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스타일의 문제라는 수전 손택의 말은 학술적 글쓰기에도 예외는 아니다. 형식적 제약이 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글쓰기 역시 스타일, 정확히는 그들 각자의 퍼스낼리티가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스타일은 또다른 스타일로부터 제약을 받게되는지라 70년대 이후 아마도 가장 저명한 미국인 사회학자의 최근 번역서는 저자 개인의 개성과는 별개로 주제를 향한 응집된 글쓰기보다 학자로서의 지적 박식함을 증명하는데 집중하는 지식인들의 특정한 글쓰기 경향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번역본 상 430여페이지 되는 책은 저자가 고안해낸 개념들, 정확히 말하자면 비교와 대조를 위해 새로이 정의되고 짝지워진 개념들의 분류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공감/감정이입, 변증법적 대화/대화적 대화, 하향식 연대/상향식 연대, 사회성 (sociality)/ 예절 (civility), 사회성/사교성(sociability), 정치적 좌파/사회적 좌파, 지루함/무관심, 해방/해리, 복원/교정/구조변경/, 연대/협력, 장기적 헌신/단기적 헌신, 초연함(detachment)/재집착(reattachment) 등,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개념들이 서로 대비되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예를 들어 공감과 감정이입은 둘 다 연대를 형성하긴하나 저자에 따르면 하나는 끌어안음이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 만남이다. 전자는 변증법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지만 후자는 특정한 목적이나 만족감이 없는 대화적 교환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기존의 개념들을 재정의하고 대비를 하기위해서는 자연히 방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어빙 고프먼, c 라이트 밀스, 뒤르켕, 짐멜 같은 사회학자부터 몽테뉴, 바르트, 루소, 비트겐슈타인같은 철학자, 홀바인의 회화 <대사들>, <캐치-22>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같은 대중 영화, 그리고 집단적 협동의 시초적 계기로서의 종교개혁과 '사회박물관' 역할을 했던 20세기 초의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박물 전시회같은 역사적 사실까지 저자의 인용에는 경계가 없고, 계급분화 과정에서 경험하는 어린 시절 불평등의 내면화, 신자유주의 전환 이후 열악해진 노동상황과 그 대응 전략으로서의 외부부터 움츠러드는 '비협동적 자아'와 그 관리를 둘러싼 유사 사회심리학등, 한 권의 책 안에서 소개되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가쁜 독서 경험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사회학 개론서를 보충하는 실전서로서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존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하고 다른 개념을 빌어와 대비함으로써 새로운 맥락에 위치짓는 것은 지식인으로서는 응당 당연한 의무이고 심지어 격려받을만한 일이기도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새롭고 창의적인 학술적 작업을 통해 정말 그 노력에 응당하는 창의적인, 또 논쟁적일 수도 있는 결론을 얻어냈느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결론부에 이르면 이전까지의 현란한 지적 유람을 허탈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데 풍부한 지식과 정보의 자재로운 활용이 민망해질 정도로 전하려는 주제와 메시지가 앙상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 드디어 저자가 강조하려는 바가 그나마 다소 직접적으로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인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이것이 노먼 토머스의 지도 원리였고, 나는 그것이 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깊이 협력할 능력이 있다."

 

수직적이지않은 수평적이며 민주적인 의사소통과정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반적이고 다소 뻔한 결론을 내기위해서 이렇게 많은 지식과 사례를 든 것이다. 저자 자신도 이러한 거대한 우회와 덤불숲 두들기기를 의식했던지 머쓱해하기도한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한 아카데미 뿐만 아닌 일반적 저널리즘을 포함한 논픽션 쪽에서도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이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쓰인 책들의 정전이자 최고의 교본 사례는 아마도 맑스의 자본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를테면 a라는 주제를 향해 진행하는 과정에서 b와 c라는 세부 목표가 등장하면 기실 a와는 약간은 동떨어진 그 둘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하고 집중적으로 파고들다가 다시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d나 e에 대해서도 그 다음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나서야 이제 다시 a라는 본줄기로 돌아와 논의를 재개한다. 예를 들면 자본을 설명하기위해서 먼저 상품을, 상품을 설명하기위해서는 상품을 상품이도록 하는 가치에 대해, 그 다음에는 다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인 화폐에 대해, 그렇게 이들을 지나고나면 이제야 자본에 대한 논의로 이동한다. 이렇게 꾸준히 분기되고 우회를 거치는 책을 읽다보면 정작 내가 지금 읽고있는 부분이 전체 책의 얼개 상 어디에 위치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인지하지못한 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게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19세기의 유럽 출신 사상가와 21세기 초엽을 사는 미국인 사회학자의 차이가 있다면 이렇듯 분방하게 벌려놓은 지식의 다발들을 보기좋게 일관된 하나의 체계로 수습해냈느냐의 여부에 있다.

아직 학위를 받기 이전의 상태에 있는 석박사생들은 학위과정 내내 간명하고 주제를 향해 응집된 글쓰기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의받는다. 지도교수와 평가자들로부터 꾸준히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지적을 받는 과정에서 그들은 학술적 글쓰기를 계속 할 자격이 있을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실망을 넘어 때로는 심한 내상을 입기도한다. 그런데 정작 학위를 받고 독립된 지식인으로서 인증을 받고나면 그때부터 그들의 글쓰기는 이제까지의 수련과정과는 달리 처음에 바랐던 자유를 얻는다. (아마 이것도 지식인의 역설적 특권 중 하나일지도) 시간이 지나며 명망높은 저자가 될수록 그의 글쓰기는 엄격한 비평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자잘한 실수나 과감한 시도 모두 익스큐즈 되는데 심지어 대학자들은 때로는 꼼꼼하지못하고 미비한 레퍼런스 마저도 용인되곤 한다. (대개 그런 경우 유능한 편집자나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그 수고로운 일이 넘겨진다.) 쓰기의 자유로움이 곧 방만한 글을 낳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건 이미 그 자체로 지식인으로서 실격이다. 일반적으로 아카데믹한 글은 이미 전반적인 구성이 짜여진 다음 본격적인 쓰기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언급하고있는 이 책의 문제는 형식과 구성상의 밀도와 내용상의 오리지널리티 추구가 그 의도와 다르게 발생한 우연한 효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번다함과 내용적 앙상함은 우연적 결과만은 아닐 것이다.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측면을 두루두루 살펴보면서 이것저것 백과사전처럼 건드릴수록 정작 주제로부터는 멀어지며 자연히 말할 것은 조금씩 줄어들게되고 그러고나면 이제 남은건 결론도 무엇도 아닌 그저 그럴싸한 개연성을 지닌 마무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타일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는 손택의 말은 역시 틀리지않았다.

 

90년대에 나왔던 그의 주저에서도 그렇고 최근 몇년간의 저작들을 보더라도 이 저자는 늘 추상적인 이념이나 총체적인 현상보다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물질, 사람들의 행위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더 주목해왔다. 정치적 편향성이나 당파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않는 비맑시스트인 리버럴한 미국인, 그것도 처음엔 신체를 통한 테크닉을 연마해야하는 클래식 음악을 하다가 두뇌를 더 많이 써야하는 사회과학으로 전향한 백인남성 미국인 인문사회학자라는 이력은 그의 이러한 독특한 학문적 접근법을 이해할 수 있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성)의 측면은 다소 모호하기도하고 제한적이기도하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말할 때 현재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동학의 분석같은 거대 서사를 다루는 대신 그는 그 과정에서 실직 후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는 우울한 개인들에게 직접 다가가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발언을 분석한다. 새로운 도시 문화의 융성은 생산 양식이나 문화적 차원으로부터의 변화가 아닌 '살'을 지닌 구체적인 인간들의 행위가 '돌'같은 물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분석보다는 묘사와 기술에, 특정 이념이나 사조, 주의보다는 즉물성에 천착하는 것이 이 저자의 방법론인 셈이다. 그래서 그에겐 공동체의 회복과 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이 사회적 관계는 신체적으로 겪는 경험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당부와 함께 이른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체화된 사회적 지식 (embodied social knowledge)'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에도 저자의 이러한 접근법은 다시 그러한 즉물성의 외부에 놓인 거대 서사를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그 비판의 대상과 효과 양쪽에서 모두 미온적이 되고만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신체적 동작으로 이루어진 의례의 체계화는 협력과 연대를 가능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례적 연대'가 왜 지금까지는 활성화되지못했을까. 의례적 연대가 활성화되면 이 책의 2부에 해당하는 협력을 약하게 만들었던 사회적 조건들이 극복될 수 있을까. 다시 책의 2부로 돌아가보자. 확산되는 불평등, 파편화된 노동과 해체된 관계등은 협력이 약해진 원인인가 결과인가. 그리고 의례적 연대는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질문을 바꿔서 의례적 연대가 지금껏 활성화되지 못했다면 이들은 앞에 말한 것들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비협동적 자아의 출현은 약화된 의례화된 연대의 결과인가 원인인가.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제안들은 하나같이 다시 이 책의 결론 이전까지의 내용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실망한 대목은 또 한번 저자 자신이 고안해낸 '사회적 수리 social repair'라는 개념을 들고나올 때다. social이라는 추상적 개념과 repair라는 구체적이고 동적인 심상의 이 합성어에는 사회라는 장으로부터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져나와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물리적으로 지금의 세상을 개선할 능력을 갖춘 우월한 타자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암시된다. 그것은 저자같은 지식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내가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위정자나 공권력일 수도 있다. 실제로 '국가 개조'라는 말이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곳에서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이 묘한 데자뷔 앞에서 당황하지않기란 어렵다. 자라보고 놀란가슴은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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