) 전혀 새로운 창작물에 비한다면 <컨트롤>이 견지하는 태도는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타협적이며 동시에 절충된 합당한 균형점이라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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