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전언은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다시금 곰곰이 되짚어보게한다. 그럼 지금 나와 당신의 관계는 그저 가까이 있기때문에 유지되는걸까. 질문을 바꿔보기. 그럼 나는 과연 진정으로 당신을 좋아하는걸까 아니면 매일 가까이 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좋아한다고 믿게된 것 뿐일까? 만약 한동안 떨어져있더라도, 그럼에도 계속 좋아하게될까?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그사람을 좋아하게된걸까? 이 질문들 앞에 영화의 여자주인공 펄도 쉽사리 대답하지못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때부터 다녔던 병원 의사를 찾아가 묻는다. 나는 일찍이 당신과 우리 엄마가 서로 사랑했다는걸 알고있었요. 그런데 언제부터였나요? 그는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가까이 곁에 있다고해서 타인을 제대로 알리는 만무하고 저마다 나름의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의심하고 험담한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되 심리적으로 경계하고, 또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거리만큼 혹은 그 이상 더 심정적으로 가까워지지못해서 애를 태우기도한다. 친밀함이란 그래서 복합적이다. 몸의 친밀과 마음의 친밀, 그 상이한 거리간의 긴장이 나와 당신의 관계를 정한다.

차안, 엘리베이터, 식당, 사무실등 대부분의 이야기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실내극의 형태를 띠고있지만 사실 유심히 살펴보면 그 좁디좁은, 영어제목처럼 '밀실공포증'(claustrophobia)를 일으키게하는 좁은 실내와 실외 공간이 인물간의 관계와 어떻게 연동하는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아마 현대 생활에서 가장 좁은 실내 공간일 차안에서 시작한다. 카풀하는 다섯명의 직원들의 퇴근길에서 시작해 모두 내리고 남녀주인공 둘만 남는 첫번째 장으로부터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몇개의 챕터를 보여준다. 맨마지막 장, 첫번째 장으로부터 1년전으로 돌아간 영화는 좁은 실내가 아닌 탁트인 회사의 옥상에서 끝을 맺는다. 가장 친밀한 사적 공간일 차 안에서 시작해 옥상이라는 전면 개방된 공적 공간에서 처음으로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여주며 끝나는 이야기.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운 차안에서 파국을 맞이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을 거슬러 마지막 옥상에서는 서로 안 지 얼마되지않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눌때 가장 친밀해보이는 역설적 순간으로 바뀐다.

실내에서는 어색하기만하다가 비로소 바깥으로 나왔을때 허물없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친밀의 역설적 성격은 손님과 승객으로 처음 알게된 택시기사와 펄의 두번째 만남에서도 다시금 확인된다. 반대로 사적 공간에서 늘 다투던 연인이 공적인 자리에서 타인들 앞에 애정을 과시하는 장면은 줄곧 tv와 영화에서 보아온 클리셰다. 또 숨겨왔던 애정 관계가 공적으로 밝혀진 이후에 감소하는 친밀감, 아니면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는 권태와 그 처방으로서의 전술적인 격리(separation)같은 뻔한 이야기들은 어떤가. 그렇다면 친밀함을 나와 당신 둘만의 온전한 심정적 거리를, 정념의 정도를 가리키는 지표라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지않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관계를 맺고있는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나 또다른 인간관계등 그들의 외부,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감정적 변곡선을 가리키는, 결코 단순히 두 개인 사이의 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않는 엄연한 사회(학)적 개념인 것이다. 구조와 개인 혹은 환경과 개인이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표상하는 한가지 유용한 개념으로서의 친밀함, 기든스나 벡같은 사회학자들이 친밀함의 구조적 변동같은 것에 그토록 천착했던 것도 이런 연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친밀'이라는 원제에 엉뚱해보이게도 밀실공포증이라는 영어제목을 붙인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었을지 모르겠다.

사족. 시간을 점점 거슬러 올라가는 챕터 구성은 <박하사탕>에서도 볼 수 있긴한데, 뒤늦게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적 있는 해롤드 핀터의 희곡 <배신>을 알게됐다. 영화버전을 보고나니 안서가 이 희곡에서 영향을 받은건 분명해보인다. 멜로드라마의 특성상 이러한 역순 구성은 파국과 이별에서 시작해 첫만남에서 끝이 나는 탓에 관계의 허망함, 피상성 그리고 인물들의 위선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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