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요동치는 밤, 오즈 영화를 찾아보곤한다. 주로 컬러 시절의 후기작 아홉 편. 60년대 컬러 필름의 질감, 또 그 안에 50미리 단렌즈로 담아낸 일본의 옛 풍경들, 그리고 오즈 영화 속 사려깊고 예의바른 사람들의 틀에 박힌 형식적인 대화들을 보고있으면 어느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오즈의 후기 컬러 영화들 중에도 <고하야가와의 가을>은 이색적이다. <부초>에 이어 나온 나카무라 칸지로라는 배우 때문이다. 출연한 두 편에서 이 배우는 오즈 영화에서는 보기드물게 속물적 면모를 전혀 숨기지않는, 누구도 좋아하기 힘든, 그래서 류치슈와 전혀 상반된 아버지 캐릭터를 연기한다. <부초>에서 부인 몰래 낳아 숨겨놓은 아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채 다가가는 유랑극단의 단장이었던 그는 이 영화에서도 식구들을 속이고 집 밖으로 나가 교토에 사는 정부와 딸을 만나는 노회한 가장을 연기한다.

 

나카무라가 이렇게 뻔뻔한 가부장으로 나오는 반면 이번에도 여성 캐릭터들은 다소곳하고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알고보면 결단력있고 주체적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막내딸의 이름은 노리코이곤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츠카사 요코가 노리코를 연기하고, <만춘>과 <동경 이야기>에서는 노리코였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극중에서도 계속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하라 세츠코는 고하야가와 집안에 시집을 왔으나 지금은 미망인이 된 아키코를 연기한다. 오즈가 이 영화 바로 전에 만든 전작인 <가을 햇살>에서 서로를 아끼는 모녀간으로 나왔던 두사람은 이번에는 사이좋은 시누이와 올케 간을 연기한다. 

 

이 영화는 변화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현재 있는 그대로 붙잡아두려는 부질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월은 흐르고 세대는 아래로 내려가며 이어진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오사카에서 유서깊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고하야가와 가문. 사위는 가업을 돕고있고 큰 딸이 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집안을 유지하고있는데 막내딸인 노리코는 창너머로 오사카 성이 보이는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그리고 그녀의 올케이자 고하야가와가의 며느리인 아키코는 세련된 갤러리에서 일을 하고있다.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 아버지를 비롯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은 여전히 막내 딸의 결혼과 과부가 된 며느리의 재혼 등 여성들의 삶을 자신들의 손으로 결정짓기위해 온 관심을 쏟으며 이런저런 품을 팔지만 결국 그녀들은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로 서로 다짐한다. 이미 세상은 나이든 남자들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변하고 있어서 교토에 숨겨놓은 딸(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않은)은 지금 동시에 두 명의 서양남자와 자유연애를 하고있고 방금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도 하지만 바로 이어 성호를 긋는다.

 

한 집안의 가장이 죽으면 어쩔 수 없이 남은 가족들을 둘러싼 세상은 조금은 변하고만다. 경영 위기에 처한 양조장은 곧 더 큰 회사에 합병될테고 큰 사위는 그렇게되면 이제 월급쟁이 사원이 될 것이다. 노리코는 자신의 연인을 따라 삿포로로 떠날테고 아키코도 고하야가와 가문을 떠나 아들을 키우며 살아갈 것이다. 음산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오즈 영화 중에서 단연 가장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한 엔딩으로 끝나지만 그럼에도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건 이렇듯 등장인물들의 앞날에 대한 막연하지만 희망 비슷한 무엇이 감지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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