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첫장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숨은 이면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하수시설이 정비되지않은 도시는 온갖 악취가 범벅된 불결함 자체였다. 그 악취가 퍼지는 시장 한귀퉁이에서 태어난 그루누이에겐 정작 체취가 없었으니 곧 그는 유령인 셈이다.(그러니 뒤에서 다가가도 모를 수 밖에) 텅빈 내면을 가진, 차라리 내면이 없다고해야할 사내의 그 텅빈자리엔 '결정의 에센스'를 만들겠다는 집요한 욕망하나만이 자리하고있다.

영화에서도 꽤 정성들여 묘사된 옥닥복닥한 18세기 파리 시내의 정경도 인상적이지만 이 소설의 초점은 그렇게 모양새를 갖추어가던 근대의 형성에, 그리고 그와 함께 동반 출현하기시작한 전문가의 존재에 있다. 분명 정상은 아닌듯한 행동의 연속에, 도저히 이뻐할래야 이뻐할 구석하나없는 기괴하기만한 그루누이는 오로지 자신의 기술로만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전문가의 극단을 보여주기위해 설정되어있다. 세상은 갈수록 분업화 전문화되고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쏟아부어 얻어낸 기술로 인정을 받아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전문가의 존재는 근대의 특징이자 진정한 개인의 등장이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자기 기술의 독창성을 위해서라면 못할게 무엇이며 그걸 막는다고 두려우랴? 따라서 영화말미 자신이 만든 '최후의 향수'의 성능을 확인한 그루누이로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애초에 그의 안중에 부나 권력이 들어앉았을리가 없잖아.

사실 이 소설을 읽고난 후 왜 쥐스킨트는 이 소설 이후 이만큼 두툼한 소설을 쓰지못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이었던 <좀머씨 이야기>의 책 날개에는 작가가 철저히 은둔중이라고 써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향수>를 읽고나자 결국 이 소설은 쥐스킨트가 자기 얘기를 한 것임을 알았고 앞의 질문에 대한 해답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쥐스킨트는 속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철저한 단독자이고싶었던거다. 소설이라는 자신의 직능과 직무로만 존재하고 그 외에는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혼자이고픈 소설가와 궁극의 향기를 얻으려했던 그루누이는 쌍둥이다. 시정잡사와 얽히지않은채 물끄러미 뒤에 숨어있다 세상에 툭하니 책한권을 던져놓고는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대하는지 훔쳐보며 즐거워하는 소설가와 자기가 만든 향수에 미쳐버린 인간들을 바라보며 웃음짓는 향수제조자는 과연 다른가? 그렇다면 그처럼 결국 자기 얘기를 모두 털어놓은 작가가 더이상 무슨 다른 하고픈 말이 있을 수 없지. 그렇다면 첫출간 20년후 영화가 나온 지금 쥐스킨트는 어떤 표정을 짓고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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