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을 맺을 수 있는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남녀사이에 우정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언의 다른 한편에는 '사랑에 국경도 나이도 없다'는 강변 또한 있으니 관계를 맺기위한 사전 조건과 선행 사항들이 적지않은듯하다. 옛부터 '친구'라 불릴 수 있는 관계를 동년배의 동성간으로 한정해버릇해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범위에서 벗어난 관계를 맺을때 왠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하지만 이 범위란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이어서 그것이 지나치게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위치하면 어딜가나 시선의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든 살 노인과 스물 갓 넘은 소년과의 우정은 태평양 건너에서도 여전히 생경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향한, 금기에 대한 도전처럼 보이기까지하니까.

연고도 없는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걸 즐기고 영구차를 자가용으로 구입하며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죽음에 집착하는 소년 해롤드.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도 아닌데 교살, 동맥과 손목절단, 권총, 익사, 분신 등 갖가지 방법으로 최소 열다섯번 이상 자살을 밥먹듯 시도하면서도 해롤드는 죽지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냥 죽지않는다. 창백하다못해 무표정하기까지해서 시체같기만한 그의 얼굴은 억압적인 어머니를 대할때 더욱 유난히 공포스럽게 바뀐다. 이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해롤드의 두 번째 자살 시도. 잡지에 나온 심리테스트를 해보라던 어머니는 너는 이러이러하니 이렇겠지라며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테스트를 하고있고 그런 어머니를 보며 숨막혀하던 해롤드는 리볼버에 총을 장전하더니 결국 자기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던 어느날 역시 누군지도모르는 장례식장에서 해롤드는 곧 여든살 생일을 곧 맞이하는 괴짜 할머니 모드를 만난다. 검은색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장례식에 노란 색 우산과 하얀 코트를 입고나타날 정도로 주관이 뚜렷하고 당찬 모드의 캐릭터는 여러모로 해롤드의 어머니와 명징한 대비를 이룬다. 영국식 억양을 쓰는 어머니와 거대한 집이 그 크기와 실내 인테리어로 인해 유럽의 고성을 연상시킨다면 모드가 살고있는 작은 트레일러는 갖가지 꽃과 식물이 있고 큰 창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터프한 드라이버이기도한 모드는 늘 새로운걸 추구하기위해 우리의 삶이 주어졌다고 굳게 믿고있으며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않는데 이러한 보헤미안적 사고방식은 왠지 유럽의 상류귀족의 분위기를 풍기는 해롤드와 그의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처음부터 내내 상반된 것들의 대조를 통해 코미디를 구성한다. 소년은 죽음에 집착하지만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은 노인은 세상을 하나둘 배워가는 어린 아이처럼 생의 의지로 약동한다. 모드가 두려운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는 열혈 청춘처럼 누드 모델도 되고 직접 얼음 조각을 한다면 영국 억양을 쓰는 어머니는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사교와 예의 범절을 중시한다.

모드는 해롤드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하나둘씩 쌓아가게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한다. 장례식장에서는 삶을 생각하고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갖고있는 꽃들이 피고 자라고 죽는 모든 과정이곧 삶이며, 도덕과 윤리 그 이상을 보라고. 그럴때 너의 삶은 자유로워지는거라고. 그 어떤 젊은이보다 쿨하고 개방적인 전대미문의 노인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삶을 다시 사고하게하고 그렇게 모드와 친해지면서 점점 해롤드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걸작으로 분류된다면 노인이 젊은이에게 베푸는 인생의 혜안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있기때문일 것이다. 곧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듯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사를 통하는게 아니라 활력이 넘치는 동적인 캐릭터,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삶에 적극적인,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 자체를 흐릿하게만드는 캐릭터의 존재 자체만으로 주제를 구현하고있기때문이다.

이 영화가 컬트로 추앙받는다면 그건 남다른 코미디 방식때문이며 이런 방식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코미디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는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 해롤드가 행하는 가지각색의 자살시도, 심지어 어머니가 소개해준 여자를 놀래키기위해 할복을 시도하고 그걸 따라하다가 그녀가 허무하게 죽고마는데도 영화는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일체의 언급도 없다. 또 모드는 절벽에서 바다로 풍덩 빠지지만 다음 장면에서 아무렇지도않게 나온다. 이런 뻔뻔함이 현실감을 저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고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외에도 한쪽 팔을 잃은 군인 삼촌의 거수경례나 경찰과의 추격전, 프로이드의 카우치에 거꾸로 눕는등, 기존의 공인받은 사회적 가치나 제도에 대한 풍자는 신랄하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는 그 기회를 죽음으로 메우려하고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은 노인은 젊은이의 죽음마저 자신이 가져가고는 아직도 충만하기만한 자신의 생의 에너지를 젊은이에게 건넨다. 아무리 자살을 해도 죽지않기때문에 해롤드에게 그동안 죽음이란 다다를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일뿐이었다. 해봐야 죽지도 않는 자살을 아무리 골백번 시도해봤자 그에게 죽음은 아직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다 해롤드는 모드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진짜 죽음의 맨얼굴을 대면하고 그제야 모드가 한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다. 피고 자라고 지는 이 모든 과정이 삶이라고. 온전한 성장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해롤드를 중점으로 본다면 이 영화 역시도 대부분의 성장영화들이 가르쳐온 교훈을 다시한번 재확인시킨다. 성장하기위해서는 죽음을 대면해야한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덧.1.처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을 봤을때는 이 영화를 보기전이라 몰랐는데 얼마전 다시보다가 버드 코트가 나왔다는걸 그제야 알았다. 30년이란 세월을 지나면서 이 미소년도 많이 변하긴했는데 그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은 어렸을때만큼이나 정감이 가더라만.

2.영화 시작에 나오는 캣 스티븐스의 don't be shy가 마이클 무어의 <식코> 엔딩크레딧중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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