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들은 한눈에도 피곤해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배웅나온 친구에게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약간 들떠있는 표정에서 전형적인 여행자의 설레임도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그건 조금씩 나에겐 사그라져가는 감정이었다. 집을 떠나온지 한달도 채 안됐지만 제대로 먹지도못하고 숙소를 정하고 지칠때까지 걷다가 돌아와 저녁마다 남은 예산을 확인해보는 일은 이제 나에겐 그저 또다른 일상이었으니까.

 그렇게 저녁9시 비엔나발베니스행 야간열차가 출발했다. 나초스낵을 먹으며 두남자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나에겐 눈길한번 주지않았다. 물론 나도 그편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워하는 두남자가 왠지모르게 불안해보였다고하면 그냥 선입견일뿐이었을까. 그러나 한시간도 안되어 그 불안감은 구체화되었다. 

 어느나라 경찰인지도 알 수 없는 그들은 모든 승객들에게 여권 제시를 요구했다. 통상적인 절차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쓸데없이 권위적이었고 여권을 제시하지못했던 두남자에게는 더 그랬다. 그들은 일부러 경찰의 말을 못알아듣는 척하는 것 같기도했지만 자신들은 아무 문제없다는듯한 제스처를 계속 취했다. 결국 다른 두명의 경찰까지 합세해 총 네명이 나와 그들이 앉은 좌석앞으로 모여들었고 나중에 합세한 두 경찰의 눈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양인인 내가 보였다. 그들은 내게 다시 여권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고 난 이미 끝났다며 거절했다. 그제야 먼저 조사했던 경찰이 독일어로 난 신경쓰지말라며 나중에 온 그 경찰에게 말했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인지 명령인지모를 말들이 계속됐고 두남자는 계속 자신들은 못 알아듣고 모르겠다는 시늉만 계속했다. 결국 경찰들은 두 남자를 일으켜세웠고 차량을 빠져나갔다. 텅빈 맞은편 좌석엔 그들이 먹었던 나초과자봉지만이 남았다.

 그들이 정말 불법체류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말이 통하지않는 나와 똑같은 여행자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씩 그 기억을 떠올릴때면 자연스레 그들의 향후 행방이 궁금해진다. 다음 역에서 내려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불법체류자 신분이 확인되어 그들이 왔던 곳으로 추방을 당했을수도있고 아니면 유럽지역 거주자임이 확인됐을수도 있고 어쩌면 주머니에서 여권이 나와 다시 여행을 시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의 눈빛을 분명히 기억하고있다. 그것은 속이려해도 속일 수 없는 여행자만의 유유자적하는 허영과는 거리가 먼 신산한 삶이 가져온 피곤으로 가득차있었다. 정말 그들이 다른 땅에서 뭔가를 새로 시작해보려했다면 결국 무위에 돌아간셈이고 그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했을것이다. 도착은 커녕 기차가 떠나는 곳에서부터 들떠있게만들었던 그들의 섣부른 희망은 그렇게 다시한번 좌절로 귀결해버렸다.

 <인디스월드>의 주인공인 소년 자말과 청년 에나야트는 런던으로 가기위해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파키스탄, 이란, 터키, 이태리, 프랑스를 경유하는 불가능해보이는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다. 결국 자말만이 런던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이 경유지 어느곳에 있든, 삶의 풍경이 갑자기 달라지지는않는다. 애초에 밀입국자일뿐인 그들에게는 안락한 집이나 안정적인 직업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반복될 뿐이다. 거기엔 유랑자의 뜬구름잡는 방랑의식이 아닌 절박한 생의 의지만이 가득차있을뿐이고 그렇기때문에 흙먼지날리는 사막에서 산뜻한 서구의 도시로 그 풍경이 바뀌어도 영어로된 농담하나 알아듣지못하는 에나야트가 그곳에서 행복할리는 없을 것이다. 탈출계획이 도대체 중간경유지마다 어떻게 브로커에게 전해지고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지금 바로 여기 21세기의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고있는지를 몸소 경험한다.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피난한 난민이 역설적이게도 서구행을 택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몇 푼의 돈과 생명을 등가교환하는 자본주의의 간악함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곧 ‘이 세상안에서’ 통용되는 기본적 룰이라는 불편한 진실임을 관객은 재확인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3년전 그날밤의 기억이 떠오른건 사실 그리 옳지못할 수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자체에 이미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심리적우월감이 은연중에 내재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끌고나가던 경찰들이 보여준 다분히 억압적이며 폭력적이었던 분위기는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이 경험한 그것과 크게 달라보이지않았다. 그 경찰들은 악행을 저지른게아니라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두사람과 같이 싸잡아 '문제있어보이는 아시아인'으로 분류된 잠깐동안 내가 느꼈던 불안감을 되짚어볼때 내 판단이 그렇게 틀린 것 같지는않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