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본 어떤 광고문구.

"디자인 덕분에 살맛나요.
여기는 세계 디자인 수도 - 서울입니다."

집권 초기부터 "디자인 서울"을 천명하며 온 서울시내를 갈아엎더니만 누가 어떻게 정했는지 몰라도 서울이 세계디자인수도로 정해졌나본데 이 문구를 보자 할 포스터의 <디자인과 범죄>와 이 책이 제목을 빌려온 아돌프 로스의 에세이 <장식과 범죄>가 전하는 토탈디자인 비판이 바로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나 디자인을 외치고 숭배하는 가운데 정작 디자인은 사라지고있다는.

포스터가 지적하는 토탈디자인의 문제는 지금 서울에서 정확하게 관찰된다. 조건과 맥락을 거세한채 일방적으로 기입된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건 사용가치도 미적가치도 없이 내용(기의)을 전혀 갖고있지않은, 텅빈 기호마냥 덩그러니 남은 디자인. 어디에나 편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하는, 그래서 편재하며 부재하는 디자인.

황금옷을 입은채 광화문 한복판에 들어앉은 세종대왕은 한글에 대한 우수성을 실제 사용이나 경험을 통한 실질이 아닌 상징으로 강요한다. 그 앞에 서있는 이순신 동상까지 더해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명의 역사적 인물이 수도 서울의 행정적 최요지에 떡하니 앞 뒤로 서있는 광경은 실로 압박감으로 충만한 기괴한 미감을 선사한다.

허울좋은 '디자인 서울'의 기실이란 것이 대개 이런 식이다. 대학로에 들어섰다가 발목부상등 시민들의 민원으로 다시 갈아엎어야했던 인조시내나 한강다리 곳곳에 설치된 분수시설처럼 수경시설에 대한 남다른 애정, 재개발(이라고 쓰고 난개발이라고 읽는다)로 쫓겨나는 서민들, 천정부지의 집값으로 인해 어쩔 수없이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데이비드 하비는 이를 '추방에 의한 축적'이라 명명했다.(용산참사 이후로도 서울 시내 이곳저곳에서 길거리 노점상이나 개발예정지역에 대한 강제철거는 여전히 계속되고있다.) 이토록 숨가쁜 디자인 서울프로젝트 속에서 정작 시민들의 삶이 어떻게 디자인되고있는지 서울 시장은 지금 자신이 벌이고있는 심시티적 노력의 십분의 일이라도 고민해봤을까. 디자인되고있는 것은 도시인가 사람인가. 그리고 서울시가 상상하는 디자인의 실체는 진정 무엇일까.

디자인 비평으로 가장하고있지만 실은 그 어떤 두툼한 사회과학서적이나 에세이보다 신랄하게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를 비판하고있는 이 자그마한 책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조심스레 상상하고있다.

디자인에 문외한인 나의 피상적 인식으로 보더라도 디자인은 단순히 공간에 대한 물리적 구획만은 아니다. 디자이너의 심미적 판단과 안전, 기능성 등 실용적 계산의 양자가 상호 긴장을 놓지않는 가운데 매크로와 마이크로 사이에서, 오래된 것과 새 것의 사이에서, 아름다운 것과 비천한 것 사이에서의 쉴틈없는 변증법 속에 공간만이 아니라 그 공간의 안과 밖을 아울러 새로이 형성되는 삶의 양태 혹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행위, 그래서 예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주 전형적인, 그야말로 진짜 정치 행위이자 의사소통 행위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하는 것이다.

서울 시장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재구성된 지난 약 십여년 동안의 서울의 외양은 단순한 정치 행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직업 정치가의 권력의지 그 자체가 참혹하리만치 적나라하게 재현된 예라 할 수 있을텐데 이것이먈로 공적 디자인에 정확히 반대되는 지극히 사적 디자인이 아닐까. 난숙한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개인들의 삶을 서서히 그러나 아주 철저하게 재조직하고있다면, 즉 디자인하고있다면 그에 저항하기위한 궁극의 디자인이란 곧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과 그것을 가능케하는 삶의 조건에 대한 급진적 상상이자 기획임을 놓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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