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는 2013년 7월에 출간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전 2010년 4월 쓰였고 2011년 출간된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 조선인의 초상>에 수록된 서경식 선생의 글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은 이 책에 대해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매우 효과적인 비판을 해내고있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의 전작인 <화해를 위해서>(2005)의 반론으로서 나온 3년 전의 글이 현재진행형의 논란을 겪는 중인 책에 대한 유효한 비판을 하고있다는건 곧 저자인 박유하가 8년이라는 세월을 두고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있다는 뜻이기도하다. 그리고 그 주장의 거개라는 것은 대개 서경식의 글이 밝히고있듯 일본의 자칭 리버럴리스트라고 하는 이들이 수년 전부터 하고있는 것, 즉 양립하기 쉽지않은 두가지 욕망을 모두 놓치고싶어하지않는 일본 리버럴의 언어적 곡예를 박유하라는 한국의 지식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로 번역해 설파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들을 인용하고 바로 이어 그로부터 3년 전에 나온 서경식의 글을 반론으로 붙여보겠다.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 처음부터 <제국의 위안부>를 겨냥한 글이 아닌지라 세세한 맥락은 정확하게 맞지않을 수 있지만 반론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있다는건 분명하다. 직접 두 글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반론이 될 만한 지점을 이보다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징병 자체는 국민으로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동원한 것이니, 일본 측에서 보자면 한때 '일본 국민'이었던 조선인에게 당시에 국민으로서 부과된 일은 공식적으로는 '보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또한 우리가 일본에게 강요당한 한일합방이, 조선인이 '일본국민'이 되겠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처럼, 합법처럼 되어버린데에 있다. <제국의 위안부> 231

...

서글픈 사실이지만 그 조약이 '양국합의'의 형태를 띠고있는 한 그 조약에 의거해 이루어진, '법적으로' '일본인'이 되어야했던 조선인으로서의 피해는 보상의 근거는 없다는 말이 된다. ... 당시의 합방이 양국의 조약 체결을 거친 것이었으니 '법적으로'는 유효했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 조약은 국민의 동의를 거치지않은 조약이었다. 그러니 그런 사태를 문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저 '합방조약 자체가 무효'라는 주장을 일본이나 당시에 식민지를 소유한 제국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 당시에 '식민지배'가 법적으로 금지되어있지않았던 이상 (역으로 강대국끼리의 양해가 '그들만의 법'의 세계였다.), 식민지배하에서 식민지 사람들에게 가한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피해는 '배상'받을 수 없다는 현실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232

 

박유하에 따르면, 당시의 법에 비추어보아 '옳다'는 조약은 가령 불평등 조약이어도 반대해서는 안되는듯하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이 과거의 대한제국이 강제당한 조약을 부정하거나 수정을 요구하는 것을 '책임의식의 결여'라고 하는 것이다.

... 박유하에게 책임있는 지식인이란, 예를 들면 아무리 반인권적이고 비인도적이어도 국가가 일단 맺은 조약에는 마지막까지 묵묵히 따르는 사람을 말하는듯하다. 이 정도로 국가권력을 기쁘게하고 식민지 지배자나 그 후계자들에게 환영받을만한 레토릭은 없을 것이다.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 조선인의 초상> 중에서 341

 

당시에는 식민지 지배를 법으로 금지하지않았다"와 같은 이유를 든다. ... 그러나 '당시의 법'이라는 것은 실은 당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있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피지배 민족의 주권을 이미 부정한 상태에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받은 쪽은 그와 같은 법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배제되어있었다. 325-326

 

 

(2)

하지만 '인신매매'와 연결시킨 이 운동은 '위안부'문제에서 결코 도외시 할 수 없는 '업자'문제를 은폐한 것이었다. ... 여전히 인신매매 자체에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인식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군 등이 업자를 '선정'했다 하더라도 모든 사례가 그렇지는 않았다. 게다가 동원이 '인신매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군이 알고도 지시한 것이 아닌 한 설사 방관했다 하더라도 그 묵인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강제연행'이나 '인신매매'의 주체를 '일본군'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255

 

좁은 의미의 전쟁 책임론이란 전시의 범죄행위가 법을 위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이런 좁은 의미의 '전쟁 책임'론의 틀만으로는 '위안부'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안부' 제도는 식민지 지배와 깊이 결합되어있는 성 노예 제도이고 그 진상규명에는 식민지 지배 그 자체의 책임을 묻는 관점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 이 문제를 전시의 범죄행위라는 좁은 틀 안에 가두어두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 '국민주의'에 근거해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려는 욕구가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안부'문제에 대해 많은 일본 국민들은 "포승으로 묶여 강제로 끌고갔는가"라는 말초적인 사실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그 강제성을 완벽히 입증할 수 없는 사례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이는 전쟁이나 식민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반성적 인식이 결여되어있기때문이다. 이같은 경향이 우파나 극우파에 의한 부정론이나 역사수정주의에 유리한 심리적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다. 325

(3)

일본은 '법적 의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않았지만 '도의적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이 편지에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한다. 또 그들이 '법적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사죄와 보상'을 하고싶지않아서가 아니라 1965년의 한일협정을 통해 '법적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4

 

국민이 지출하는 '위무금'은 '도의적 책임'의 범위로 해석되지만,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상금을 지출하면 이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때문이다. 여기서 '도의적'이라는 말은 법적 책임을 부인하기위한 레토릭으로 기능한다. 328

 

 

 

 

(4) 위안부의 가해자성에 대해서

전쟁터에서의 강간의 대상이 된 '적의 여자'와 위안부는 군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가족과 떨어져 전방에 나가있는 군인들을 '부인'처럼 신체적 정신적으로 위무하고 사기를 북돋는 역할, 그것이 위안부들의 원래 역할이었다. 57

 

' 조선인 위안부'는 그렇게 중국이나 인도네시아같은 점령지/전투지의 여성들과 구별되는 존재였다. ... 식민지가 된 조선과 대만의 위안부들은 어디까지나 '준일본인'으로서 제국의 일원이었고 군인들의 전쟁 수행을 돕는 관계였다. 그것이 '조선인 위안부'의 역할이었다. 60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67

 

그러나 피해기억만을 필요로 하는 한 "참 안됐"다고 말하는 연민의 기억은 잊혀질 수 밖에 없다. 73

 

그녀가 일본군을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불행한 '운'을 가진 '피해자'로 보면서 공감과 연민을 표할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 그런 동지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75

 

'조선인 위안부'란 그렇게 일본의 제국 확장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동원된 존재이기도했다. 80

 

포주들은 어린 소녀에게 강제로 성노동을 시키고 노동의 대가를 착취하는데에 그치지않고 대부분 가혹한 폭행으로 이들을 다스렸다. 86

 

말하자면 위안부들을 폭행하여 그녀들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는 군인들뿐 아니라 포주들이기도 했다. 88

 

이들이 중국인이나 인도네시아인을 부리고 심지어는 인도네시아인을 지휘해 위안소를 운영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조선의 위안부들이 식민지인이 되어 '본토 일본'의 하위 위치에 있게 되기는 했지만 그건 동시에 다른 아시아인들의 상위 위치에 서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 '조선인 위안부'들은 분명 피해자였지만, 그러면서도 '일본 제국' 안에서 '두번째 일본인'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90

 

조선인 위안부들이 현지인들에게는 '적'의 관계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 그건 그들이 일본의 점령지에 나가있었던 결과로 일본과 함께 현지에서 쫓겨 달아나야했던 '준일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위안부'가 중국에 있었던 위안부와도, 다른 동남아시아에 있었던 위안부와도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부분이기도하다. 98

 

이들이 '전쟁범인' 즉 전범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된 이유는 이들이 '일본군'과 함께 행동하며 '전쟁을 수행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설사 그들이 가혹한 성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라고해도 '제국의 일원'이었던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99

... 이런 과정에서 그녀들에게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많은 나쁜 측면이 드러났다고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상하지않다는 것은 그것이 '악'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틀림없이 '악'이지만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구조적인 '악'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그림을 보고 박유하의 설명을 읽은 뒤에도 내 마음에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고문 피해자인 네덜란드 변사에 대한 동정은 물론, 인간을 이렇게까지 만든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분이다. 따라서 적어도 내 경우에 한해서 말하자면 '위안부=피해자'라는 인식이 뿌리째 흔들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 그러나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설령 피해자에게 가해성이 침투해 있다고해도, 그것 때문에 그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운용한 자들이 가해책임을 상대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혹한지를 밝히고 더욱 깊이 이해하기위해서라도 이 같은 고찰이 필요한 것이다.

   박유하와 레비가 크게 다른 점은 레비는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자신의 내부를 파헤쳐 그곳에 침투해있는 미세한 가해성까지 도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박유하는 자신이 아니라 '위안부'라는 타자의 가해성을 폭로해보이고있다.

... 그러나 그 (박유하의) 고찰에서 끌어낼 결론은 일본군 '위안부'제도의 잔혹함과 책임의 중대함이지,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을 보강하는 것이 아닐 터이다. 361-364

 

 

(5)

'위안부'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싶다면 기지 문제를 해결해야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화해는 필요하다.314

 

박유하는 어떤 자격으로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일까? '위안부' 피해자, 강제연행된 노동자, 일제에 의한 탄압 피해자, 기타 피해자들이 일본에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고있다. 이들을 대표할 권리는 한국이라는 국가에도 없다. 한국이라는 국가에 이들의 요구를 대변할 역할이 부여된다면 이는 피해자와 그 뜻을 따르는 국민의 요구에 응하기위해서이고 그런 한에서만 한국이라는 국가가 이들을 대표할 수 있다.

... 박유하라는 인물이 마치 피해자 대표와 같이 '한국'이라는 주어를 사용해 관용과 화해를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 박유하라는 개인은 '우리=한국'이라는 주어를 모호하게 사용하지말고, 자신에게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지를 가차없이 자문하지않으면 안된다.

.... 하물며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고설을 펼 자격이 있을리가 없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굳이 고설을 펴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피해경험의 횡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349

 

'공감적 불안정'을 강조하는 박유하에게 그같은 입장에 대한 '공감적 불안정'을 한번이라도 실천할 것을 권하고싶다.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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