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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은 결국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하지만 그렇지못하거나 반대로 언제까지나 그안에서 머물려고하는 아들들의 이야기다. 이는 (아직까지 보지못한 <바틀 로켓>을 제외한) 그의 모든 영화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발사인 맥스의 아버지는 타인들 앞에서 신경외과 전문의로 둔갑되고 전직 변호사 로얄 테넌바움의 장남 채스는 부정혐의로 아버지를 고소한 후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그 다음 영화 <스티븐 지수와의 해저생활>부터 이 아들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켄터키 항공사의 파일럿 네드 플림턴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만 믿고서 해양탐사전문다큐멘터리스트(이렇게 부르는게 맞나?)스티븐 지수를 찾아가고 나중에는 성까지 지수로 개명한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주인공 휘트먼 3형제는 여기에 한술 더 뜬다. 이들은 어찌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랑했던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노라며 애정결핍증상을 보이면서 아버지의 선글라스나 면도기같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 서로 다툰다. 이렇게 덩치만 큰 미성숙한 애어른들은 그래서 남들은 일찌감치 해치운 ‘어른 되기’의 과정을 남들보다 비싼 방식으로 치른다. 뭐 평생 놀고먹어도 크게 지장없을정도로 부자들이니 큰 상관은 없겠지만.

비록 흔한 인도 클리셰이고 동시에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는않지만 영적 체험을 위해서라는 기차 여행의 애초의 명목은 그럴싸해보인다. 파리 슈발리에 호텔에 처박혀있던 막내 잭, 임신한 여자친구를 떠나려하는 둘째 피터는 맏이 프랜시스의 부름에 왠일인지 고분고분 응한다. 그러나 각자 나름의 고민을 안고있는 형제는 결코 크고 대단한 게 아닌 작고 사소한 문제에서 매번 부딪치며 투닥투닥 여행을 계속한다.

형제들의 전사(前史)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을 남기면서 전개되는 영화는 처음엔 영적 체험으로 시작했다가 삼천포를 돌고돌아 어느 현지 소년의 죽음을 겪고 나중에는 은둔해있던 어머니와 재회하는 여정을 거친다. 그결과 값비싼 기차여행이 형제에게 정작 베푼 것은 그들의 영적인 고양이 아니다. 각자 살던 곳에서 개인적인 문제로 끙끙대던 형제들은 인도에서 여유롭게 요가를 배우거나 갠지스 강 앞에서 명상같은건 하지않는다. 여행이 모두 끝난 후 기차가 다시 돌아갈때까지도 그들의 문제는 단 한가지도 해결되지않았고 아마도 자신들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간후에야 비로소 그때부터 풀어나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는 인도에서 분명 뭔가를 느꼈다. 자기가 먹고자고 일하던 곳에서 빠져나오면 그제서야 그곳과 자기 자신의 삶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늠된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진실쯤. 그게 바로 여행의 기능 아닐까. 그것이 꼭 콜로세움처럼 오래된 건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왜소화하고 영원에 가까운 장구한 시간 앞에서 경건해하는 방식으로만 행해질 필요는 없다. 휘트먼 형제가 이 영화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로 그 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 고작해야 생전에 아버지가 몰던 차를 가져야만 그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취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전형적인 근대인/(혹은)도시인적 사고를 했던 형제는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어느 인도 소년의 죽음을 겪은 뒤에 비로소 죽음의 질감을 피부로 확인하고 무게를 실감한다. 어수룩한 삼형제는 그 후 오지에서 수녀생활을 하는 어머니와 재회하고나서야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사원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해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을리는 애초부터 만무하다. 대신에 길 위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직접 어머니를 마주한 이후에야 형제에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견문을 넓히기위함도 물론 좋지만 그냥 목적없이 떠나는 여행이 갖는 의외의 효용은 떠나봐야만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이를테면 프랜시스의 비서 브랜든이 만든 코팅된 일정표처럼) 스케줄에 맞추어 무심히 따라가다가 마주친 의외의 장소나 사람들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던 기억이 돌아오고나면 기억에 또렷이 남는 법이다. 그리고 기실 대부분의 모든 여행이 그러하다(남는게 사진과 쇼핑목록뿐인 가이드투어는 그래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일뿐) 

덧. 그래도 하필이면 왜 꼭 무대가 인도여야만 했느냐는 힐난 앞에서는 내가 감독도 아니지만 나름 변명을 할 수는 있다. 이 형제는 세련됐을지는몰라도 지적이지는못한 전형적인 백인들이니까 그렇게까지 사려깊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는. 그렇게따진다면야 아들이 셋씩이나 있는 패트리샤 휘트먼이 인도에서 수녀원장을 하고있어서라는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그저 웃기고싶어서, 따로 할 말을 위해서 앤더슨이 심어놓은 꽤나 과장된 장치들일뿐, 그는 인도라는 무대의 클리셰를 기꺼이 써먹고싶었을뿐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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