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이나 회고록 출판은 직업을 포함한 공적 경력의 정점을 지나고 생물학적으로도 종말에 다가가는 이들 중 일부만이 가질 수 있는 문학적 특권이다. 따라서 자서전은 기본적으로 문학이면서 또한 객관적이지 못한 사료 즉 변명과 합리화가 불가피한 특수한 저술 형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쓰인 자서전과 회고록이 명징한 자기 인식과 자기 규정의 시도인 것 또한 분명하다. 스스로를 정통적 유대인 정체성으로부터 어떻게든 거리를 두면서 경계와 언저리에 선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 규정하려는 토니 주트의 시도처럼 말이다. 『기억의 집』에 실린 <능력주의>와 <언어>라는 글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의 ‘방법론적 유아론’, 공산주의, 젊은 시절 키부츠 체험을 통해 빠져나온 시오니즘까지 온갖 이념과 주의로의 경도를 경계해왔다고 말하는 주트는 그럼 무엇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규정하려는걸까.
    주트의 도저한 비관주의는 이 책을 쓸 당시 투병중이던 루게릭병에 의한 사지 마비를 넘어 시시각각 육박해 들어오는 죽음 앞에서 더욱 강화되는 동시에 그렇게 불리한 생의 조건이기에 가능했을지 모를 객관성과 냉철함을 동반하고 있다. 주관적이기 쉬운 개인적 회고가 비관적 세계 인식과 맞물리며 20세기 유럽(과 미국)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서술이 이렇게 완성된다.  
    이력만 보자면 주트의 삶은 전후 출생한 유럽 남성 지식인의 스테레오타입 그대로다. 1948년 런던의 중하층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유럽에 사는 유대인에게 예상되는 딱 그만큼의 차별을 겪었으나 킹스칼리지라는 최상위 교육을 통해 계급이동에 성공했고 후에는 교수로서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는, 이상적이고도 전형적인 유러피언 남성 지식인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결코 순탄치않은 긴 지적 여정이 있다. 60년대 말 페미니즘 발흥에서 느낀 당황, 프랑스에서 넘어온 온갖 현학적인 ‘포스트’ 이론의 홍수 속에서 느낀 ‘지루함’, 90년대에 불어닥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감 등. 특히 직접 경험했던 프랑스의 그 유명한 고등사범학교 제도와 그 구성원들의 지적 보수성과 편협함 그리고 옹졸함에 대한 풍자는 신랄하기 그지없다.

 

나는 프랑스인 또래들이 머릿속에 쑤셔넣은 암기학습의 분량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이따금 소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빡빡하게 채운 방대한 양이었다. 푸아그라의 운명,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새내기 프랑스 지식인들이 문화에서 습득한 것, 그것 때문에 이들은 상상력이 빈곤하기 일쑤였다. 이 점에서 에콜 노르말에서의 첫 아침식사는 아주 교훈적이었다. ... 자신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시시한 증거와 제1원리에서 연역한 뒤집을 수 없는 결론, 그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덕분에 나는 프랑스적인 지적 인생의 근본 원리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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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 노르말에 있을 무렵을 돌아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1830년에 신설된 맨체스터-리버풀 간 철도에서 시험주행하는 조지 스티븐슨의 <로켓>을 관찰하고 오라는 프랑스 왕의 명을 받은 엔지니어다. ... 이 프랑스 엔지니어는 ... 방금 눈 앞에서 관찰한 것을 양심껏 판단한 후, 파리로 보고서를 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물건은 작동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이다. 바로 거기에 한 프랑스 지식인이 있었다.


이렇게 지적으로는 대륙식 이론 지향보다 영국식 경험론에 충실하다면,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에 거리를 두고 사민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태어난 직후부터 줄곧 당연한 줄로 알고 살았던 유럽 복지국가의 해체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그리고 그 기저에 자리한 사상의 변화에 주목하는건 당연하다. 지식인이기 이전에 전후 출생의 사민주의자가 체감하는 영국 사회의 변화는 징후적인데, 그가 어릴 적 즐겨 탔던 ‘그린 버스’의 중간계급성이 민영화 과정에서 상실된 것을 보면서 이는 영국 공공교통체계, 더 나아가 영국의 민영화된 공공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예증하는 것으로 그 함의가 바뀐다.
    그런데 공산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하면서도 2차대전 후 최대 한 세대 정도의 기간동안 크게 번영한 후 점차 사그라든 사민주의로의 회귀는 가능하며 또 그래야 한다는 주트의 믿음은 어떻게 봐야할까. 흔히 말하듯 사민주의는 전후 서유럽의 경기 호황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일시적 유토피아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과연 지금 유럽은 진정 사민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을까. 다시 '큰 국가'의 필요를 외치는 주트 역시 개인적 향수와 엄정한 사회과학적 객관성을 혼동하고 있는건 아닐까. 주트의 굳건한 믿음을 따져보려면 무엇보다 그가 가정하는 사민주의가 뭔지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 입학 전에 이미 많은 문헌을 섭렵한 탓에 동기들처럼 쉽사리 마르크스주의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그가 견지했던 사민주의는 지금와서 보면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의 리버럴한 민주주의 이상은 아니었노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일관되게 비관적인 주트가 사민주의에 거는 기대는 그래서 더 도드라지는데 거기엔 우선 역사학자답게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얻은 신뢰가 있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평등을 수호하려는 사민주의를 통해서만 개인의 자유도 최대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교육의 하향평준화를 비판하고 출신 계급과 무관하게 공정한 과정을 통해 우수한 학생을 육성하기 위해서라도 엘리트 교육을 마다할 일이 아니라면서 역설적이게도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독특한 그의 주장에는 기회의 평등만이 아닌 조건의 평등까지 고려하는 사민주의자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가 보기에 사민주의는 원리나 사조에 충실한 체계적 강령이라기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둔 잡종에 가깝다. 그렇다면 사민주의에 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정교한 정책 매뉴얼만큼이나 그에 준하는 참여자들의 강한 신념일 수 밖에 없다.
     이론보다는 구체적 사실과 역사적 경험을 선호하는 방법론, 사민주의, 여기에 주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마지막 요소는 그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갖지 않으려 하는, 즉 부정으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과거 아렌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트는 유대인 비판을 회피하거나 침묵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identity)을 동일시(identification)로 정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해자로서의 유대인을 향해 그는 시종일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의심이나 자기비판을 방어적 무관심으로 덮어버리고 자기연민에 빠지기위한 핑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 내게 있어 유대주의는 집단적 자기 질문과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는 다프카처럼 거북함과 반대의 특질을 지닌 감수성이다. 타인의 관습을 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 과거에 대해 책임감이라는 빚을 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유대인인 이유다.


어떠한 주의나 교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민족 정체성까지 경계하는 반면 ‘사실에 의지하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범적인 반 이데올로기 실천을 위해 활용하는 주트는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면밀하다. 『재평가』에 실린 글 중 알튀세르 정도를 제외하면 글을 쓰는 대상에 대해 긍정과 부정 중 일면만을 조명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그의 글은 일관되게 대상에 관한 매우 상세한 관련 정보나 지식을 꿰차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비판과 상찬까지 두루 참조하는데, 한 인간이나 사물을 다층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게 될수록 단정적 판단이 들어설 공간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늘 판단을 강요받고 행해야하고, 그런만큼 확정적 편향에 대한 경계에 소홀하기 쉬운 비평가들이 참고할 점임에 분명하다.


삶과 지식을 어떻게 결합하고 교직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은 모든 지식인들이 공유하는 고민이다. 지식이 전무한 이가 전 생애를 통해서 몸으로 배운 신념과 사상을 투철하게 관철하기도 하고, 박학한 이가 화려한 지적 곡예를 부리며 전향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급진적이고 획기적인 지식이라 할지라도 한 개인의 삶과 경험을 초월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걸까. 과연 지식은 삶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애초부터 어떤 한계선이 그어져 있는건 아닐까. 하지만 어떤 생각의 차이는 삶으로의 개입을 넘어 목숨까지 요구한다. 선험적이거나 추체험적인 이론보다 실재했던 과거의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을 믿는 주트의 회고에서 과거는 단순히 현재를 위한 반영과 참조의 대상만은 아니다. 물론 그 과거엔 분명 어떤 실재와는 다른 이상향이 잠재한다. 모든 ‘이즘’이나 ‘주의’들로부터 거리 유지를 요구하고 우리가 쓰는 언어의 타락을(그리고 종내는 사고의 타락을) 근심하는 비관주의자의 다른 한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과거를 향한 탄식만이 아니라 현재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주체에 대한 큰 기대가 있다. 유작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의 절반이 앞에 나온 책들의 거친 축약이라면 나머지 절반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자의, 대중을 향한 거의 유언에 가까운 절절한 호소가 담겨있다. '좌파야말로 소명과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건 우파가 아니라 오히려 좌파이며 급진주의는 늘 가치있는 과거를 지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그렇다. 결국 우리는 ‘역사에 뿌리박힌 존재들이다’. 주트의 후기 에세이들은 너무 당연해서 잊어버리고 만 것을 상기하게 하기에는, 약간은 과분하다고 느껴질만한 20세기에 관한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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