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호청은, 진부한 표현이긴하나 언제나 참신하고 새롭고 재기발랄했다. 그게 그가 홍콩 밖에서 주목받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love in the buff는 예외다. 그의 필모중 지금까지는 가장 태작이 아닌가싶다. (난 4+1프로젝트를 제외한 그의 모든 장편 영화를 다 보았다.)이렇게 뻔한 로맨틱코미디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이게 다 대륙과의 공동작업때문에 벌어진 사단이라고 하면 그냥 편견일뿐일까. 하지만 이 의심에는 근거가 없지않다. 도대체 이럴거면 뭐하러 베이징에 갔냐고? 베이징이 아닌 어디였어도, 그냥 홍콩이었어도 아무 상관없는,지리적 특징이 하나도 드러나지않는 플롯. 심지어 두명의 본토출신 서브주인공들은 철저하게 도구적으로 기능하다가 쿨하게 두 메인주인공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않고 사라져버린다.

지리적으로 확장됐지만 하나도 실속이 없는 그 공간적 배경과 마찬가지로 컴팩트했던 전작의 각본도 그 컴팩트함에서 비롯했던 장점이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우선 단 몇일동안의 이야기를 몇개의 시퀀스로 나눴던 그 플롯 구성이 없어졌다. 비록 이번에도 몇월 몇일이고 두사람이 처음 만난지 몇일째인지 표기는 되지만 꽤 장기간의 이야기이고 (첫만남 후 사백몇일이라고 나오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표기되지않는 날들의 에피소드들이 더 많다. 전작에서 꽤 중요하게 쓰였던 그 뜬금없는 맥거핀 성격의 호러에피소드가 이번에도 영화의 인트로로 쓰이지만 전작과 달리 중간에 그것이 다시 쓰이지는않는다. 맨끝에 그냥 끼워맞추기 구색용으로만 나올뿐 스토리텔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건 전작에서 여주인공 춘교의 마음을 돌리게했던 그 깜찍한 반전의 역할을 이번 속편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분장쇼로 대신하고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뭐냐구.

하지만 이런 각각의 구성 요소간의 비교를 떠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영화 자체가 코믹하지않다는 것이다. 전작에서 볼 수 있었던 쉴새없이 치고받는 스크루볼 코미디식 대사와 계속 이어지는 코믹한 상황들이 전부 사라졌는데 이건 광동어만을 쓸 수 없는 조건도 한몫했을텐데 (전작의 시작부에서의 그 시끌벅적한 수다를 떠올려보라)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거의 뒤의 한시간 정도는 영화속 대사에도 나오듯 똑같은 상황의 연속이다. 어차피 답안나오는 문제에 대한 지리한 반복.(보면 무슨 말인지안다)

4+1프로젝트를 하면서 프로젝트의 일원이자 팡호청의 제자인 증국상은 중국본토에서의 협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않아서 앞으로는 계속 홍콩에서만 작업하겠다고 밝혔는데 (현재 그는 80년대초 홍콩에서 살해당한 스코틀랜드 출신 게이 경관이라는 흥미진진한 실화를 영화화하고있다.) 이건 팡호청 역시 마찬가지지않았을까라는 짐작을 해본다. 그래서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love in the buff와 동시에 공개한 vulgaria에 흥미가 간다. 세상에, 떠나는 여자를 붙잡으려 뛰어가는 남자라는 이 진부한 클리셰를 팡호청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실내금연이 상식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이제 흡연자들은 그렇게 건물 밖으로 아니 세상 밖으로 불가피하게 밀려나온다. 쾌적한 건물 안으로부터 시끄럽고 번잡한 거리로, 그건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치 현대 문명의 '바깥'에 처한 미개인의 처지로 몰린 흡연자에 대한 은유를 떠올릴 수 밖에 없게한다. 너희 흡연자들은 당연히 이 '문명'안에 있어선 안돼. 너희들은 현대의 미개인이니까. 흡연을 위해 밖으로 나올때마다 이런 종류의 이물감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랄까. 하는 일도 다르고 그전에는 서로 전혀 알지못하던 낯선 타인들이 흡연을 위해 한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들고 안면을 트고 잡담을 나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지명과 춘교도 그렇게 만난다. 이 영화는 불같은 연애의 한복판도, 지리한 권태도, 장황하거나 아니면 감상적이기 짝이 없는 이별도 아닌 연애의 시작점을 다룬다. 지명보다 연상인 춘교에겐 이미 5년째 같이 살고있는 애인이 있다. 이십대 시절에 숱하게 거쳤을 밀고당기기의 필요를 느끼지못하는 그녀는 보다 직접적이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관계의 이니셔티브를 선취한다. 서로의 담배불을 붙여주는 사이로 시작해 두사람은 담배를 매개로 관계를 확장해나가고 조금씩 천천히 연인으로서의 관계 전환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면! )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던 생각은 이런 거였다. 같은 기호를 공유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 이상의 새로운 관계의 진전이 진정 가능한걸까? 그건 충분조건이 되는걸까? 그럼 같은 기호를 공유한다는건 도대체 뭘 의미하는걸까? 영화는 두사람을 포함해 주변의 인물들, 그러니까 다른 흡연 친구들이나 전 애인의 인터뷰를 중간중간 보여주는데 거기서 그들은 한결같이 내내 사랑의 불능성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려고하는 지명과 춘교 두사람 사이의 본래 스토리와는 정반대로 어긋나며 이탈하고있는 이 가짜 인터뷰들이야말로 팡호청이 진짜 하고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영화 말미 이제 두사람은 금연을 다짐하기에 이른다. 두사람을 만나게했던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했던 공통의 기호가 사라진 바로 이 시점에서 이들의 사랑은 진짜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두사람을 매개해왔던 바로 그것이 사라진 지금, 두 사람의 연애는 어떻게 될까?

 


<일개자두적탄생>

세계가 주목하는 몇안되는 (한때는 유일했던) 홍콩의 영화작가 두기봉의 밀키웨이 이미지의 97년도 창립작품. 별볼일없는 홍콩의 건달들은 본토와 대만 둘 중 한곳으로 건너가 한탕할 계획을 세우고 영화는 그들의 두가지 선택을 모두 보여준다. 홍콩판 인생극장? (우연인지몰라도 비슷한 시기 기네스 팰트로의 <슬라이딩 도어즈>도 있었다.) 홍콩 반환시점인 97년에 만들어진, 홍콩에서 상상하는 중국과 대만에 대한 나른한 백일몽. 이건 홍콩 탈출에 대한 강박일까 아니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도저한 패배주의의 무의식적 표출일까? 두기봉과 위가휘의 밀키웨이 이미지는 그렇게 시작부터 징후적이었다.

 

<공주복수기>

설렁설렁 만든 것 같아도 그 안에 온갖 상징과 장치들이 해석을 기다리고있는 것이 바로 팡호청 영화의 특징이고 이 작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옛날 여자친구와 현재 여자친구가 의기투합해 한 남자에게 복수를 시도한다. 과연 여성간의 연대는 가능한 것일까? 인터넷에 누드사진이 올라 직장까지 잃은 영화 속 종흔동의 캐릭터가 몇년 뒤 그대로 그녀의 실제 현실이 됨으로써 이 영화의 다층성은 더 복잡해졌다.

 

<사대천왕>

미남배우 오언조의 무려 감독데뷔작. <스파이널탭>의 홍콩버전. 전부 서른줄을 넘긴 오언조와 그의 친구들은 뒤늦게 보이밴드를 결성해 데뷔한다. 홍콩쇼비즈니스 업계의 이면을 까발림과 동시에 연예인들의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노출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의도는 어느 것 하나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신인 감독으로서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공식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그럭저럭 활용하고있다. 장학우, 양천화, 사정봉 등의 인터뷰 내용을 어디까지 사실로 볼 것이냐에 따라 영화의 스토리텔링과 영화 바깥의 사실간의 상호작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종무염>

밀키웨이 이후 두기봉의 필모에 대한 내 식대로의 평가는 이렇다. 최고 걸작은 단연 <흑사회>연작이고 가장 급진적이고 괴이한 작품은 무려 시체가 총을 쏘는 <진심영웅>이고 가장 돌발적인건 제목처럼 <비상돌연>이고 (영어제목이 expect the unexpected), 가장 폼을 많이 잡은건 <방축>이고 가장 실망스러웠던건 <복수>, 그리고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는 단연 <문작>이다. 그러나 가장 웃긴 두기봉 영화는 바로 <종무염>이다. 난 이 영화에서의 매염방만큼 익살맞은 여배우의 연기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영화로선 파격적일만큼 긴 러닝타임을 갖고있지만 (무려 120분을 상회한다.) 매염방과 장백지 정수문 세 여배우와 임설 등 조연들의 연기는 홍콩식 앙상블 연기의 어떤 경지를 시전한다.

 

호텔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그의 모습은 흡사 첩보원을 방불케한다. 엘레베이터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다른 층수를 누르고 본인이 내리기 전에는 그 위의 층 버튼을 누르는걸 잊지않는다. 혹여나 누구와도 시선을 부딪치지않으려 조심조심 그렇게 그는 콜걸이 기다리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일이 끝난 후 옷을 입고 떠나려는 그에게 갑자기 그녀가 도와달라고한다. 살짝 당황하던 그는 그 내용인즉슨 본토에서 와 광동어를 잘 알아듣지못하는 탓에 대신 휴대폰 심카드 충전을 도와달라는 부탁임을 알고는 안도한다. "난 또 당신을 구해달라는 말인 줄 알았잖아요" 요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는 자책과 함께 웃어넘기며 그는 그녀의 핸드폰을 손에 든다. 몇번의 입력실수가 이어지고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무미건조하기 짝이없던 섹스보다 오히려 이 짧은 찰나의 순간 두사람은 진정으로 가까워진듯 보인다. 그렇게 충전이 끝나고 그는 호텔방을 빠져나온다. 늘 일(?)을 해야하는 탓에 한번도 제대로 홍콩구경 한번 해보지못하고 초저녁 잠시 시간이 나면 늘 가곤했다는 호텔건너편 국수집에 그도 들러 고기국수를 사먹는다. 그는 어쩌면 그녀를, 그녀의 말을 떠올렸던 것일까.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정말로 자신의 지금 처지에서 빠져나오게 해달라고 말하고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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