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공화국은 천연덕스럽게 자국리그 우승팀을 월드챔피언으로 호명하는 미국 야구의 명성을 유지시키는 선수공급처 중 한 곳이다. 알버트 푸홀스나 매니 라미레즈 같은 슬러거들도 유명하지만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2009년 기아 타이거스를 우승으로 이끈) 아킬라노 로페스같은 파이어볼러를 배출하면서 "도미니카에서는 말도 배우기전에 공부터 잡는다"는 속설을 왠지 사실로 믿고싶게끔 할만큼 휼륭한 투수들을 배출해내고있다.

라이언 플렉과 안나 보든의 신작 <슈거>의 주인공 미구엘 '슈거' 산토스도 그런 도미니카 공화국의 젊은 투수 유망주 중 한 명이다. 캔사스 시티 로얄스가 도미니카 현지에 운영하는 야구 아카데미에 소속되어있던 산토스는 아이오와의 싱글 A로 승격되어 그토록 고대하던 미국땅을 밟게된다. 데뷔하자마자 빠른 강속구로 인정을 받지만 타지생활의 외로움과 언어불통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미숙함등이 겹치면서 점차 피칭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미국의 메이저리그 무대는 잘 짜인 고도의 피라미드 건축물에 가깝다. 루키리그부터 시작해서 싱글, 더블 트리플 에이로 이어지는 팜시스템은 빅리그라는 화려한 무대를 유지하기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인력시장이자 말 그대로 질좋은 농장(farm)이라 할 수 있다. 상품의 질에 따라 개별 농산물이 판매되는 장소가 천차만별이듯 마이너리그에서 빅리그로 '콜업'되는 선수들은 소수이고 대개 자신의 모든 선수 경력을 그곳에서 마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대부분의 중남미 선수들의 목표는 그래서 메이저 콜업이다.

승자가 아닌 패자를 다루는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따라 산토스가 실패하고 절망하는 결말을 택하는 우를 범하는대신 현명하게도 영화는 산토스가 미국의 심장부이자 미국 야구의 핵심지역중 하나인 뉴욕에서 자신이 가깝게 느끼는 유색인종 커뮤니티에 자연스레 편입되어가는 매우 자연스럽고 리얼한 결말을 제시한다. 더이상 직업으로서 야구를 하지않지만 그대신 그는 치열한 승자독식주의의 피라미드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즉 빅리그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둔 사람들과 함께 마운드를 벗어나 실제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그렇다. 애초부터 이 영화는 야구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스튜어트 홀은 이민자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일차적으로는 학술적이고 또 다소간 은유적이지만 그 언설 안에는 신산한 이민자의 삶과 정처없이 유랑하는 이산의 운명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이민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차지했던 지위를 타향에서 유지할 수 없다. 새로운 공간적 경계와 언어의 장벽 그리고 불안정한 정치적 법적 지위를 감내하면서 그들은 어떻게든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려 애쓰지만 언제나 모든 것은 유동적이고 아슬아슬하다. 디아스포라를 얘기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현재 상황을 만든 역사나 배경만은 아니다. 현재 그들의 이산이 어떠한 모양새를 하고있느냐야말로 더 중요한 지점인 것이다. LA의 코리아타운, 뉴욕의 리틀 이탈리아, 대학로의 필리핀 커뮤니티에서 그들은 과연 지금 그들의 고향에서 살고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민족성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을까. 그렇지않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고있을까. 좀더 높은 임금을 찾아, 혹은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국경을 넘은 소수자이자 이주노동자는 토착 주류세력과의 긴장속에서 나름의 순응전략을 선택하게되고 그 결과 본래의 것과는 뭔가 조금 다른 민족문화와 의례 형식 그리고 내용으로 나타날 것이다. <슈거>는 새로운 공동체에 편입되는 딱 그 지점까지만을 보여준다. 이제 산토스의 신분은 합법적 이주노동자에서 불법체류자로 바뀌었다. 앞으로 그는 어떤 삶을 살게되는걸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