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관만 보면 건축물로서 아파트는 확실히 주거시설이라기보다는 수용시설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급아파트들은 최상급 편의 제공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차별화하기위해 노력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특히 공공아파트 단지의 밀집된 사각형 용기의 집합같은 외관을 보고있으면 아파트란 건물의 일차목적은 단연 인구의 분산과 수용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80년대초 막 준공을 마친 공공아파트 단지의 최초 입주가구중 하나였다. 처음 입주 당시를 되돌아보면 주변의 이웃들이 비슷한 연령대의 가구들, 즉 신혼이거나 첫출산이 얼마 지나지않은, 그러니까 유아 자녀를 하나나 둘 (80년대 자녀 계획의 영향으로 셋이상은 거의 없었던걸로 기억한다) 키우고있는 비교적 젊은 부부를 위주로 한 이른바 정상핵가족이 대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연령 뿐만아니라 단지내 주민들은 대개 어슷비슷한 계급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엄밀한 학적 분류에 따르자면 노동자 계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간 계급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중산층 진입을 목전에 두고 상승중인 그런 소시민계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아직 분명히 인지하지 못했고 사실로서도 그렇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과적으로 훗날 실제로 그들은 대개 지난 삼십년동안의 지속적인 강남아파트값 상승으로 인한 자산소득을 통해 지대 수익에 의한 잉여가치 획득이라는 교과서 예시에나 나올법한 부의 장기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일괄된 평형대의 주거시설에서 주거의 평등 뿐만아니라 부(축적)의 평등마저 누리고있었던 것이다. 사무직, 자영업, 자유업등 직종은 저마다 달랐으나 딱히 주변 이웃을 부러워할 것도, 무시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세입자가 아닌 소유자로서 그들에겐 분명치는 않아도 어렴풋한 장밋빛 미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거야 다 부모들의 관점이고 나같은 아이들의 세계는 그들과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다. 아버지들이 출근하고 난 뒤 텅 빈 주차장을 공터삼아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고 공놀이를 했으며 아파트 복도에서는 팽이를 치거나 공기놀이를 했다. 이제 막 개인용 컴퓨터가 하나둘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이라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집 밖에서 열심히 뛰놀던 시절이었다. 주말에는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위해 우리집과 똑같이 생긴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거실이 아닌 작은 방에 따로 놓인 tv를 연결해 처음 비디오게임을 했고, 프로야구를 봤고 밤에는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들었다. 아파트가 나에게 베푼 혜택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만 한정되지도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사춘기에 이르자 성적만 일정하게 유지하면 특별히 뭔가를 강요받거나 방해받지 않게되면서 나는 음악 잡지를 보며 판을 사러다니거나 영화 제목을 적어가며 비디오가게를 출입하고 있었다. 주거불안이 뭔지도 모른채 그렇게 조금씩 중산계층의 문화자본과 문화적 습속을 하나씩 익혀가고있었던 것이다. 조지 오웰이 말한 것처럼 공영주택에서 자란 사람은 빈민가에서 자란 사람에 비해 확실히, 눈에 띄게 중산층의 관점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몇번의 이사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번도 강남의 아파트단지라는 실로 엄청나게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일종의 상징자본이라는 큰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아파트라는 습식 건축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노후하게 마련이고 생활상의 여러 불편을 감수해야한다는 뜻이기도하다. 나이가 들며 활력을 잃고 스러져가는 육신처럼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늘고 불편을 낳으며 쇠락하는 집을 보며 양가적인 감정이 들지않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적 노쇠함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상징적 함의를 갖는데 대단위 토지 위에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 단지 자체가 낡은 과거의, 지나간 시대를 상징하는 유물처럼 변해간다는 것이다.

 

나카무라 요시히로의 <모두 안녕히>는 이러한 공공주택단지의 문제를 다루고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죽음을 겪은 뒤 아파트 단지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않고 저녁이면 단지를 순찰하며 친구들의 안녕을 돌보는 주인공. 그러나 그 친구들은 진학이나 취업, 결혼, 전근등의 이유로 하나둘씩 단지를 떠난다. 낮에는 뛰노는 아이들로 분주하고 장을 보는 전업주부들이 주를 이루다가 저녁이면 온 식구가 모여 저녁식사하는 단란한 가정으로 채워졌던 단지는 이런저런 정치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으며 늘어나기만하는 전출 인구로 인해 고스트 타운처럼 변해간다. 이렇게 보면 공공주택단지라는 것은 고도경제성장 시기 일본과 한국 사회 그 자체를 은유하는 기표라 할 수 있다. 자아 실현보다는 모두들 생산과 노동에 일로매진하는 가운데 그러한 산업역군들을 배출하고 그들을 재충전시키는데 모든 역량이 집중된 사회 구조 그 자체 말이다. 집이란 것이 그 가정의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비주얼적 매개체라 할 때 공공주택단지내의 입주 가정들은 상대적 박탈감없이 자신을 남과 견주지않은채 남들 하듯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리면 그만이었고 천편일률적인 모양을 한 그들의 아파트는 그런 목표 달성을 위한 재생산의 공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고도경제성장시기가 끝나고 장기불황의 시대에 접어들자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와 저들은 같아보이지만 실은 그 내부에서 꾸준히 계급과 직종과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의 분화는 계속되었고 그렇게 저마다 다른 선호와 특성을 가진 그야말로 더이상 나뉠 수 없는 '개인'(in-dividual)들에게 공공주택단지는 이제 더이상 선망되는 주거모델이 아닌 것이다. 빈 집이 늘어남에 따라 슬럼화가 진행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나 최빈곤층의 일시적 피난처로 전락하고 당연히 이런저런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한다. 영화에는 여기에 주인공의 심리적 트라우마라는 플롯이 겹쳐지면서 아파트 단지가 마침내 이겨내야할 극복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주체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벗어나야하는 것이다.

 

복지국가란 것이 과거 번영했던 사회민주주의 국가 모델의 유물이자 (입으로는 열심히 외치긴하지만) 점점 더 정치인들의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허구가 되어감에따라 이제는 이러한 공공주택단지의 건설과 유지를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어쩌면 대단위 공공아파트 단지라는 개념자체가 앞으로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주거프로젝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사라진 산동네와 달동네를 대체하는 빈민층집단거주지, 즉 그나마도 기피 시설이라는 이유로 도시외곽이나 저소득층 주거지역에 지어지는 공공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런 성격의 공공아파트 단지, 인구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그들의 기대 소득을 예측하고 계층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국가 안전장치로서의 아파트 단지 말이다. 계층이동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과 공공아파트 단지의 몰락은 기이한 방식으로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가치 자체에 대한 아마도 의도된 무지와 오인, 그리고 폄하와 무시야말로 더 큰 문제일테지만. 그런 점에서 나에게 <모두 안녕히>는 그저 올 한해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유행이었던 풍요로웠던 과거에 대한 또 한 편의 추억팔이가 아니라 그 시대를 떠받치던 어떤 '시대정신', 이 표현이 너무 거창하다면 과거 한 시대에 모두가 공유했던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현재의 것이 아닌 집단적 믿음과 가치에 대한 만가로 보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