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엔 집에 누워 tv나 보는게 최고,는 아니지만 하여튼 그랬다. 일부러 크리스마스 정서와는 정반대에 있는 감옥영화 두편을 연달아봤다. 자끄 베케르의 <구멍>과 마이클 파스벤더가 나오는 스티브 맥퀸 감독의 <헝거>.

한 편은 탈옥영화이고 나머지 한 편은 감옥내 투쟁기인데 영화의 스타일만큼이나 감옥의 분위기도 확연히 대조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한 <헝거>에 나오는 북아일랜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재소자로부터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대우를 박탈한 잔인한 국가기계로서 극이 전개되면 될수록 관객인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면 <구멍>에 나오는 감옥은 주인공의 탈옥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아케이드 게임의 스테이지로서 맘껏 스릴을 선사했다. 마룻바닥을 파고 지하로 내려간다음 그 안에서 미로같은 터널을 지나 하수도관과 연결된 거대한 벽 앞에 부딪히자 다시 한번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며칠동안 벽을 뚫어서 외부와 연결되는 과정은 매 스테이지를 클리어해가며 진행되는 비디오 아케이드 게임을 연상케하고 자질구레한 살림살이와 다섯명이 어울리는 모습 속에 마치 다락방처럼 아늑한 분위기까지 나는 감방 내부, 그리고 교도소장과 교도관, 그리고 재소자 간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는 영화에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멍>은 지금 내가 보고있는 동세대의 현대 영화가 과연 무엇을 놓치고있는지(혹은 포기하고있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했다. 며칠전 우연히 <본 얼티메이텀>을 다시 보게됐는데 초반 워털루 역에서의 추격씬을 보면 뉴욕 cia건물에서 그곳 상황을 일일이 보고받고있는 부국장이 이를테면 '빨리 저 전화 도청해봐' 혹은 '화면 확대해봐'같이 명령을 내리고 그 밑에 요원들이 키보드 몇번 두드려 명령을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저 곳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위도와 경도까지 깔끔하게 처리된다. 한마디로 말해 요즘 나오는 스릴러가 재미없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저 컴퓨터의 존재다. 주인공이 기껏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란게 빠른 시간 내에 적의 컴퓨터에서 자료를 훔쳐내 복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현대 영화의 주요 클리셰가 된지 오래. csi가 이런 경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컴퓨터가 중요한 일처리는 다하고 주인공들은 나중에 폼만 잡는게 바로 그것이다.(특히 마이애미) 컴퓨터는 빠르고 정확하다. 당연히 모든게 일사천리다보니 영화 속 캐릭터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선이든 악이든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요컨대 현대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더이상 노동을 하지않는다. 노동이 배제된 영화, 그리고 그 징조를 지금 <아바타>같은 영화를 통해 선체험하고있다고 말한다해서 이게 오버일까. (이건 지금 이 포스팅에서 내가 말하려는 원래 의도와는 다른 층위의 얘기긴하다. <아바타>는 단순히 탈노동이 아니라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탈노동 혹은 무노동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조건을 생생하게 재현하기때문이다. 이걸 가능케하는 핵심은 탈현실이 아니라 초현실 아니면 무현실쯤 되려나.)그런 점에서 <구멍>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서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의 '노동'을 보여준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꿈쩍도 하지않고 버티고서서 찍어낸 일련의 육체의 움직임, 그러니까 주인공들이 쇳덩이로 마룻바닥과 벽을 뚫고 그러면서 생긴 돌덩이들을 자루에 쓸어담고 먼지를 닦아내는 이 모든 과정을 계속 봐야만한다. 그것도 무려 두번씩이나. 쇠줄로 창살과 문을 잘라내고는 아닌 것처럼 위장하고 작업이 계속될수록 얼굴과 옷은 엉망진창이 되어가며 심지어 돌덩이에 깔려 죽을뻔한 위기도 겪는다. 게다가 다섯명 중 이 무식하기 짝이없는 탈옥계획을 주도하는 이는 무려 오른손 엄지와 집게가 두마디씩이나 잘려있다! 아마도 평생을 이런 식으로 자기 손으로 뭔가를 부수고 깨나가며 살아왔음을 몸소 증명하는 이 남자가 그 손으로 벽을 부수고 모래시계를 만들고 해머대용으로 쓸 도구를 만들고 쇠막대를 구부려 열쇠를 만드는 장면은 영화에 숭고하기까지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쇼생크 탈출>의 줄거리를 주인공 팀 로빈스가 동료와 교도소장을 이십년동안 이리저리 속이면서 야금야금 벽을 뚫어 탈출한 얘기라고 정리한다면 <구멍>은 "도대체 그 벽은 어떻게 뚫은건데?"라는 질문에 답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탈옥의 과정을 밀도있게 묘사해냈음에도 결말에 이르러서는 탈옥에 성공하기위해서 진정 뭐가 제일 중요한지에 대해 얼음장처럼 시니컬하게 대꾸하는걸 보면 이 영화가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의 것임을 확인케한다.

이 영화의 감옥이 꽤나 자유스러워보여서 현실적인 느낌은 덜하다고 말했는데 알고보니 장 피에르 멜빌이 지은 스튜디오에서 촬영한거라고한다. <구멍>이후에 나온 멜빌의 영화들도 이 영화처럼 노동을 재현하는데 힘쓰고있다는 점이 특기할말하다.  

발표된 시공간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헝거>와 <구멍>이 공유하는, 아니 모든 감옥영화들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이라면 자유를 포함한 일체의 권리가 박탈당한 그 험악한 공간 안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만을 믿고 거기에 전적으로 기대고 의지한다는 점일텐데 <헝거>의 재소자들은 감옥, 그리고 넓게는 국가에 저항하기위해 세수를 포함한 일체의 씻기와 이발 그리고 심지어 옷마저 거부한채 자신들의 육신 자체를 인질삼아 저항을 계속한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내러티브 전개를 거부하는 좀 이상한 스토리 진행구조를 갖고있다. 대사 몇마디없다가 급기야는 중간에 죽고마는 어느 교도관의 아침출근 준비로 영화를 시작하고(당연히 사전 정보없는 관객으로서는 이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게된다.) 진짜 주인공이 어쩌다 이곳 감옥에 들어오게됐는지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않으며 영화가 중반도 한참 넘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단식투쟁이 시작된다. 마치 시즌제 드라마에서 초기 몇편을 뚝 떼어놓고 중간쯤부터 마지막 에피소드까지를 재편집한 꼴이라고할까. 따라서 마이클 파스벤더의 숨막히는 단식투쟁 과정과 앙상한 육신의 비주얼이 압도적이긴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로 시작하는 부분은 주인공 바비가 단식투쟁의 명분을 대외에 알리기위해 평소 알고지내던 가톨릭 신부와 면회하는 장면부터인데 장장 십분동안 단 한번의 편집도 없이 전개되는 두사람의 길고 긴 대화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수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도 모배우가 이십여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줄이면서 루게릭병환자 연기를 했다고해서 화제였는데 <헝거>를 보고있으면 배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식욕을 참아가며 살을 뺀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잘 알지만 그럼에도 감량자체가 중요한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헝거>에서 마이클 파스벤더는 말그대로 서서히 말라 죽어간다. 식사는 커녕 제대로 서있을 수 조차 없고 욕창은 나을 기미가 없고 급기야는 몸 위로 이불조차 제대로 덮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지금 내가 보고있는게 극영화인지 스너프필름인지 헷갈릴 지경인데 이 영화 자체가 또 하나의 연장된 투쟁의 도구인게 아닐까라는 의심 혹은 강한 확신을 들게한다. 무릇 배우는 자신의 육체를 마음대로 부릴줄 알아야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배우도 자신의 육신을 자의대로 컨트롤해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파스벤더를 포함해 재소자로 나오는 모든 배우들은 아예 기꺼이 자신의 육체를 카메라 앞에서 포기해버린다. 그러자 이들의 육신은 영화 안에서 놀라우리만치 생생한 질감을 얻는데 성공한다. 얼굴의 멍자국, 말라붙은 피, 음영이 드리운 근육, 푸석한 피부, 아무렇게나 짤린 듬성듬성한 머리칼까지. 상황이 이렇게되자 고문을 당하고 강제로 샤워를 당하는 동안 발악하고 기절하는 그들의 육체는 이제 더이상 본인의 것이 아닌게 되어버린다. 영화의 역사에서 배우의 육체를 훈육하고 고문하는 수난극은 짧지않은 계보를 가지고있는데 이 영화는 육체의 수난이란 것이 영화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결코 소비되고 현시되는 물건으로서의 전시품이 아니라 분명히 또다른 대사이자 나레이션이며 그 자체로 주인공인 그런 육체, 문자 그대로 '저항하는 육체'를 매우 강성한 어조로 생생하게 현시하고 표상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대사가 많지않음에도 이만큼 선동적인 영화가 또 있을까.   

저녁엔 <500일의 섬머>를 두번째 봤다. 국내개봉이 예정되어있고 미국에서의 반응이 좋아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국내에도 이 영화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던데 영화 속 섬머를 두고 나레이션이 하는 말처럼 내가 보기에는 just a movie였다.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섬머가 아니라 톰이고 섬머는 영화내내 하나의 대상으로서 타자화되어있다. 그녀의 내면이나 속내를 파악할 길은 없고 그저 500일동안 톰이라는 남자가 어떻게 혼자 북치고 장구치면서 자기만의 판타지를 만들고 또 허물어가는지 지켜본다. 어렸을적 <졸업>을 본 이후 운명적인 사랑의 신봉자가 된 그는 어느날 사장의 새 비서로 고용된 섬머를 보고는 바로 저 여자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고는 연애를 시작하지만 결국 헤어지고만다는게 기본 줄거리. 18세기 이래로 지속되어온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인 하늘이 정해준 단 하나의 연인이라는 로맨티시즘을 견지하는 톰은 섬머와의 이별을 통해서 간신히 그 개념을 버리는가싶은 반면, 오히려 그것에 회의적이었던 섬머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되면서 '운명적 사랑'의 신봉자로 거듭남으로써 톰의 너무 늦은 사춘기가 일단락짓는걸로 영화가 끝나는가 싶지만 에필로그에 오면서 모든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 영화를 내가 아는 몇몇 지인들에게 추천해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이 영화에서 단순한 레퍼런스 이상으로 기능하는 미국 대중문화, 특히 영미권 팝음악과 영화 <졸업>의 의미 때문에 선뜻 추천이 꺼려졌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노래와 뮤지션이 각 장면에서 갖는 의미와 미국인들에게 <졸업>이란 영화가 갖는 상징성을 사전에 알지못한다면 이 영화를 어쩌면 반도 이해못한거라 할 수 있기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실로 저열한 취향을 갖고있는 내 주위의 어떤 이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다고 치자. 톰과 그의 친구 매켄지 그리고 섬머가 대화를 하는가운데 섬머가 지나가는 말로 자신이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좋아한다고 하고나서 잠시 뒤에 화면이 바뀌면 매켄지가 술에 취해 가라오케 기계를 붙잡고 born to run을 부르고, 그리고 마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듯 톰이 픽시스의 here comes your man을 부르고, 스미스의 there is a light never goes out과 please please please, 아니 그 이전에 스미스라는 밴드의 특징 그리고 톰이 조이 디비전의 <unknown pleasures>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우울한 영국팝을 여전히 사랑하고있음을 보여준다든지 하는걸(그리고 무엇보다 패트릭 스웨이지의 she's like the wind가 있다.!) 내가 계속 옆에서 말해준다면 과연 그 저열한 취향의 소유자는 가만있을까. 시끄럽다면서 나보고 짜증을 내거나 영화관람을 중간에 그만두고는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강변하겠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전혀.

심야에는 ebs에서 앨버트 피니가 스크루지로 나오는 70년작 <크리스마스 캐롤>을 해줬다. 근대 잉글랜드(그러니까 빅토리아시대 정도쯤)를 배경으로한 사극을 볼때마다 특히 bbc에서 만든 드라마들을 볼때마다 실로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데 도대체 그 실체가 뭘까하고 생각해봤다. 조선을 배경으로한 사극을 볼때는 그렇지않은데 말이다. 그러고보니 앨버트 피니도 참 장수하는 배우구나하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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