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를 전혀 좋아하지않지만 이 영화만은 예외다.(사실 90년대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아예 관심밖이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벤더스 영화. 꽉짜인 플롯이나 대사보다는 로비 뮐러의 유려한 촬영과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침묵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있는데 무엇보다 이 영화를 좋아하게된건 영화속 도시들 때문이다.

여기서 빔 벤더스는 아직 출간도 되지않은 상태였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카우보이 모자를 씌워 리플리가 유럽의 미국인임을 표나게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이 잘 알고있는 도시들의 낯선 풍경을 제시하고있다. 그에게 공간이란 곧 도시이고 시간은 언제나 현재일뿐이다. 파리, 함부르그, 뉴욕이라는 코스모폴리스를 무대로 (실제 그곳이 어디이든 도시라고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각 도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건축물이 보이지만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이 영화속 파리는 아이보리색 저층 건물들이 아니라 고층 빌딩이 올라가는 회색빛 도시이고 함부르그는 허허벌판에 바닷바람이 부는 항구이며 그 도시들의 내부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인적이 없는 지하철 역과 익명의 사람들이 부딪히는 기차 그리고 녹색 조명의 당구대와 빨간 하늘을 뒤로한 술집이 있는 스릴러의 공간적 배경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세상은 점차 구체적 지명이 사라지고 거대한 하나의 도시가, 검푸른 하늘 아래 축축한 회색빛의 인간미없는 차가운 도시로 재편된다. 그래서 에펠탑이 보여도 넓은 하늘 아래 홀로 우뚝 선 에펠탑이 아니라 고층건물과 나란히 선 에펠탑, 리플리의 걸음 위로 아무런 관련없이 불쑥 등장하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 항구의 부산한 풍경과 입김이 나오는 차가운 공기와 젖은 아스팔트의 함부르그가 보인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이 차가운 도시들을 넘나들면서 점점 악당이 되어간다.

로케이션의 효율적 운용과 적색 및 녹색을 활용한 조명을 통해 영화는 위의 세 도시를 비정한 스릴러 무대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하고있다. <도시의 앨리스>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보듯 필모그래피 내내 빔 벤더스는 도시와 도시의 풍경들을 재해석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작가이고 이 영화는 그중에서 가장 개성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