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영국프로축구 2부리그 최하위를 달리던 더비카운티의 새감독으로 부임한 브라이언 클러프는 리그 우승으로 팀을 승격시킴은 물론, 71-72시즌에는 급기야 1부리그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지만 보드진과의 불화 끝에 라이벌인 리즈 유나이티드로 옮긴다. 그러나 시즌 개막후 충격의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끝에 단 44일만에 감독직에서 해임된다.

위대한 영국인 축구감독 중 한 명인 브라이언 클러프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겪은 44일을 사실과 픽션을 섞어 구성한 데이비드 피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the damned united>는 또 한편의 영국산 축구 영화이지만 피치 위가 아닌 터널 뒤의 또 다른 전쟁을 조명한다.

화려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뒤에서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감독과 보드진간의 갈등, 감독과 선수간의 불화, 그리고 라이벌간의 경쟁까지 여러 층위의 갈등이 겹쳐지고 이 알력다툼 속에서 클러프는 결국 홀로 남겨진다. 무엇보다 자신을 무시한(혹은 그랬다고 굳게 믿는)리즈의 감독 돈 레비를 향한 막연하고 원초적인 적의가 그를 위태롭게 만든 주범이다. 국가대표팀으로 옮기면서 클럽을 떠났다고는하지만 리즈 유나이티드는 여전히 레비의 소유물이다시피한데다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않은 라이벌 팀으로 옮겼으니 클러프로서는 제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간 격이다. 입심좋고 영리하며 유능하지만 그 능력 이상만큼의 야망을 품은 독불장군 클러프는 그렇게 값비싼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겨우 현실감각을 되찾는다.(그리고 그의 진정 위대한 업적은 사실 이 이후에 이루어진다.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 재임기간동안 만들어진 47경기 연속 무패기록은 훗날 아스날에 의해 깨지지만 지금의 챔피언스리그격인 유로피언 컵 2연패는 지금껏 그 어느 팀도 깨지못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맡기도했다.) 

원작은 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진 기록과 사실에만 기반하지않고 당시의 소문들, 관련된 이들의 의견 그리고 무엇보다 클러프라는 캐릭터를 무척 입체적으로 그려냈는데(아직 읽어보지못했고 기사에 따르면 그렇다고한다.) '실화 중독자' 피터 모건은 영욕이 확연히 대비되는 68년 더비카운티 시절과 74년 리즈에서의 44일이라는 두개의 시간대를 시종일관 교차함으로써 이야기에 탄성을 부과하며 논픽션을 픽션화해내는데 성공하고있다. 이미 시작과 끝을 다 알고있는 이야기임에도 두 시간대의 극명한 이야기 대조가 긴장감을 갖고 지켜보게만드는 것이다.

마이클 쉰의 연기는 리차드 프로스트와 토니 블레어 그리고 이번에 브라이언 클러프까지 전혀 다른 인생을 산 인물들임에도 서로 어느 정도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이게 피터 모건과의 합작 때만 그런건지 잘 모르겠다.(모건과 함께하지않은 쉰의 출연작을 아직 본 적이 없으므로.) 겉으로는 유들유들하고 유머러스하지만 속으로는 원대한 야망을 갖고있는 불같은 성격의 이상주의자로서의 실존인물 연기라는, 결코 흔치않은 독창적이고 꽤나 도전적인 자신만의 연기 영역을 스스로 개척한 셈이다.

시장에 걸린 판돈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는만큼 요즘보다 과거의 축구계가 더 관대했노라고 그동안 막연히 짐작했지만 클러프의 44일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비즈니스의 차원을 떠나 맹목적인 승부 집착으로 축구판이 살벌하기는 마찬가지였겠구나라는 인식교정과 함께 자연스레 지난 08-09시즌 초반의 토트넘과 후안데 라모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나를 비롯한 안티토트넘팬들은 라모스를 내쫓기위해 토트넘 선수들이 의기투합한거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들을 놀려댔는데 영화에서 리즈 선수들이 구단주에게 클러프를 씹어대는 장면을 보고있자니 어쩌면 그때 우리가 떠든게 괜한 유머나 음모론만은 아니겠구나싶었다.

사실 이 영화는 경기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경기 전후의 라커룸이나 경기시작전 터널 안까지만 보여주고 가장 궁금한 경기결과는 자막처리하거나, 당시 자료화면과 배우들의 연기를 포레스트 검프식으로 합성해 후딱 지나가버린다. 

지난 한 주동안 <야구란 무엇인가>와 <머니볼>을 읽으면서, 또 지난 몇년간 지치지않고 아스날 팬질을 하는동안 천문학적 판돈이 걸린 거대스포츠시장에서 성공과 실패의 성과는 결코 어느 한두가지의 요소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했다. 사실 그전까지 스포츠에 철저하게 무지했던 시절에는 아무리 그것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해도 역시 스포츠는 두뇌보다는 어디까지나 육체와 육체의 물리적인 충돌이며 최종 심급에서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거기에 더해지는 약간의 운이었노라고 넘겨짚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피터 모건도 스포츠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클러프의 실패일지 명세서를 복기하면서 스포츠 기자나 감독같은 업계종사자의 시각보다는 여전한 실화중독자로서의 면모와 작가적 상상력을 결합하는데 매진하고있다. <더 퀸>과<프로스트/닉슨>의 작가 아니랄까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않는 두 중심인물간의 미묘한 긴장과 갈등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고(꽤 영국적인 방식) 경쟁자를 향한 적개심을 연료로 삼아 주인공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또 한편의 살리에리 증후군 영화처럼 만들었다. 원작소설의 관점이 크게 다르거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클러프의 실패원인은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을게다. 일단 44일이란 기간은 적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 아닌가. 두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쓴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긴하지만 그래도 매작품마다 이렇듯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고있는 피터 모건의 극작술은 (파트너인 마이클 쉰처럼)연출자보다는 작가인 자신을 훨씬 도드라지게한다.(스티븐 프리어즈와 론 하워드를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려는건 아니다.) 마치 "이거 내가 쓴 시나리오야'라며 낙관을 떡하니 찍는듯한 레비와 클러프의 마지막 tv토크쇼 장면이라니.

마지막으로 딴소리 한마디, 당시의 리즈 유나이티드는 사실상 돈 레비의 수렴청정이 여전히 진행중인 클럽이었다. 이적하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해도 동료라기보다는 적에 가까운 이가 맡았던 클럽으로 향하는 그 심정이 나로서는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클러프의 행보를 최근시점으로 끌어와 비유하자면 2000년대 초반 리그 자체를 양분했던 벵거와 퍼거슨이, 혹은 05-06시즌 무리뉴와 퍼거슨이 당시 최대라이벌이었던 상대방 클럽으로 이적하는 정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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