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기주는 동시대에 활동하며 서로 교류하기도 했던 오스기 사카에와 기타 잇키를 주인공으로 두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두 편 모두 일반적인 전기영화의 범주에는 완전히 벗어나 있는데 요시다의 대표작인 <에로스+학살>(1969)이 1923년 육군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에 의해 아내, 조카와 함께 살해당한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를 주인공으로 여러 서브플롯들이 중첩된 모호하고 굴절된 심리극으로 완성된 반면, 1921년 아사히 헤이고의 야스다 젠지로 암살로 시작해 1936년 2.26사건 수괴 혐의로 인한 사형까지 다룬 <계엄령>(1973)은 잘 알려진 기타 잇키의 에피소드들을 외삽하면서 <에로스+학살>보다는 명징한 줄거리를 가지고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몇가지 팩트상의 오류가 있다. 우선, 기타가 어느 실업가를 찾아가 아사히 헤이고가 야스다 암살시 입었던 피묻은 옷가지를 보여주고 돈을 뜯어내는 장면은 적어도 마쓰모토 겐이치의 평전 <기타 잇키>에 따르면 사실과 다르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게 아니라 그 주체가 기타가 아니라 시미즈 고노스케라는 그의 제자 중 한명인 것이다. 물론 기타는 실제로 정치인들로부터 받은 헌금 외에 협박과 공갈을 통한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 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사형 직전 관헌은 기타에게 당신 동료들은 죽기 직전 천황 폐하를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기타는 “그것도 좋겠지만, 죽기 전에 농담 따위는 하고 싶지 않소”라고 대답한다. 이 역시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라 기타를 포함 총 네 명이 같이 총살형을 당했는데 그 직전 상황은 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니시다 미쓰기가 딱히 누구에게 한 명에게 말을 건넨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할까요?”라고 했다. 약 일년 전 청년 장교들이 처형당할 당시 최후의 목소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기타는 “아니,나는 하지 않겠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누구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 1065

 


'천황 만세'를 외치겠느냐고 물은 이는 집행자가 아니라 사형수 중 하나였고 대답 내용도 조금 다르다. 실존 인물을 다루는 경우 요구되는 세심함에 대해 요시다가 몰랐을리가 만무하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무엇을 의도한 것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기타를 사상가보다는 협잡이나 일삼는 모리배쯤으로 격하하고 싶어서? 그냥 고증 오류? 아니면 기타 사상의 특징처럼 그를 어느 한 쪽으로 규정하기 힘든 복합적인 인물로 구축하고 싶어서였을까. (참고로 영화에서 기타를 연기한 배우 미쿠니 렌타로는 실제 피차별부락 출신으로 젊은 시절 징병을 피하기 위해 도피했다가 붙잡힌 적이 있고 후에는 피차별부락 해방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런 이가 내셔널리스트인 기타를 연기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지만 기타 잇키의 정치적 지향이나 사상적 위치, 쉽게 말해 그의 ‘이념’을 규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천황보다도 늘 국가를 최우선시한 국가주의자이지만 그가 구상한 국가는 자신의 사후 실제 구현된 군국주의적 파시스트 국가가 아니라 평범한 국민들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국민국가였고, 사유재산의 전면적 폐지까지는 아니지만 일부 제한을 기획할만큼 자본주의, 특히 재벌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본문에도 여러번 인용되는 발언 즉 “기타 군은 이른바 사회주의자를 혐오하지만 동시에 황실중심주의라는 것도 싫어했다”고 할만큼 일반적 사회주의자로 분류되기를 원치않은듯 했지만 관료와 재벌을 혐오했고 무엇보다 천황중심주의의 해체를 일생의 업으로 삼다피시 했다. 유사 천황기관설을 일관되게 주장한 셈이나 미노베보다 더 급진적으로 헌법을 해석해 국체론을 혁명론으로, 즉 천황을 혁명의 원리로 제시했다. ‘천황을 받들어 국가개조’를 시도한다는건 이런 뜻이다. 좌파는 물론이고 기시 노부스케 같은 권력의 실세마저 매료시킬만큼 그의 사상이 소구하는 정치적 스펙트럼은 드넓었고 그래서 그를 한 두 단어로 정의하기도 어렵다. 사상가, 학자, 혁명가, 우익활동가, 흑막의 정치인 등등, 그의 아내 말처럼 기타는 이들 중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모두를 합친 것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 복잡함을 이해해보기 위해 그가 하는 (초기)주장의 윤곽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 유신이 천황중심의 메이지 국가체제로 완성된 것은 변절이며 그래서 제2의 유신 즉 혁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혁명은 국가주권론을 실체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군주주권론은 타도한다. 유신혁명의 근본 뜻은 민주주의이며 정치경제적 특권계급을 제거하고 천황과 국민이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혁명이란 사상의 변환이며 그 방법은 보통선거이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사회주의’를 견지해야하고 전쟁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는다(기타는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러일전쟁부터 찬성했다).

 

흑룡회 1회 대표로 중국에 파견되어 지속적으로 그 설립자이자 우익의 거두인 우치다 료헤이와 편지로 연락할만큼 친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스기 사카에와 고토쿠 슈스이 같은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와도 교류했다는 점도 그의 규정짓기 어려운 위치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유존샤 정도를 제외하면 어떤 공식 정당이나 당파에도 정식으로 소속된 바가 없고 그러기를 거부했다. 오만함으로 비칠 정도의 자신감이 있었고 자신만이 현실을 파악하고 일본을 개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학교를 끝까지 마치지 못한 채 연고도 없이 상경한 젊은이가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라는 어마어마한 제목의 1000페이지짜리 책을 출간한 사실은 작게는 기타 잇키라는 젊은이의 포부를, 크게는 당시 일본 사회의 정치적 격동의 규모를 짐작케한다.

 

성인도 되지 않은 시절부터 신문지면을 통해 국체론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할 정도로 일찍부터 정치에 눈을 뜨고 훗날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이라는 이름의 혁명 법안을 구상하며 ‘국가개조’를 꿈꿨던 '정치소년'은 그러나 불행히도 시종일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시대와 불화했다. 기타가 생전에 출판한 세 권의 저서 중 두 권은 출간 후 얼마 지나지않아 바로 출판 및 판매금지를 당했다.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서 자국의 해방과 연관된다는 믿음을 갖고 중국 혁명이라는 차선책을 택해 건너갔으나 결국 그곳에서도 절반의 성공 혹은 실패를 뒤로하고 돌아온다. 이런 관점을 이어가면 기타의 비극적 최후 또한 그의 삶에서 줄곧 이어져온 시대와의 불화와 그로 인한 지속적인 패배가 맞이한 대단원의 막이 된다.

 

그 대단원인 2.26사건을 둘러싼 즈음의 시대 상황을 돌아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30년대 중반 일본은 훗날의 거국일치 및 총동원체제로 향할 준비가 거의 마쳐진 상황이었다. 1910년 대역 사건, 18년 쌀값 상승으로 인한 대규모 폭동에서 보듯 '주의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언제라도 반체제 세력이 되어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었고 사회불만의 분위기는 격화됐다. 그런 속에서 1922년 일본공산당이 정식으로 결성되고 일급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자 1925년 보통선거법 제정과 함께 그로 인해 예상되는 혼란을 막기 위해 같은 해, 대한민국 국가보안법의 원조이자 롤모델인 치안유지법이 제정 및 시행되었고 1928년과 29년 연이어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검거가 행해진다. 그렇게 사전 정지작업 같은 일련의 일들이 끝나고나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진단처럼 이제 우익이 만개하는 1930년대가 시작된다. 치안유지법 시행과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일소를 거치면서 좌익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우익의 30년대가 열린 것이다. 31년 만주사변과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세워지고, 본토에서는 우익 테러리스트들의 정치인 암살이 이어졌다(20년대 이후 총리와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암살과 테러 목록은 일본 정치사의 특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32년, 아래에서는 혈맹단과 5.15사건 같은 젊은 장교와 우익의 테러, 위에서는 정당 정치가 붕괴되고 고위급 막료들로 구성된 군인 내각이 성립하며 사회 비판은 억압되고 파시스트 사회로의 전환이 준비 완료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타는 어쩔 수 없이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본심인지 위장인지 모르지만 종교의 세계로 침전하는 내적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제는 1920년대에 박열 후미코 사건이나 궁내성 사건 때 했던 것처럼 괴문서를 통한 협박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중국 혁명의 동지였던 쑹자오런처럼 군사단체를 직접 조직, 운영하는건 본인의 고백처럼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 군벌이 난립해 베이징 정부와 대등하게 맞서던 중국과 비교해 일본의 상황은 앞서 언급처럼 판이했다. 사상가에서 혁명가로, 재야에서 암약하는 흑막으로, 또 니치렌교에 깊게 빠져든 광신도 같은 모습까지 그의 이력은 당시 그를 둘러싼 정치 사회상과 긴밀하게 맞물려 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주장도 변화한다. ‘제국주의적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면서 천황이 아닌 국민으로부터 연원하는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이가 쿠데타를, ‘혁명적 암살’을 이야기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으며 하층 군인들의 혁명운동이야말로 일본 개조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저자는 이 시절 아예 기타가 ‘전쟁을 신성시하는 태도’였다고 말한다. 전쟁을 불사하고 피할 수 없다면 테러를 통해 한명씩 제거해 나갈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국가주의자가 나타난다. 전향인지 아닌지, 사상의 진화라면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본문에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국가사회주의'로 분류되는 기타의 사상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민주주의 등이 자신만의 논리에 의해 혼종되어 있다. 국민과 국가는 둘 중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려야하는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라 나름의 방법으로 공존한다. 기본적으로 국가주의자이지만 그에겐 분명 처음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암묵적 가정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념과 교리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모순이지 않은 채 합리적으로 공존한 것이 그의 불행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그런데 종교의 힘을 빌어 비의적이고 모호한 메시지를 남기며 대외적으로 침묵하던 그에게도 우익의 30년대가 되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젊은 군장교들, 이른바 ‘황도파’라 불리는 이들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황실, 의회, 정부, 군부같은 체제 내 권력과 유리된 하급 장교들, 재야 학자,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청년, 우익 결사단체 등으로 이루어져, 관료와 재벌을 척결하고 천황이 직접 지배하는 국가로의 혁신을 위한 ‘쇼와유신’을 도모하는 또 한편의 우익들에게 기타는(영화 전편이 마지막 장면을 위한 알레고리처럼 짜인) 스즈키 세이준의 <겐카엘레지> 속 신문 지면의 문구처럼 ‘우익의 사상적 지도자’로 추대되기에 충분했다. 천황친정이라는 이상을 품고 손에는 총과 칼을 쥐고 있던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처럼 과거 그 자신도 한 때는 자기 손으로 세상을 뒤집어보겠다는 풍운의 꿈을 안고서 일본과 중국에서 혁명을 도모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이제는 재벌과 정치가 사이를 거간하며 생계를 잇던, 나이 들어가는 혁명 사상가가 서로 조우한다. 

 

역사의 패배자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으로 보면 그들은 그저 ‘무모한 자들’일 뿐이다. 그들이 성공했으려면 각각의 과정에서 점차 자기 세를 불려나감으로써 저항을 막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권력의 최중심을 접수하고 수습하려는 면밀한 계획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였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대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궐기 장교들은 천황 친정과 황실 중심주의를 내세웠고 당연히 천황도 찬성하리라 가정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군수뇌부는 반란군을 상대로 적극 협조는 하지 않았어도 암묵적으로 동조하는듯 보였지만 직접 군복으로 갈아입고 진압에 나서려 할 정도로 천황이 분노하자 분위기는 바뀌어 빠르게 진압이 완수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2.26 사건의 희비극적 성격이 있다. 기타의 주장과 달리 천황 중심의 국체는 무너지기는커녕 날로 강고해졌고 점점 더 천황은 신성시되어갔다. 심지어 패전 뒤, 도조 히데키가 사형을 당해도, 새로운 ‘일본국 헌법’이 미국인에 의해 쓰이고 일본어로 번역된 수준에 그쳐도 ‘국체호지’, 즉 히로히토는 목숨을 건졌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사법적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상징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국체는 지켜졌다. 기타와 궐기 장교들이 살아남아 이 과정을 지켜봤다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만 흘러간 세상사를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연 누가 잘못된, 허황한 꿈을 꾸었던 걸까.

기타가 처형당한 날짜인 1937년 8월 19일로부터 한달쯤 전인 7월 7일 중국 베이핑 남서부 류거우차오에서 일본군과 중국군간의 교전이 발생한다. 중일전쟁의 시작이다. 이 공교로움은 기타가 살아있었다면 개전도 패전도 없지 않았을까라는 또 하나의 허황하고 야릇한 상상을, 이른바 ‘기타 전설’ 중 하나를 낳는다. 하지만 기타의 의견서가 정치가들에 의해 실제 정책으로 반영된 예가 거의 없다는 점은 이런 상상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기타와 ‘현실정치’ 와의 관련성을 모색하려하지만 그 상관관계는 아무리 보아도 희미하다. 물론 기타는 당대에 나름의 영향력을 가진 우익의 실세였지만 그와 현실정치는 늘 따로 각자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었다. 젊었을 적 대담한 정치이론서를 쓰던 사상가가 이제는 집에 틀어박힌 채 매일 독경하면서 ‘영고일기’라는 이름의 몇줄짜리 메시지를 단속적으로 남길 때 이미 그는 사실상 패배한 셈이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틀어졌다면 전향선언을 하는 그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근원적 몰이해에 파묻혔기에 좌우익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속할 수도 없으며 결국은 최후의 순간까지 아웃사이더의 아웃사이더로 남은 것이 기타 잇키라는 사내의 삶의 본질은 아닐까. 2.26을 주도한 궐기 장교들마저도 본질적으로 그의 국체론과 천황에 대한 견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즉 오해했다. 국가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입헌군주제, 사민주의 등등을 전부 끌어와 혼종된 이설을 입론했으나 학자들로부터 진지한 학문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낭만적 혁명이라는 이상에 이끌리는 젊은이와 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우익들이 추종하게 되면서 그는 불온한 선동가쯤으로 여겨졌다. 헌정회나 입헌정우회 소속의 정치가들과도 어울리긴했지만 동시에 늘 요주의 대상으로서 체제와의 긴장을 이어갔고 끝내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이론과 사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나 인정, 공감을 얻지 못한 채 반란 수괴로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그런 그에게 ‘카리스마’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있으나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는 있어도 민주주의를 의심하기는 어려운 지금, 개인보다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하향식의 의사결정체계를 가지고 헌정을 일시중단한 계엄령 하에서 재벌과 원로를 척결한 군사국가를 주창하는 인물이 나오면 그는 ‘카리스마’는 커녕 과대망상쯤으로 치부되어 재야에서도 무시나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당대에 기타는 이해받지 못했으면서도 추앙받았다. 불화하면서 동시에 나름의 방식으로 시대와 공명한 것이다.

몽상가의 위상은 세상과 불화할수록, 이해받지 못할수록 높아지는걸까. 그 파시스트적 감수성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든 관철하려 했으며 꾸준히 견제받고 지속적으로 실패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의 실패자들이 갖는 위엄을 기타는 갖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익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상의 내용이 아니라 기타가 견지했던 인내와 태도 그리고 그로부터 자연스레 나오는 위엄일테고 저자가 그에게 매료된 것도 이런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보면 기타 잇키는 실패한 혁명가보다는 성공한 아웃사이더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가 성공한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었던건 실패한 혁명가가 된 이유와 동일하다. 우익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끓어오른 그 시대가 몰이해와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앙받게 했고 또 실패한 혁명가로 만들었다. 자신이 속한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은 거의 드물지만 그렇다고 늘 위화감을 느끼고 적대적 긴장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기타는 우익의 시대에도 끝까지 비주류였고, 거대한 국가개조의 뜻을 내놓았으나 정작 그 뜻을 실현할 능력이 있는 실권자들은 대부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겨우 한 줌의 젊은이들과 함께 일을 도모했으나 기대와는 정반대의 파국을 맞이했다. 이렇게 시대와 내내 불화했고 자신의 뜻을 이루지도 못했지만 그랬음에도 기타는 카리스마 대접을 받았다. 어떻게 사람은 강고한 우익이 되는지를 알고싶어 책을 들었으나 사료를 바탕으로 재현된 일생에는 빈틈이 무수했다. 물음에 대한 하나의 가설은 있다. 어린 시절 살았던, 본토와 떨어진 섬나라가 품고있던 자치공동체 설립이라는 집단적 욕망과 거기에 더해진 계급타파와 평민주의라는 사회주의적 성향, 그리고 본토에서 불어닥친 자유민권운동의 여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유년기의 사회주의 사상 형성 이후, 성인기의 행적에 대한 건조한 서술 속에서는 결단을 내려야했던 생의 매 순간들에서 기타가 취한 논리와 원인 그리고 심리를 짐작하기가 좀체 어려웠다. 파국으로 가기까지의 행적은 있는데 그 원인과 이유와 과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글을 쓰는 대상과의 객관적, 비평적 거리 유지에 내내 고군분투하는듯한 저자가 보였다. 혹시 기타의 카리스마란 것도 이렇게 원인과 이유의 부재에 따른 의문이 신비화한 결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인지 책을 읽어 나갈수록 더 알고 싶어졌다. 시대의 혼돈 속에서 점점 실체를 잃고 추상화된 인물에 대해. 파시스트를 거부한 파시즘의 시대라는 그 아이러니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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