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선생에 따르면 재일조선인은 조국, 고국 그리고 모국이 각각 다른 이로 정의된다. 정규교육과정 내내 단일민족국가 구성원으로서의 긍지같은 치열한 국민화 과정을 거친 끝에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정의내리는데 어떠한 거부감도 없는 '우리'로서는 재일조선인들의 이러한 분열적 정체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이러한 분열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을 심적 고통의 크기에 대해서는 짐작도 어렵다. 


태어나지도 유년시절을 보내지도 않았던 북한으로 '귀국'했던, 즉 모국도 고국도 아니지만 북한을 조국으로 택한 오빠가 병을 치료하기위해 고국(고향이 있는 나라라는 의미에서)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으로 또다른 '귀국'을 한다. 이 두 번의 귀국 아니 정확히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오빠의 세 번의 '귀국'은 한 개인에게 국가란 결코 불변하는 귀속지위가 아니며 어쩌면 하나의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산자가 이주한 국가로부터 새로운 시민권을 발급받는 따위의 일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여권상의 국적이 어디로 기입되어있는가와 상관없이 법적으로 자신의 주권이 행사되는 국가, 실제로 현재 살고있는 국가 그리고 그 개인이 심적으로 애착을 갖고있고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국가가 서로 상이한 개인에게 국가는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를 묻는 질문 앞에 서로 다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기위해 내세우는 임의적인 준거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국가나 가족이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봉사하기위해 고안된 개념이자 허구적 구성물이라는 맑시즘이나 탈근대 이후의 여러 상대주의적 견해들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하더라도 그들이 한 개인의 실존을 구속하는 가장 결정적인 실제적 기제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혐오한다고해서 또 부정한다고해서 그 바깥으로 빠져나오기란 그 안으로 편입되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렵다. 감시자의 말처럼 어쨌거나 오빠와 자신은 주인공이 싫어하는 그 나라에서 죽을때까지 살아야하고, 오빠의 바람처럼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위해 여행가방을 들고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닌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실존은 여전히 둘 혹은 세 나라의 경계 안에, 또 그 안에 살고있는 가족들의 안위에 비끄러져 매어있을 수 밖에 없지않을까.


자식의 병 하나 제대로 고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이념과 당의 지시에 충성할 것을 그 자식에게 지시하는 아버지, 전혀 원하지않았던 (것 같이 보이는) '귀국' 이후 가족과 국가 두 개의 공동체 그 어디에도 밀착하지못하지만 동시에 그 둘에 강하게 묶인 채 그 좁힐 수 없는 거리에서 비롯하는 압박감을 제대로 표현조차 하지못하는 오빠, 이 두사람을 보며 단호히 에고이스트가 되고자하는 주인공의 선택은 일견 당연한듯 보이기도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라면 어떨까. 결국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그렇게 에고이스트로 남고 싶어했으나 끝내 가족과 국가 그 어느 쪽도 넘어서지못하는 혹은 넘어설 수 없는 개인들의 무력함 바로 그것이었다.


이념이나 국가가 아닌 가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 이야기라는 감독의 말에서 이념과 국가 공동체가 개인과 가족에게 짊어지게하는 무게만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족 역시 국가만큼이나 무거운 공동체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사상을 강요한 것을 넘어서 아들에게 '귀국'이라는 결단을 하게 한 그 선택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은 일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가족은 국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국가보다 더 강력한 공동체다. 그것은 가족과 국가중 개인의 운명에 누가 더 강한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 자체를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한 개인이나 가족이 자신들의 둘레 바깥에서 사람이 아닌 법, 정치, 국가같은 비인격적 주체로부터의 어떠한 보호나 안정도 얻을 수 없다면 어떨까. 국가를 가족이 머무는 그때그때의 장소나 거처로 여길 수 밖에 없게만드는, 국가를 단지 서류상에 기입된 이름 중 하나로 인지하게하는, 소속되고 권리를 보호받는 실재적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가져보지못하고 상상하지 못하게만든 현실을 따져 묻지않을때 가족'과' 나라 그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개인'이 되지못한 이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십대시절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그깟 가족따위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바람과 가족으로부터, 또 국가로부터 벗어난 온전한 개인으로 살겠노라는 염원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놓여있다. 국가나 이념, 민족같은 온갖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구속되지않는 개인이 되기위해 필요한 조건은 아무런 사상도 갖지않고 모든 공동체를 부정한 채 백지같은 내면을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 구속이야말로, 또 그것을 가능케하는 조건이야말로 진정 필요하고 그건 아마도 국가와 가족 사이의 변증법과 그로부터 출현하는 개인이 되는 일일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나빠지고만 있는지 몰라도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지못한 탓에 국민도, 무국적자도, 그렇다고 난민도 아닌 애매모호한 위치에 처한 이들은 갈수록 늘어나고만 있다. (분쟁지역에서 일상화된 물리적 공격이나 테러위협을 받지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불안정한 지위를 일종의 반영구적 제도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바로 재일조선인일 것이다.) 결국 그 누구도 국가를 부정할 수 없으며 국가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살기란 불가능하다는게 아니다. 국가가 필요한 이유는 나를 '국민'으로 만들어주기때문만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국가에 속한 국민으로서의 소속감과 사명감을 강요하는 그런 국민주의가 결국 어떤 패악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다만 동질화함으로써 오히려 개인화가 가능케하는 기제로서의 국가의 역할은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즉, '국민'이 아닌 '개인'의 출현을 가능케하는 것이 국가이기때문이다.


가족이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 한 개인을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나의 정체를 처음 고민하게하고 개인성을 발견하게한다면 국가는 그 내부의 수많은 차이로 위계지어져있는 이들을 국민이라는 이름하에 동일화함으로써 이후 그들이 그 지점에서부터 비로소 개인성을 실현할 수 있게한다. 간략히 말해 이것이 개인을 만드는 가족과 국가의 변증법이라면 이러한 양 축이 무너질때 개인은 역설적이게도 가족과 국가로부터 종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평소 크게 불편하지는않더라도 통증 부위를 늘 의식하지않을 수 없는 고질처럼 부정하려해도 자꾸만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고마는 것이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위한 필수조건은 언제 어디서든 내 가족이 누구이고 내가 태어난 곳은 어디이며 여권에 적혀있는 국가명이 무엇인지, 선뜻 답은 할 수 있지만 결코 질문자를 만족시키지못하는 대답들과 그로 인한 부수적인 설명이 첨부되어야만하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부분일 순 있어도 결코 그 자체로 환원될 수 없음을 부정적으로 반증한다. 그렇다면 '국민'이 아닌 '개인'이란 없는걸까. 가족과 국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정말 굴레일지도 모를 그 두개의 공동체로부터 의식적인 거리를 둘 때, 그럼으로써 어느 쪽과도 가깝지않지만 그 사이 어디께에서 아슬아슬하게 발붙이고 있음으로써 '나'라는 개인의 서사를 써나갈 자리를 얻어낼 수 있을때, 그제서야 그 둘로부터 벗어날지도 모를 아주 희미한 가능성을 쥘 수 있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