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왕국에서 지도술은 너무도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한 도의 지도는 한 시 전체를 감고있었고, 한 왕국의 지도는 한 도 전체를 담고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대한 지도들조차 만족감을 주지못했고, 지도학교들은 왕국과 똑같은 크기에 완전히 왕국과 일치하는 왕국지도 하나를 만들었다." -보르헤스, <과학에 대한 열정> 중에서.

1.거칠게 말해서 영화의 중심 아이디어는 보르헤스의 위 우화 그대로다. 그러나 영화 전체는 보르헤스의 저 단장 못지않게 판타스틱하며,초현실적인게 아니라 초현실 자체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는 하나도 현실적인게 없다. 단 한부분도. 케이든의 연극은 현실을 흉내내려고하는데 정작 그 현실은 이미 초현실인 것이다.(한 인터뷰에서 카우프만은 사만다 모튼이 살고있는 불타는 집에 대해서 "꿈에선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왜냐고 묻지않지요."라고 대답함으로써 말그대로 꿈같은 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애초부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있다.)

가족으로부터 내쳐지고 점점 극도로 고립되어가는 케이든은 자신이 연출하는 연극에서마저 자신의 지금 처지를 개선하기는커녕 똑같이 재현하려하고있으니 연극은 애초부터 성공적으로 개막할리 만무하다. 죽지않는 이상 인생에 끝이 없는데 어찌 그 현실을 모조리 제유(synecdoche)하는 연극에 끝이 있을 수 있는가. 요컨대 죽거나 세상이 종말을 맞아야만 비로소 연극은 끝난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기존에 알고지내던 가족이나 친구등의 가까운 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잦아지고 그 경험들은 누적되어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나간다. 삶과 죽음이라는 어려운 질문들은 한 개인의 반평생을 휘적휘적 따라가면서 현실에 밀착되어 점차 거대한 은유의 바퀴를 굴려나간다.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시간을 뒤로 한채 점점 외골수가 되어가는 케이든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연극에 매달리면서 현실의 시공간 밖으로 서서히 튕겨져나가지만 하나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연이어 떠나보내면서 뒤늦게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되고 그때마다 그의 인생은, 아니 이제는 그의 인생이 되어버린 그의 연극은 쉼없이 바뀌어간다.

2.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를 볼 때마다 이렇게도 영화가 되는구나하는 감탄을 하게된다. 국내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알린건 출세작 <존 말코비치 되기>보다는 <이터널 선샤인>일텐데 자신이 작가로서 겪는 정신적 고통과 딜레마 그 자체를 각본으로 써낸 <어댑테이션>을 나는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그 영화에서 로버트 맥키는 지금 할리우드에는 모큐멘터리를 제외하면 새로운 장르란 없으니 새로운걸 해 볼 생각말고 기존의 장르에 충실하라는 충고를 하는데 얄밉게도 남의 입을 빌어 그 대사를 쓴 카우프만 본인이야말로 그 이름 자체가 할리웃에서 하나의 독보적 브랜드를 이루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그간 찰리 카우프만이 언제나 남의 머리속을 궁금해하는(그러나 관객으로서는 그의 머리속이 궁금한) 영리한 작가(혹은 기인)로 알고있었고 그의 영리함을 부러워했는데 <이터널 선샤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감독 데뷔작을 보면서 그가 무척이나 따뜻한 페시미스트이자 온정적인 외톨이란 인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시넥도키 뉴욕>은 그간 그가 쓴 영화들중 가장 안쓰럽다. 이는 다시말해 이 영화가 그의 모든 작업중 논리보다, 아니 논리만큼 감성에 기대고있어서 무척 인간적이라는 말이기도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보다는 개인, 그중에서도 타인보다는 자신의 무능력과 불운, 비참함, 불우로부터 시작했음이 분명한 얘기만을 집요하게 되풀이해온 카우프만은 여기서 오십줄에 들어서면서 점점 빠르게 자신의 삶 내부로 육박해들어오는 죽음의 구체성에 관하여 (이전과 달리)블랙 유머를 배제한채 한없이 진지하게 풀어나가고있다.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들이 작게나마 슬며시 긍정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왔던데 비하면 이번 영화의 결말은 절망적이지는않지만 묵직하고 애닯다. 요컨대 나는 찰리 카우프만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슬퍼졌다. 

누가 찰리 카우프만 영화 아니랄까봐 이번에도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흉내내고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점점 불분명해진다. 그렇게 현실과 은유는 점차 서로 포개지고 뭉개지며 인물들은 서로를 흉내내다가 종내는 공존한다. 확대경을 쓰고 미세화를 그리는 아델과 체육관만한 크기의 창고에서 초대형 연극을 구상하는 케이든 부부는 이미 시작부터 대립적임을 암시한다. 클레어가 예술이 아닌 실제 세상의 구체성을, 상담가 매들린이 두 세계 사이의 혼돈을 상징한다면 불타는 집에 사는 헤이즐은 이 두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자신의 비참한 인생을 직접 이름붙인 '시뮬라크룸'안에서 기어이 완성하려는 케이든의 의지는 나로선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이 예술가의 승화 의지라면 예술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이리라. 게다가 현실과 현실의 대체물이 점차 교집합을 늘려가가던 끝에 완전히 포개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케이든의 고뇌와 야심을 카우프만과 연결짓지않기란 어렵다. 게다가 케이든이 만든 연극 세트장은 그 자체가 기실 영화 속 세트가 아니던가. 이쯤되면 직유든 은유든 환유든 제유든, 비유는 이미 비유가 아니다. 연극은 연극이 아니고 영화는 영화가 아니듯이. (아래 사진을 보면 내가 지금 무슨 횡설수설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으려나. 출처는 로저 이버트의 블로그.)



3.결국 인생이 뭔지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발설할 수 있는 자격은 시간의 지긋지긋함을 견뎌낸 이들에게 주어진 전리품. 화장실에서 한 주먹 가득 약을 입안으로 털어놓는 케이든과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는 새미의 모습은 근래 나온 영화들중 드물게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케이든은 자신의 인생을 남의 것 보듯 하게되면 뭔가 다른걸 얻으리라 생각했을까. 그 어떤 장광설의 언어로도 담지해내지못할 삶의 총체성은 그것을 통째로, 그 전체를 조감해야만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술이 삶과 분리되지말아야한다는 말들을 곧잘 하곤하지만 이는 쉽지도않을뿐더러 현대인에게 권장되는 태도도 아니다. 케이든은 세상엔 엑스트라란 없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야기를 가지고있다고했지만, 그러나 어쩌면 정말 인생은 몇백미터짜리 높이의 대형 세트장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작은 무대이고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흉내내는 배우인지도 모른다. 수십년간 연습을 하고도 한번도 관객들에게 선보이지못할 수도 있고 그렇게 숱한 연습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하지만 그냥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클라이맥스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다가 이유도 설명되지않은채 급작스레 퇴장함으로써 완성되는 그런 연극.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어떻게든 저혼자 알아서 흘러가는 그런 연극말이다.
 
덧.주요 남자배우로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톰 누난 두명만이 나오는데 비해 그들의 상대역으로 사만다 모튼, 캐서린 키너, 에밀리 왓슨, 다이언 위스트, 제니퍼 제이슨 리, 호프 데이비스 등 자그만치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여섯명의 연기파 여배우들이 나온다. 카우프만이 심어놓은 이 영화의 비밀은 이 여배우들이 맡은 각각의 캐릭터와 그들이 케이든과 맺는 관계의 실타래를 풀어나감으로써 밝혀질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