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마지막으로 비디오를 본게 3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녹화해뒀던 nhk다큐멘터리였는데 돌려보기도 불편하고 일단 화질에 적응이 어려웠다. 요 몇년간 어떤 영상물이건 쨍쨍한 화질의 dvd나 파일로 보느라 비디오 전원은 커녕 먼지도 한번 제대로 안 닦아줬으니 헤드가 정상일리 만무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구겨진 종이같은 화질에 꽉 눌린 음질은 감상이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분명 몇년전까지는 그래도 좋다고 본건데. 무릇 세상은 이렇게 바뀌었건만 그래도 이런 세상의 속도에 전혀 발맞추려는 생각이 없는 슬로우족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뉴저지 어느 쇠락한 동네 구석에 처박혀있는 비디오가게 <be kind rewind>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가내수공업적 특수효과의 장인 미셸 공드리는 전작 <수면의 과학>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일가를 이룬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방식을 아예 영화의 내러티브와 찰싹 붙여놓음으로써 전면에 내세운다. 철거가 예정되어있는 가게 주인 플레처씨가 '팻츠 월러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여하느라 유일한 직원 마이크에게 가게를 맡긴 사이, '우발적 사고'로 온 몸에 자기를 띠게된 제리가 들어오는바람에 가게의 모든 비디오테입이 일시에 공테이프가 되어버린다. 손님을 잃지않으려는 마이크와 제리는 궁리끝에 기존의 영화들을 아예 자신들만의 방식, 일명 '스웨덴식'으로 하나하나 vhs카메라로 리메이크하기시작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공드리는 하드보드지, 색지, 호일 등의 온갖 종이와 고철덩어리, 조악한 분장과 부족하거나 과해보이는 의상들을 긁어모아 싼티나고 후줄근하면서도 왠지모르게 쿨해보이는 저예산b급의 첨단 특수효과를 통해 <고스트 버스터즈>나 <로보캅>부터 <맨인블랙>, <러시 아워2>같은 8,90년대 블록버스터,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부터 <부기 나이츠>같은 작가주의 영화까지 자신만의 눈으로 종횡무진 영화사를 새로 써나간다.(그 중엔 유일하게 다큐<우리가 왕이었을때>도 있다.)

원작 영화를 어떻게 새로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촬영과정의 소소한 재미도 즐겁지만 미셸 공드리는 이러한 작업방식이 상징하는 어떤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있는듯 보인다. 영화 속에서 제리는 "모두들 이 동네를 떠나고싶어한다."고 외치고(물론 본인은 절대 떠나지못한다.) 가게는 곧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젠 아무도 vhs테입으로 영화를 보지않고 그 대신 dvd를 취급하는 인근의 대형프랜차이즈 스토어를 찾는다. 팻츠 월러를 추모하는 모임에서 플레처의 친구들은 미국에서는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며 그에게 돈되는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설파하는한편 뉴욕사람까지 찾아올정도로 인기끌던 마이크와 제리의 20분짜리 '스웨덴'식 영화들은 저작권침해위반으로 일말의 여지도없이 폐기처분된다. 이렇듯 영화는 빠르고 좋은 것보다 느리고 불편하며 낡은 것의 우월함과 로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마치 슘페터처럼)"작고 낡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설의 진리를 설파한다.

2.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가 뭐였는지, 누구와 같이 봤는지 좀체 기억이 나지않는다. 고민할 것도 없이 가족과 함께였겠지만 하여간 최초의 기억은 없어도 등교하듯이 영화를 열심히 봤던 기억은 난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강남에도 재개봉관들이 몇개 있었고 거기서 일주일에 두번 꼴로 별의 별 영화를 다 봤었다. 지옥의 묵시록, 인디아나 존스, 로보캅같은 걸작부터 실베스터 스탤론의 코브라나 척 노리스 영화, 폴리스 아카데미, 그리고 우뢰매까지 모두 재개봉관에서 봤다. 뿐만아니다. 공중파에서는 주말 밤마다 동서고금의 걸작을 틀어줬고 시작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광고 숫자를 하나하나 세면서 봤었다. 지금은 정확한 내용은 커녕 장면하나도 제대로 기억나지않지만 분명한건 그때 봤던  모든 영화들은 아직 예술이 아니라 놀이였다는 것,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전부 교과서였으며 주인공들은 롤모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험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면 며칠동안은 주인공의 걸음걸이나 말투부터 의상과 소품도 어디선가 구하고 심지어는 위험천만한 '스턴트'도 와이어줄 하나없이 감행하지않나.(일명 슈퍼맨 놀이) 아직은 걸작과 졸작을 구분하지않았으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던 시절. <be kind rewind>는 바로 그 시절의 흥분, 예술이 아닌 유희로서의 영화가 불러오는 흥분의 감정을 소환하다. 어릴 때처럼 의상과 소품을 직접 만들어 자기만의 영화를 만드는 짓 따위를 정상인 어른이 할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셸 공드리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웃자란 키덜트 몽상가들이었고 우리 모두 한때는 저러했다. 열렬히 영화를 봤고 영화가 곧 세상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커가면서 세상은 영화가 아님을 알게되고 점차 영화와 현실의 경계선을 그으면서 자신만의 기준을 갖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현실이라는 내성을 키워간다.(그리고 대개 그 과정을 사람들은 성장이라고 부른다.)그리고 그즈음부터 영화는 이제 예술로 분류되면서 엄지를 올리느냐 마느냐의 이진법, 혹은 별네개를 가지고하는 사진법 등을 이용한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심미안을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엄연한 하나의 텍스트로 거듭난다. 그러니 지금은 그 어디서도 어릴적 몽상가들을 찾을 수가 없을 밖에. 영화를 보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 하지만 아이였을 적 영화를 봤던 기억은 마치 유전자나 감기바이러스처럼 몸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있다가 한번의 작은 자극만 주어지면 불현듯 활성화된다. 못믿겠다면 이 영화속 "스웨덴"식 영화들을 보면 된다. 도서관에서 <고스트 버스터즈>를, 폐차장에서 <맨 인 블랙>을 다시 찍는 마이크와 제리를 보고있으면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한때는 성룡이었고 주윤발이었던, 또 슈퍼맨과 터미네이터였던 나와 당신이 그 안에 있다.

3.할리웃의 일급 작가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였던 <이터널 선샤인>과 <휴먼 네이처>, 그리고 본인의 자작 시나리오로 만든 이후 두편의 차이는 작은 듯하면서 크고 큰 것 같으면서도 다소 미묘하다. 두사람 모두 철저히 독자적으로 작업하는 나홀로  예술가 타입이긴한데 카우프만 없는 공드리는 더 폐쇄적이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왠만해서는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보이는 몽상가들의 낙원이자 오밀조밀한 마이크로 코스모스 공드리 월드는 장편영화로서는 다소 지루하고 늘어진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있긴하지만 그래도 그 독보적인 상상력때문에 또 다시 기대하게한다.(그래서 그의 이전 뮤직비디오 작업이 더 좋았던건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도쿄>가, 그리고 현재는 (imdb)에 따르면 <시공간의 주인>이라는 차기작을 준비하고있다고한다.  <그린 호넷>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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