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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내 것인적없는 단어들이 있다. 근면,성실,자본,권력,스타크래프트,여름휴가,당구,클래식,비만등등, 더이상 밝혔다가는 자학증세가 어디까지갈지 장담할 수 없어서 그만둬야겠다. 하여튼 이 단어들의 목록 속에 '고향'도 있다. 이 단어는 나에게 그 어떠한 감정과 기억과 이미지도 제공하지못하는데 세살무렵부터 지금까지 중학생때 이년여를 제외하곤 줄곧 한동네에서, 그것도 삭막하기그지없는 아파트단지에서 거주하고있는 사람에게 고향이란 단어는 그러니까 알래스카 여행이나 비시스와즈나 마찬가지다. 도저히 그게 뭔지 감도 못잡는거다. 고향이요? 서울이에요 라고 말할때마다 오답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닌듯한 어색함이 휙하고 지나가는, 그렇다고 억울하다거나 불편하다고 느낀적 역시 한번도 없지만.

그래서 향수병이란게 뭔지도 나는 잘 모른다. 밤에 침대에 누우면 고향의 공기가 느껴지고 동네입구가 떠오르고 부모와 친구들과 지나간 옛시절이 떠오르는 뭐 그런건가하고 어렴풋 짐작만할뿐인데 군대시절에도 이런걸 느껴본 적은 기억을 더듬더듬해봐도 없는 거 같다. 이럴땐 무심하고 무감각하고 무던한 성격이 좋은건지아닌건지 잘 모르겠다.(그러니까 군대에서는 명령된 프로그램처럼 그냥 무조건 집에만 가고싶다는 강박이 있을뿐 딱히 집이 그립다는 식의 향수는 아닌 것 같다는 말씀. 세상에 집에 안가고싶은 병사가 어디있을까만 무조건적으로 집에 돌아가고싶은 마음과 향수병은 그래도 뭔가 좀 달라야하지않을까.)

타르코프스키는 <노스탤지어>에서 향수병을 지극히 시적인 이미지로 한가득 펼쳐놓았었다. 그곳에선 시간도 다르게 흘러가고 공간은 현실로부터 살짝 떠올라 천천히 부유한다. 이런 시각적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는 고향이 있다면 역시 가장 대중적인 고향의 기억은 원형의 공간이라는걸거다.

<가든스테이트>를 보고있으면 자연스레 이 영화보다 일년뒤에 나온 <엘리자베스타운>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일단 영화의 대략적 시놉시스만 놓고보면 두영화는 흡사 판박이에 가깝다. 부모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에 돌아온 남자주인공, 객지에서 고생하다 실의에 빠진 이 남자들은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인생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된다는 얘기. 배우들은 모두 선남선녀에다가 공교롭게 두 영화 모두 잘 선곡된 컴필레이션 ost를 가지고있다는 공통점까지 있다.    

고향. 그곳에가니 잊으려 노력했던 자신의 지난 과거와 치부를 인정하고 타인의 죄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고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가족과 화해하고 덤으로 연인까지 얻다니. 오라! 고향은 좋은 곳이로구나. 그럼 내가 이모양인건 고향이 없어서였던건가? 고향없는 자의 설움은 계속된다. 고향에 돌아간 주인공 앤드류는 그동안 평생 먹어왔던 약도 끊고 옛친구를 만나서 신나게 수다도 떨고 이상한 모험도 하면서 옛시절을 추억하고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향을 자의대로 상상하고 재구성하고있지는 않을까? 그곳엔 내가 진정 잊고싶었던 어리숙하고 욕심만 많고 능력은 없는데다 촌스럽기가 말도 못하던 내가 있지않았나? 그곳엔 다시는 얼굴 마주보지않으리라 생각하며 떠나왔던 부모와 나를 괴롭혔던 친구 아닌 친구와 내 부끄러운 치부를 모조리 알고있는 첫사랑 그녀가 아직도 살고있지는않은가? 그리고 그곳엔 이제는 기억나지도않을만큼 멀어져버린 젊은 시절의 꿈도. 그것들과 마주하게되기가 싫어서 우리는 쉽사리 고향으로 돌아가지않는다. 그냥 쉽게 명절을 떠올리면 된다. 일년에 두어차례 명절이라 불리는 연례정기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친척이란 이름의 그 사람들. 내가 학교에서 몇등을 하는지, 올해 연봉은 얼만지, 지금 사귀는 사람은 있는지, 결혼은 언제하는지 등등. 뿐만아니다. 그곳에선 꼭 어릴적 내 실수들이 빠지지않고 등장한다. 나하나 우스개가되어 즐거워지는 그곳. 군인들도 안에있을때는 늘 집에만 돌아가면 만사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간인보다 말년병장이 더 편하다는, 현역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고 실제로도 말이 안되는 이 역설중의 역설도 그러나 역설로서의 일말의 진실을 갖고있다.

가든스테이트와 엘리자베스타운의 주인공들은 모두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중산층 마을을 고향으로 두고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선량하고 이상하게 그의 옛친구들은 도시로 안떠나고 모두 고향에서 한자리씩하면서 마치 기다리고있었다는듯 웃으며 맞이한다. 게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새 여자친구까지 생긴다. 처음엔 부모와 약간 삐걱대지만 심각한건 아니고 몇마디 대화를 통해 화해한다. 나도 이런 고향하나쯤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언제나 쉴 수 있고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고 다가올 내일을 힘차게 계획하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지금까지 고향이 없는 남자의 고약한 투정이자 질투였다. 진심이다. <스크럽스>의 그 젊은이가 이런 따뜻한 영화를 만들 줄 몰랐다. 그리고 나이든 카메론 크로우의 <엘리자베스타운>보다는 훨씬 디테일하고 더 공감이가는 귀향기였다. ost 선곡도 훨씬 내 취향이고.

가장 맘에 들었던 장면. 음악과 화면이 멋지게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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