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세끼 밥을 먹듯이 영화를 보던 시절이 불과 얼마전까지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충만하게하고 삶에 찌든 육신을 치유한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는 역시 다섯손가락, 그나마 정말 너그럽게 품어안았을때 열손가락을 빌려도 한두 자리는 남는다. 그나마 최근 2년동안 dvd나 파일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본 영화만으로 한정하자면 말년휴가 나오자마자 봤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그전 같은해 봄에 2박3일짜리 외박나와서 봤던 <굿나잇앤굿럭> 그리고 작년에 세시간짜리 공강을 이용해서 봤던 <원스>정도. 지극히 대중적이면서도 살짝 비껴가있는듯한 취향인데 여기에 한편의 목록이 추가되었으니 바로 지난주 개봉하자마자 봄비를 맞으며 학교근처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부리나케 메가박스로 달려가서 본 <데어윌비블러드>다. 영화를 본지 수일이 지났건만 여지껏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기가 어려운 것은 감상이 사방으로 곁가지로 뻗어나가 그것을 한줄기로 잡아채어 추스리기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애초에 나의 빈약한 언어로는 턱에도 미치지못하기때문이다. 플레인뷰가 마지막 대사인 "i', m finished"를 내뱉고나서 다시 영화제목이 타이틀로 올라오면 화면에서 뻗어나온 기운이 나를 사정없이 밀어붙이는듯한 느낌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좀체 쉽지않았다. 원래부터 내가 알트만-앤더슨 스타일에 무한애정을 갖고있다는건 이런 경우에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필요한 형식적 수사이고 잰체일뿐이다. 알트만 영화 하나도 모르고 앤더슨 영화 하나도 안 본 사람이라도 이 영화가 최근 나온 그 어떤 미국영화보다 독보적인 개성을 가지고있음을, 플레인뷰가 영화의 맨처음 열심히 삽질하던 그 탄광처럼 영화가 뿜어내는 어둡고 음험한 기운의 존재를 인정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자본주의의 흥망성쇠나 개발사를 다루는 역사 다큐도 아니고 최근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는 풍자극도 아니다. 아니 차라리 그 모두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그저 인간, 자본가이기도하고 인간혐오자이기도하지만 그 이전에 그냥 유일무이한 한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보고서가 가장 온당한 분류가 아닐까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자꾸만 대놓고 영화사의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들어앉으려고할때다. 해질무렵 힘차게 불타오르는 유정 뒤로 웃고있는 플레인뷰와 해밀턴의 검은 실루엣을 볼때, 화재를 진압하려 수십명의 남자들이 손에 하나씩 뭔가를 쥐고 달려나올때, 일라이의 대범하기만한 종교사기극을 볼때, 그리고 거짓 신앙을 고백하는 플레인뷰의 가증스런 얼굴을 볼때, 그리고 그렇게 결탁과 반목을 거듭하던 두 인물이 급기야 정면 충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쾌감은 분명히 옛날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의 연속이다. 놀랍게도 영화는 그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뒤로갈수록 점점 더 팽팽해지고 세지면서 질량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듯 누적된 힘에 관객은 압도되고 짓눌리게 되는데 이 모든게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한번에 폭발하기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마지막 씨퀀스는 고도로 양식화되고 계산되어있음이 역력하게 보이는데(사실, 말을 바로하자면 이 영화의 전부 어디하나 빼놓지않고 다 그렇지만)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하다. 사각의 프레임안에 3차원적 입체라기보다는 2차원적 평면 느낌이 강한, 그러니까 정물화나 스틸사진을 보는 듯한 두 대의 볼링 레인과 기계가 정면으로 놓여있는 방을 무대로 벌어지는 두사람의 격돌은 심히 과장되어있지만 그만큼 정교한데 마치 한창때의 스탠리 큐브릭 영화들을 보는듯했다. (구부정한 폼으로 달려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었다.)

마지막 대결에 이르면 이 영화의 비유는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까워진다. 자본주의는 자본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었기에 과거 종교의 힘을 빌렸으나 어느 시점에 오면 서로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된 결탁과 반목은 곧 파국을 맞이하리란 부정적 전망. (여기서 지금의 현실을 대입하고 적용하는건 관객의 몫?)하지만 이렇듯 추상적인 차원의 은유로만 영화를 보기엔 플레인뷰라는 인간의 크기가 너무 거대하다. 그는 자본가라서 나쁜 게 아니고 두번의 살인을 저질렀다고해서 악한 것도 아니다. 그는 단한번도 죄책감을 보이지않고 자신의 행위에대해 스스로에게 되물은 적 없고 따라서 반성도 하지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확신이 있으니까. 플레인뷰라는 인물의 캐릭터스터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하지않는 인간, 확신하는 인간의 강직함, 그 바위같은 단단함 그 자체가 여기서는 핵심이 아닐까. 앤더슨은 반성하지않는 독단적 인간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오류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충분히 그러고도남을, 아니 차라리 그럴 수 밖에없는 그럴만한 인물, 그래서 범인들로부터는 멀찍이 떨어져나올 수밖에 없는 단독자의 내면을 차근차근 한삽한삽 채광꾼처럼 파고들어가고있는 것이다.

컴퓨터나 와이드TV로 영화를 보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대개 그 말들은 산업적 보호같은 당위의 차원이나 큰 화면이 주는 감동같은 뻔한 관습적 어구에서 크게 벗어나지못한다. 큰 화면이 주는 감동에 대해 조금 말을 보태어보자면 그건 어두운데서 한참을 훔쳐보다가 들켰을때의 당황스러움 내지 창피함과 비슷하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나오면 빛에 눈이 적응하는 시간보다 내 몸과 마음이 적응하는 시간이 더 길게마련인데 그건 영화가 어두운 극장 내부를 휘저으면서 관객인 내 마음까지 지배해버리기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영화들은 그 강도가 더 세기 마련인데 회의하지않는 확신에 찬 집요한 플레인뷰같은 인물에 한참을 푹 빠져 그 어두운 기운에 침잠되면 극장 밖으로 나와 다시 세상에 적응하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분을 맛보기위해서라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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