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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자유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이면서도 낯선가. 실패할 자유란 곧 실패할 권리라는 말이겠지만 권리를 챙기겠다며 일부러 실패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그렇다면 이는 실패해도 무방한 자유, 즉 실패해도 다시 주어지는 기회의 보장을 뜻하는 걸텐데 작금의 자본주의 하에서 낭만적으로 들리기는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틀릴 자유'란 것도 있을까. 즉, '틀리는 실패를 저지르고도 계속 주어지는 기회'라는 것도 있을까. 『다케우치 요시미: 어느 방법의 전기』를 읽으면서 든 의문이다. 연이은 '말실수'와 '예측 실패'에도 불구하고 공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던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해 저자 츠루미 슌스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서 다케우치의 예언은 예견이나 예측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난 '예언자'의 예언이다. 그 어긋남은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도 전후 일본의 고도 성장에 대해서도 다케우치의 발언을 따라다녔다. 79p

대동아전쟁의 예측에 실패했으니 전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길을 택하지 앟았다. 전후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예측하는데 실패했으나 그 실패를 인정하며 중국에 대해 평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69p

듣는 이의 기분과 인격을 거스르지 않아야하고, 온갖 특수성과 상대성을 존중하느라 표현의 자유의 경계를 늘 의식해야하는 현 시점에서 한 번의 필화 때문에 두 번째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줄어드는건 문필가 또한 다른 직업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패전 후 일본의 논단이 지금보다 덜 각박했을지 몰라도 더 낭만적일 것도 없으리라 가정한다면 다케우치가 그럼에도 공적 지면상에서 '계속 말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츠루미는 다음과 같이 다케우치를 인정한다.

만년의 평론집에 <예견과 착오>라는 제목을 단 것은 자신의 예측이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도, 중국혁명 이후에 대해서도 불충분했다는 자기 인정을 포함한다. ... 자신의 예측이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매번 현재 위치에서 측정하고 인식하기를 거듭한다. ... 이를 일러 나는 '실수의 힘' 혹은 '실패의 힘'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 판단을 떠받치는 냉정과 용기의 조합에 나는 감동한다. 195p

 

한 사람의 일생을 시간 순서대로가 아닌 특정한 소주제에 맞춰, 그마저도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일간지 컬럼 분량의 소주제 하에 쓰인 글들이 묶인 낯선 '전기'의 형식은 다케우치가 썼던 어느 글의 제목을 차용한 이 책 어느 방법의 전기』야말로 '어느 전기의 방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방법이 이렇다면 '태도'는 어떨까. 다케우치를 바라보는 츠루미의 시선은 상기 인용에서 보듯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며 그 핵심엔 '쩡짜'라는 개념에 비추어 글과 삶에서 펼쳤던 다케우치의 분투에 대한 인정이 있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의 고뇌와 시련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감수하고 대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쩡짜'(이 책에서는 '저항'의 뜻으로 번역 및 소개하고 있다)는 보다시피 엄밀한 사회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문학적인 접근인데, 인물의 명암을 모두 조명함으로써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는 전기라는 형식에서 츠루미가 행한 이런 접근법이 옳으냐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전기의 대상인 다케우치의 평론부터가 문학인의 입장에서 행한, 문학적 시각에 의한 전중 및 전후 일본 사회 비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다케우치의 그토록 연이은 '예측 실패'와 '착오'의 원인도 현실 비판에 요구되는 객관적 시각과 엄정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결여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쩡짜'는 그러한 결여를 상쇄하고 보충할만한 개념이 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곧 이 책에 대한 판단의 핵심에 자리한다.

 

우선, 다케우치가 대동아전쟁을 긍정한 것을 넘어 거의 선동에 가까운 '선언'을 하게된 데는 중국문학자로서 어쩌면 피하기 어려웠을 중국 편향이 있었다고 쓰루미는 설명한다. 

강하고 풍족한 미국에는 양보하면서 약하고 궁핍한 중국은 거세게 밀어붙여 이권을 취한다는 다이쇼 이래 일본국의 행보가 줄곧 혐오스러웠는데, 마침내 일본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맞서겠다는 자세를 확실히 표명했기에 일거에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112p

중요한건 다케우치가 전후가 되자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를 마치 쓴 적 없었던 것처럼 사장하거나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스스로 직접 상기했다는데 있다. 이 점이 다케우치를 바라보는 츠루미의 관점 및 태도를 결정짓게 되는데 다케우치가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 "이 전쟁에서 국민이 자진해서 싸웠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자기검증이라고 츠루미는 일차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자기검증의 차원을 넘어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가 가진 한계를 돌파하려는 다케우치와 츠루미의 사상적 분투가 있다고 이 책의 부록에서 쑨거는 해설한다. '정확-착오'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한 '순백의 장소'는 현실에서 부재하고 그래서 현실의 우리에게 쥐어진 건 명확하지 않은, '응보가 없는' 복합적 선 뿐이다. 다케우치가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고뇌와 몸부림, 바로 그 쩡짜를 츠루미 또한 다케우치를 읽어가면서 행했음을 쑨거는 인정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올바름'의 기준 자체를 의심하는 다케우치의 (사상적) 자세이자 윤리의 준거틀은 그러나 일본의 과거 식민지의 독자인 나로 하여금 일견 주의하게 한다. 다케우치가 말한 '의심을 의심함으로써 얻는 믿음'을 따라 또 한번 의심하면서 계속 읽어보자. 

 

'국민문학론'과 함께 전후에 다케우치가 제창한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이다. 실재하는 지리적 대상이 아닌 하나의 개념으로서 '아시아'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구로부터 침략당하고 이에 저항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질문은 바로 여기서 제기된다. '아시아 해방을 위해 연대한다'는 대의까지는 동의한다하더라도 왜 현실에서 그 방식이 그 아시아를 상대로 한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침묵하거나 모른척 하기는 다케우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해방과 연대를 위한 인접 아시아 국가의 강제합병과 침략이라는 모순을 모른 척 하기는 평전을 쓰는 츠루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록으로 실린 역자와 쑨거의 글이 이 딜레마를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두 편의 우수리들은 공통적으로 다케우치와 츠루미 두 사람을 'acknowledgement' 하는 것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연대의 한 방편이었다는 생각은 어쩌면 일본 내 진보적 지식인 진영 내에서조차 분명한 하나의 지류로 존재하는 듯하고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되는 사조의 한 갈래에 속하는걸까. 이러한 논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가.

애당초 ‘침략’과 ‘연대’를 구체적 상황 속에서 구별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
조선 문제를 보더라도 결과는 분명 ‘일한병합’이라는 완전침략으로 끝났지만 그 과정은 간단치 않다. 러시아나 청국의 ‘침략’에 함께 맞선다는 일면도 ‘사상’으로서는 없었다고 할 수 없다.<일본의 아시아주의>(1963),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2: 내재하는 아시아』 중에서 298p

그러나 아무리 에누리하더라도 그것이 아시아 나라들의 연대(침략을 수단으로 삼건 삼지 않건 간에)를 지향했다는 공통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ibid, 302p)

전후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1963년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침략과 연대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계속되는데 대해 분노하기에 앞서 어쩌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위의 문장을 보면서 들었다. 침략을 수단으로 써서(라도) 연대한다는 논리가 전전 전중 전후를 관통하며 이토록 오래되었다면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국가의 독자로서 생길 수 밖에 없는 감정을 넘어(어쩌면 더욱 더) 그 연원과 성립 과정 및 변천을 유심히 살펴봐야하는게 아닐까. 이들은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이러한 도착된 논리의 전후 버전이자 잠정적 결정판이 바로 다케우치식 아시아주의가 아닐까.

“전쟁에 패하면 아시아의 식민지는 해방될 수 없다는 천황제파시즘의 슬로건을 나름대로 믿고 있었다. 또한 전쟁 희생자의 죽음도 무의미해지리라고 생각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다카무라 고타로>, 『어느 방법의 전기』 중에서 145p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근대화는 몹시 눈부신 대목이 있습니다. 뒤처지고 식민지로 전락한 동양의 여러 나라에 해방운동을 촉진하기도 했지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1961),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2: 내재하는 아시아』 중에서 40p 

 

아시아를 침략할 때 제국주의 일본 국가의 의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가공, 재구성 및 자기 식으로 변주해서 받아들인 일본 국민들이 있으며 그들을 일률적으로 군국주의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고 츠루미도 말을 보탠다. 이렇듯 '아시아 해방' '아시아와의 연대' '아시아주의' 등을 주워올리는 이러한 이상주의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여기에 조선과 대만 식민지 사정이 시야에서 배제되어 있음은 한결같다. 바로 이 불구의 이상주의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을 이해하려 할 때 염두에 둬야할 또 한 가지는 아닐까.

 

서구로부터의 독립과 해방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으로 유추해보건대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처럼 보이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시에 아시아주의라는 연대의 꿈을 버리지 않은 것, 즉 유럽적 근대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아시아주의라는 '미완의 꿈'을 희구했던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지도한 이들 및 그들이 벌인 일과 묘하게 굴절되어 겹쳐보인다. 작금의 포스트 글로벌 시대에서 서구와 대립하며 아시아가 연대해야 할 당위가 있을까. 있다면 그 명분은 뭘까. 지난 몇 년 간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민국가가 당차게 돌아왔다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 이전에 있었던 브렉시트에서 보듯 세계는 블록화되는 가운데 동시에 잘게 분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과 서가 대항하면서 역사가 발전했다는 제국주의 시절의 사관은 아직도 아시아주의라는 미완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2

애초에 이 글은 츠루미 슌스케가 쓴 평전의 서평을 목표로 했기에 다케우치 자체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피하려 했으나 읽으면서 본서만으로는 애초의 의도를 충족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국내에 번역된 다케우치 선집 두 권을 같이 참조했다. 그 결과 다케우치가 그토록 예측 실패와 말실수를 거듭한건 츠루미가 주장하듯 과거의 실패로부터 미래의 가능성과 단초를, 실마리와 유산을 길어올리는데는 기여했을지는 모르나 그 이전에 거의 모든 구설이 그러하듯 발화자 본인의 식견과 비전이 짧은 것이 그 실패와 말실수의 직접적 원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전후에 일관되게 비판한 '근대주의'는 곧 다케우치가 협량한 민족주의자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하며 자기자신의 과실을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는 사상가이기 이전에 글쟁이로서의 책임감(혹은 윤리라고 해야할까)에 의문을 갖게 한다. 이를테면 다음 대목을 보자.

대동아전쟁은 세계사를 다시 썼다고 일컬어진다. 나는 그 말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믿고 있다. 대동아전쟁은 근대를 부정하고 근대문화를 부정하고, 그 부정의 끝 간 데서 새로운 세계와 세계문화를 자기형성해가는 역사의 창조활동이다.
<《 중국문학》 폐간과 나>(1943),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1:고뇌하는 일본』 중 75p
인용하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1941년부터 1942년의 지적 분위기를 지금 복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 개전을 예찬한 일은 “지적 전율”이기는커녕 지적 혼란이자 지성의 완전한 방기가 아니었을까. 도대체 어찌하여 그런 일이 지식인 사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던가. 그 사정을 설명하기란 정말이지 어렵다. <근대의 초극>(1959) 중에서 (ibid, 131p)

서로 다른 두 편의 글에서 따온 인용이다. 16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문장 간의 태세 전환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 사정을 설명하기란 정말이지 어려"울까. 우선 본인의 사정부터 하나씩 설명하면 되는게 아닐까. 전자를 모른 척하는 후자의 인용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의아하기만 했다. "1941년부터 1942년"이 아닌 그 이듬해인 1943년에 발표한 글이라 미처 깜빡 잊은걸까.

나는 대동아문화가 자기보전문화를 초극할 때에만 구축된다고 믿는다. 우리 일본은 관념으로는 이미 대동아지역의 근대적 식민지배를 부정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이 한없이 옳다고 믿는다. 식민지배의 부정은 자기보존욕의 포기다. 개체가 다른 개체를 수탈하여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스스로를 부정하여 다른 개체를 품는다는 입장을 자기 안에서 생산해내는 일이다. 수탈이 아닌 나눔으로 세계를 그려야 한다.
<《 중국문학》 폐간과 나>(1943)중에서 (ibid ,71p)

식민지배가 한창이던 1943년에 발표한 글에 나오는 "우리 일본은 .... 이미 대동아지역의 근대적 식민지배를 부정하지 않았던가"라는 이 문장은 대체 무슨 뜻일까? 자기기만이 아니라면 이런 문장은 아예 처음부터 조선을 시야에 넣지 않아야만 쓸 수 있을 것이다. 위 인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궁금하다.  

'근대의 초극'이라는 문제는 아무래도 전쟁의 재해석 내지 재평가와 함께 다뤄져야함을 (......)
가메이는 ... 중국(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만을 떼어내 그 측면 혹은 그 부분만 책임지자고 말한다. 이 점만큼은 나도 가메이의 사고방식을 지지하고 싶다. 대동아전쟁은 식민지 침략전쟁인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한 전쟁이기도 했다.
<근대의 초극>(1959)중에서 (ibid, 141p)
아시아에서 지도권을 주장한다는 것과 서구근대를 ‘초극’한다는 국민적 사명, 그 속에 내재된 원리적 배리가 이 책에서는 ‘일본은 서구’라는 관점의 조작을 거쳐 단순명쾌하게 전자만 살려내고 후자를 버리는 형태로 해결되었다. … 일본은 애초 아시아가 아니었다고 이들 신문명개화론자는 주장한다. (ibid, 182-183p)

대중국 전쟁은 침략전쟁이지만 대미국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기에 둘을 분리해서 봐야한다는 주장이다. 아시아에서의 지도권 행사와 서구근대를 초극한다는 사명이 과연 '원리적 배리'일까. 일본은 아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만이 아니었고 실제로도 역사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일부의 '주장'만이 아니었다. 서구근대의 초극이 아시아 지도권 행사를 위한 허울뿐인 명분이었던 현실은 어느새 잊혀지고 그 원리만은 존중해야한다는, 전후이기에 나올법한 논리는 그러나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관점의 조작을 거쳐 한 쪽만 살려낸 게 아니라, 일본의 아시아 지도권 행사가 곧 '아시아'가 서구근대를 초극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고 서구근대를 초극한다는 목표는 다시 일본이 아시아를 이끌어야한다는 명분을 떠받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즉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었지 '원리적 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그럼에도 여전히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했던 '의도'는 인정해야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다면 국제관계에서 (선한) 의도를 따지는 일만큼 무용한 일도 없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개인도 아닌 국가공동체를 의인화해 '의도'를, 그것도 겉으로 드러난 결과와 전혀 상반된, 그래서 검증하기 더욱 어려운 상대의 의도를 굳이 애써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의도와 관련하여 다음 인용을 보자.

 

"이것(「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을 다케우치 씨는 전후에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 시기 다케우치 씨가 써냈던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해방을 기치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도 일본이 식민화하고 있는 조선과 타이완을 해방해야 합니다. (……)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해 국가를 밀고 나가면 일본 국가는 부서집니다. 부서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가 다케우치 씨의 목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케우치 씨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파멸적 인간입니다. (......)
국가의 목적도 국가가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은 그 계기인 셈입니다. 그렇게 읽는다면, 다케우치 요시미가 전후에도 그 글을, <중국문학>을 통한 그 선언을 왜 철회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츠루미 슌스케, 「진보를 의심하는 방법」, 츠루미 슌스케·카가미 미츠유키 편, 『무근의 내셔널리즘을 넘어 - 다케우치 요시미를 재고한다』, 2007) (ibid 213-214p) (굵은 표시는 인용자)

안타깝게도 이 인용문의 출처인 『무근의 내셔널리즘을 넘어 - 다케우치 요시미를 재고한다』라는 책은 한국어 출간이 되어있지 않기에 저 인용문이 확인할 수 있는 전부다. 따라서 맥락에 유의하며 읽어야하는데 '그 시기'는 현재 주어진 저 인용문만으로 봤을 때는 전후와 전중 어느 쪽으로도 읽히는게 가능한데 아무래도 전중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그러니까 전중에 '대동아해방'의 기치를 내세운 글을 썼기 때문에, 즉 그러한 뜻을 이미 전중에 밝혔기 때문에 대동아전쟁을 찬양한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를 전후에도 철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그래서 "조선과 타이완을 해방해야한다"는 당위의 표현이 다케우치의 것인지 아니면 저 인용문을 쓴 츠루미의 것인지 판단이 쉽지 않다. 과연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중에 조선과 타이완의 해방을 희구했을까. 전후에 조선의 강제병합을 비판한 문장은 제법 있지만 전중에도 저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케우치가 조선에 관해 쓴 글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것도 다 전후에 나왔는데 그 중 한 편은 중국에 들어가기 위해 들른 조선에서 옛 친구들과 조우한 사적인 회고담이다. 강제병합을 안타까워하고 비판한 것도, 일본인에게 '조선어 학습'을 권하고, 조선인 친구와의 회억을 언급한 것도 모두 전후였지 전중이나 전전이 아니었다. 아시아주의를 구상하고 아시아 해방을 한창 논할 때는 언급이 없(거나 드물)지만 향수의 감정이 물씬한 사적 회고에서야 겨우 등장하는 것이 조선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케우치의 진심 혹은 진의를 의심케한 결정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용구의 유복자 이석규에게는 다이토 구니오大東國男라는 일본 이름이 있다. 아마도 ‘대동국大東國’을 기념하려는 것일 게다. 그는 <이용구의 생애>(1960, 時事新書)라는 책을 냈는데, 이는 오늘날 조선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거꾸러뜨린 안중근은 애국자로 칭송되지만 부친 이용구는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게 부당하다 여겨 그 오명을 씻겠다는 동기로 쓴 것이다. 정치적 판단의 실패는 실패로 인정하더라도 이용구의 오명을 씻는 연대의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으리라. <일본의 아시아주의>(1963),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2: 내재하는 아시아』 중에서 337p

이용구의 오명을 씻는 정도의 일을 무려 '연대의 책임' 이라고까지 한다면 그런 연대는 두 손 들어 거부해야한다. 연대를 상호대등한 주체간의, 공동의 목표 아래 행해지는 자발적인 상호협력 및 부조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과연 조선과 일본은 연대했는가. 조선에 대한 다케우치의 인식의 수준이 이 정도였기 때문에 아시아 해방을 그렇게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주창하는 논자마다 저마다의 '아시아주의'를 논한다는 다케우치의 말에 본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아시아주의는 본인의 의도에 상관없이 강성한 팽창적 민족주의자들의 명분으로 쓰이거나 쓰일 가능성이 크며, 거기엔 너른 눈으로 상상한 균질적인 하나의 인지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때로는 비가시적일정도로 차등하고 불균질하며 전세계적으로 보면 서양에 비해 상대적인 약자로서의 아시아라는 가상이 있을 뿐이다.

 

 

 

3

자신이 일단 선택하고 그 선택을 공표한 뒤 언제까지고 그 선택은 옳았다는 판단을 고집하며 자기 예언의 무오류를 가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를 출중한 사상가로 만들었다. 『어느 방법의 전기』중에서 124p
국민이 침략 전쟁으로 향하는 시기, 그 동향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자를 비난해선 안되겠지만, 자신은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굳이 나라와 함께 걷는다. (ibid 137) (굵은 표시는 인용자)

츠루미가 쓴 본서 속 인용문의 문맥을 확인하기 위해 참조한 선집 두 권을 읽으면서 다케우치 요시미가 과연 '출중한 사상가'인지 그 명성에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의 '실수'와 '실패'에 대해 츠루미가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평가하는게 아닌가라는 의심에 대해서는 외국인 독자와 자국인 독자의 시각이 충분히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실수와 실패에서 길어올린 지혜라는 이 전기의 핵심에 대해서조차도 위의 두번째 인용문에 이르자 의심은 더 굳어졌다.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굳이 나라와 함께 걷는" 것도 사상적 유연함일까. 아니 그 이전에 물어야 할 질문, 다케우치는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과연 알았을까. 사후의 지혜가 아닌 당시, 즉 전중의 시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상기한 두번째 인용문은 선집이 아닌 전기에서 발췌한, 즉 다케우치가 아닌 츠루미가 쓴 문장이다.

 

본서는 실패로부터 유산을, 현재로부터 미래를 위한 단초와 실마리를 길어올린다는 다케우치의 방법론, 이른바 '실패의 힘'을 상찬하는데 처음부터 초점이 맞추어진 나머지 평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균형 잡기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평전'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1959년 근대의 초극, 1941년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 1961년 주창한 근대문학론이 논단 내에서 어떻게 논의되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실패'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더욱 상세하게 그려졌어야 했다. 매우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 문화대혁명과 일본 고도성장에 관한 예측 실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다케우치의 이력과 지적 성취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선행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 책이 츠루미라는 또 한 명의(즉 1/n로서) 저명한 지식인의 시점에서 본 주관적인 인물론이나 논평으로서의 가치를 갖는지 몰라도 공과를 모두 참조한 끝에 인물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전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적이 불친절하고 불완전할 것이다(이는 모든 전기와 평전에 해당하겠지만).


전기의 대상이 생애 과정에서 맞이하게 된 사건들에 뛰어든 전개 과정, 그 행위 혹은 선택의 결과 그리고 일정 시간 이후 행해진 이에 대한 '평가'라는 세 요소가 전부 갖추어질 때 평전은 성립한다. 또한 '평전'의 '평'이란 전기를 쓰고 있는 저자의 평만이 아니라 당대에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세간의 평가, 이 책처럼 지식인인 경우 학계나 언론, 그리고 이른바 '논단'이라는 사상계에서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소개해야 그 사건이 당대에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고, 훗날 전기를 쓰는 현재 시점에서 저자의 평가가 여기에 덧붙여질 때 그 시차로부터 발생하는 대조와 비교를 통해 독자 또한 자신만의 관점을, 즉 '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본서의 분량이 너무 작고 단출한 것이 지금까지 언급한 단점들을 야기한 결정적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유럽적 근대를 단호히 거부하는 다케우치의 반反 근대주의 논법은 다분히 민족주의의 성향이 강하고 '국민문학론' 역시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 일본 지식인의 글에서 접하는 '해방으로서의 민족주의'란 언표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의 독자 입장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게한다. 우익적 아시아주의를 비판하기 이전에 '아시아주의' 자체를 상상하는 것에 내재한 한계를 직시하기란 어려운 일일까. 해방을 갈망하는 식민지 사정에는 눈 감은 채 서구로부터의 해방을 제창하고, 유럽적 근대를 거부하는데에서 전후를 헤쳐나갈 단초를 얻는 그러한 아시아주의는 메이지유신 이전, 장기 쇄국상황이었던 일본을 떠올리게한다. 일본은 늘 아시아의 적이었지 단 한번도 아시아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다며 비판한 이가 있었다. 제목부터 그러한 비판의 근거로 쓰이기에 충분해보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주도하는 팽창적 아시아주의의 진술로서 읽힐 수 있는데 이러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아시아주의가 여전히 미완의 꿈으로 남아있는한, 강성한 팽창주의의 이면에서 또 한번 애써 아시아의 패자(覇者)와 동반자를 나누고 분리하는 논법을 구사하는 지식인이나 사상가가 등장하지는 않을까. 역사의 반복은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구조의 반복이라던 누군가의 말은 그래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흥분과 불안을 동시에 야기한다.

1. 믹스셋, 믹스테입, 플레이리스트 등의 최대 장점은 일일이 선곡할 필요가 없고 흐름도 끊기지 않은 채 감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데 있다. 무엇보다 그런 실용적 측면 말고도 개별 곡들이 같은 무대 위에서, 그러니까 신곡과 구곡, 장르 등의 구분 없이 동등한 감상(내지는 평가)의 기회를 받는다는 것이 최대 장점인 것 같다. 숨은 곡의 재발견이란 것도 같은 말일텐데 그 뮤지션이 누구인지(남성인지 여성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등), 언제 나온 노래인지, 어느 나라 곡인지, 어떤 장르인지 같은 정보와 그에 수반된 일체의 선입견이 없이, '무지의 베일'을 가린 상황에서 리스닝의 기회를 얻는다. 처음 듣는 믹스셋의 수록곡은 대개가 태반이 모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발견의 즐거움과 더불어 생활의 배경 음악이 늘어남으로써 얻는 만족감이 크다. 산책을 하거나 단순 작업을 할 때는 그래서 새로운 믹스셋과 익숙한 믹스셋을 반반의 비율로 듣는다. 그래서, 어쨌건간에 직접 만들어본 믹스셋중 하나.

 

 

2.

옛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베테랑 편집자에게 "평론은 같은 판매 부수의 소설에 비해 열 배 정도 영향력이 있답니다. 열심히 하길 바랍니다."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이 특이하긴하다고 느낀 대목. 상황이 이래서인지 아즈마 히로키는 신인 평론가를 데뷔('등단'이 아니라) 시키기 위한 비평 컨테스트를 주최하고 그 특전으로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에 지면을 내준다. 동인지를 통해 데뷔하는 아마추어 평론가의 숫자도 많고 그중에서 프로가 되는 예도 많다고 하니 확실히 평론이 '읽히는' 사회라는건데 이런 풍토는 어떻게 가능한걸까.

1. The World of Henry Orient(1964)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센트럴 파크와 브라운스톤 건물들을 포함한 크리스마스 시즌의 60년대 뉴욕 풍경을 현재의 디지털로는 불가능한 색감으로 볼 수 있다. 계급도 가정 환경도 상이한 두 소녀가 친구가 되어 센트럴 파크에서 상상 놀이를 즐기다 의도치 않은 스토커가 되어 온 도시를 휘저으며 돌아다닌다. 그러다 이해하기 어려운 냉정한 어른들의 세계를 접하며 조금씩 성장하고. '온가족이 즐기는', 즉 어른과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즐길 거리가 있는 진정한 가족 영화. 60년대 노스탤지어와 함께.

 

2.Blast of Silence(1961)

살인을 의뢰받은 킬러는 타겟을 미행하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의 뉴욕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다큐멘터리적 접근과 스릴러물의 긴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의외의 재미를 주는 영화. 저예산 영화는 기발한 아이디어 자체만 남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b무비 답게 비록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장편 영화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다.

 

3. Black Christmas(1974)

온가족이 모이는 연휴 시즌에는 일부러라도 이런 영화를 봐 줄 필요가 있다. 최초의 슬래셔 무비라는 영화사적 의의와는 별도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보면 더 재밌는 장르물.

연휴에 채널을 돌리다 어떤 영화를 후반부쯤부터 보게 됐다. 그 중 한 대목. 유배중인 정약용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형 약전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책과 먹을 멀리하라는 당부를 전한다. 자연히 글을 쓰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각혈을 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던 그를 보며 그의 유배 생활을 돕던 아낙은 "제발 글 좀 그만쓰라"고 사정을 하지만 약전은 기어이 책상 머리 앞에서 붓을 손에 쥔 채 죽는다. 얼마나 전기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맞을 것이다. 직접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록하는 일에 그토록 열중했던 이유는 뭘까. 그간 갈망해온 세상을 개벽하는 일에 관한 것도, 유배당한 처지에 울분을 호소하는 것도, 평생동안 궁구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것도 아닌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얻은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데 그처럼 진을 쏟은 이유는 뭐였을까. 아마도 그렇게 써낸 것이 쓰지 않은 저 모든 것들의 대체재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라도 뭔가 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글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러나 결국 글쓰기는 죽음이다. 오컬트한 미신도, 살인의 도구라는 장르물의 설정 놀음도 아니다. 말그대로 글쓰기는 곧 죽음이다. 가장 수명이 짧은 직업군 중 하나가 기자와 소설가, 시인같은 글쟁이라는게 만국공통임은 주지의 사실이건만 그럼에도 쓰는 사람은 쓰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글을 쓰다가, 아니 글만 쓰다가 붓을 손에 쥐고 죽기도 한다. 그걸 저주라 볼지 숙명이라 볼지는 관점의 차이일테지만.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마다 언제나 내게 당혹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문인들의 끔찍스러운 끈기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이 악덕에 빠진 자들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여도, 심지어 켈러가 말했듯 나날이 바보천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중년의 위기가 찾아와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큼 절박한 바람이 없는 때에도 그 악덕을 계속해서 실천한다. 루소는 생피에르섬의 피난처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상념을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죽을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뫼리케 또한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게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자기 소설을 고치고 또 고쳤다. 켈러는 문학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치기 위해 쉰여섯의 나이에 공직에서 사임하기까지 했다. 발저는 스스로를 이른바 금치산자로 만듦으로서써만 비로소 글쓰기의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그는 발저가 문학을 완전히 등졌음에도 여전히 조끼 호주머니 속에 몽당연필 한 개와 별도로 잘라 낸 메모지들을 늘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자주 적어넣곤 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발저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끼면 마치 나쁜 짓이나 심지어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언제나 부리나케 메모장을 주머니에 다시 감췄다고 베를레는 덧붙였다. 아무래도 작가들에게 글쓰기라는 것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답이 없는 일 같아 보여도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둘 수는 없는 그런 일인 것 같다. 글쓰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내놓을 수 있는 근거란 아무것도 없으며, 따르는 보상 또한 적다.

 
『전원에 머문 날들』(2021)에서 제발트는 불운한 재주로서의 글쓰기 운명을 짊어진 작가들이 세속을 피해 자연으로, 전원으로 파고들었던 한 시절을 다루고 있다. 실재인지 허구인지 모호한 그의 소설 속 등장 인물들처럼 그 자신 또한 염세적인 한 명의 작가로서 공감하는, 무작정 뭐라도 써야만하는 그 글쓰기 욕망에 대해 이번에도 제발트는 예의 긴 혼잣말하듯 행갈이 없이 글을 밀고 나간다. 보상이 전무한, 시간이 흘러도 타인에게 겨우 몇 줄 읽힐까 말까한, 공감이나 이해는 커녕 타박이나 안 받으면 다행인 그러한 글쓰기를 말하는 작가는 또 있다.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 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비록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강박을 느꼈지만 아무리 봐도 내 딸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조앤 디디온, <노트 쓰기: 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중에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2021) 189pp

 
자기 자신을 닮은, 그래서 피하려고 해도 그렇게 쓸 수 밖에 없는 글쓰기.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이런 글쓰기에 어떤 실제적 효용이 있는건 아닐까. 그래서 쓸 수 밖에 없는게 아닐까. 그럼 그 효용은 뭘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나는 글쓰기라는 매우 거대한 의무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런 의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무감이 당신에게 고지되고 알려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 그렇게 하듯이 작은 분량이라도 글쓰기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큰 불안이나 큰 긴장을 느낀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에 우리가 자신에게 부과한 이 작은 분량을 쓰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일종의 사면을 행하게 됩니다. 이 사면은 하루의 행복에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행복한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기에 달려 있으며 약간은 다른 어떤 것, 곧 실존의 행복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이고, 매우 수수께끼 같은 일인데, 바로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다지도 허무하고 허구적이며 나르시시즘적이고 자신을 향해 침잠하는 이 몸짓, 다만 아침나절을 할애해 탁자에 앉아 빈 종이 몇 장을 채우는 이 몸짓은 어떻게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대한 축복이라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직업, 허기, 욕망, 사랑, 성, 노동과 같은 사물의 실재가 아침나절 동안 또는 하루 중 어느 때인가 글쓰기를 했다고 해서, 변형될 수 있는 것일까요? 자, 이것이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일입니다. 어떤 경우든, 내게는 이런 일이야말로 내가 글쓰기의 의무를 느끼게 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

이것은 당신이 보다시피 즐거움이란 없는 의무지만, 결국 의무로부터의 도피가 당신을 더 큰 불안에 빠뜨리고 법의 위반이 당신을 더 큰 불안정과 방황에 빠뜨릴 때,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은 사실은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요? ... 이러한 의무에 복종한다는 것, 의심의 여지 없이 나르시시즘적이며, 당신을 짓누르며 사방에서 당신을 압도하는 이 법에 복종한다는 것, 이것은 다름 아닌 글쓰기의 즐거움입니다.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는 물론 내게 글쓰기가 매우 피곤하고 어려우며, 또 불안을 몰고 오는 일임을 의미합니다. 나는 늘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물론 나는 무한히 어긋나고, 실패합니다.

미셸 푸코, 『상당한 위험』(2021) 중에서

올해 eidf에서 본 이 다큐는 1995년 옴진리교 테러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교단명을 바꾼채 지금도 여전히 운영중인 동일 단체의 간부, 즉 감독에게는 가해자 편에 속한 한 남자와의 짧은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감독 사카하라 아쓰시는 사건 발생 후 삼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테러의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하고 당시에도 이미 신자였던 아라키 히로시는 자신들이 일으킨 사건의 크기와 영향력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신앙'을 놓지 못한 채 지금도 집단 생활을 하며 단체를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의 여행은 그래서 선뜻 가능할까 싶지만 의외로 담담하게 시작된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피해자-가해자 관계라기보다는 얼핏보면 오래된 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카하라가 상대를 비난하거나 힐난하는 식으로 대하지 않고 어떻게든 우호적 관계 속에서 대화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제로 비슷한 나이대에 같은 지역 출신에 같은 대학(이는 확실치 않다)을 다녔던 공통점도 있는데 고향에 내려가서 서로 공유하는 기억의 접점을 확인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재 처한 각자의 상반된 입장과 삶의 이력으로 인해 역설적 비극성을 재현한다.

 

경계심을 풀게 하는 첫인상을 가진 감독 사카하라는 시종 농담을 섞어가며 아라키와의 거리감을 좁혀가려고 하는데 이러한 그의 대인 접근 방식은 동시에 이 다큐 전체의 영리한 플롯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 사이에 사카하라는 아라키에게 진짜 묻고 싶었던 회심의 질문들을 던진다. 사건 발생 이후 지금껏 계속 품어왔을 질문들, 이를테면 당신들이 벌인 테러의 궁극적 동기는 무엇인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아직껏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했다, 당시의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져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고 여러 ptsd에 가정까지 파탄나버린 나는 그렇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대화 전략이 영리한 이유는 작품의 전체 플롯 자체가 이 대화 방식과 유사해서, 처음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이하는 여행이라는 설정에서 연상되는 일말의 (말초적) 흥미를 유발하는 것으로 시작해 '호객'에 성공하지만 점점 뒤로 가면 갈수록 내용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맨마지막에 이르면 갈등과 긴장이 최정점에 달한 지점에서 바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의 근원은 결국 감독 사카하라가 아닌 인터뷰이 아라키에게 있다.

 

사카하라가 타인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하는 인상이라면 길고 마른 체형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관하는 아라키 또한 관객의 선입견을 유발한다. 하지만 사카하라에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영민한 이가 아라키였음을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또렷하게 보여준다. 아라키는 사카하라의 회심의 질문에 번번이 피해가면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화법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사실상 대답을 거부한다. 진실 규명과 우호적인 여론 형성이라는 서로간의 상충하는 목표가 확실한 저널리스트와 인터뷰 대상의 관계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허위성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재닛 맬컴의 주장(<기자와 살인자>, 2009)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 가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아라키는 빛바랜 필통 이야기를 꺼낸다. 요지인즉슨 어릴 때 친구들이 갖고 있던 필통이 너무 부러워서 자신도 구입을 했는데 정작 그 이후부터 왠지 모르게 이전에는 반짝반짝 빛나던 필통이 평범해보였다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속한 단체 혹은 아사하라 쇼코를 향한 양가감정의 우회적인 고백으로 읽힐만한 대목이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속내를 토로하는 대신 간접적으로 유추해내야하는 말을 계속하는 모습에서 명문대 대학원까지 다녔던 아라키의 이지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즉 그의 이런 말들은 유의하며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슷한 얘기는 또 있다. 그는 자신이 옴진리교에 몸담게된 동기 중 하나로 동생이 골육종 진단을 받았던 일을 든다. 다행히 다른 병원에서 또다른 진단을 받고 치료도 잘 되었으나 그 이후부터 정작 자신의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앞의 것보다도 더 잘 짜여진 대본처럼 들린다. 테러 사건으로부터 자그만치 25년의 세월이 지나는동안 아라키는 직접적인 사법적 책임을 면피할 목적은 아니더라도 옴진리교에 투신한 동기를 묻는 질문에 무수한 자문자답을 해봤을 것이다. 의도적이건 그렇지않건, 타인의 책임 추궁에 대비하기 위함이건 아니면 자기자신에 납득하기 위함이건 간에 여러 가지 답변을, 아니 답변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어봤을테고 동생의 투병기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야기를 지었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러니까 세뇌나 강압이 아니라 다른 일반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실존적 고뇌를 종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자의에 의해 선택했다는 방어적 변론을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 에피소드 내지는 전략이라는 힐난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합리적으로 이해해보려 애를 쓰기 마련이다. 그저 불운했거나 우연일 뿐이라는 답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여러 방향에서 그 원인을 생각해보게 마련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진실이라 굳게 믿기도 한다. 합리적인, 그러니까 언어로 진술할 수 있는, 나를 포함한 타인에게 언어로 진술하고 제시함으로써 설득시킬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설명이 '이야기'이고 서사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자문하고 자성하는 과정에서 완성된 '이야기'라고해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거나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대개는 뒤늦게, 때를 놓친 뒤에 찾아오게 마련이므로. 설사 그것이 타인에게 전혀 이해받을 수 없는 나만의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한마디로 시간은 진실의 감가상각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같은 증언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빙성을 더욱 의심받으며 그 가치를 잃어간다. 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를 폄하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진실 규명이 더딜 때 인간은 나름의 대응과 적응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건 흔한 상대주의적 주장들, 그러니까 저마다의 진실'들'이 난립한다는 데 있지 않다. 갈등하는건 진실'들'이 아니라 진실의 크기를 또는 그 실체를 감당할 수 없어서 또는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 아예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하거나 혹은 못하는, 그리고 심지어 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이다.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을 때 관련된 개인들 각자가 겪는 내적 혼란이란게 어떤 것인지, 이 다큐의 두 인물이 보여주고 있는건 바로 이것이다.

서로 교감을 하는듯 보이다가도 다시금 서로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거리가 멀어지는 패턴의 반복은 극영화에 못지않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런 패턴의 절정은 단연 본편 전체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한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이다. 기자들을 미리 불러놓고서 두 사람은 최초 테러가 발생했던 도쿄의 지하철 역을 직접 찾는다. 거기서 아라키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노회한 정치인의 전형적인 화법, 즉 유감은 표명하지만 사죄는 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초반부에 사카하라에게 했던, 교주가 지금껏 사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서는 어떤 분명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말을 기자들 앞에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준비해둔 차를 타고 빠져나와 다시 둘만 남은 상황에서 사카하라가 입을 연다. 아까 뭔가 다른 말이 나올까하고 기대를 했다고.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를 저버린채 아라키는 이번엔 아예 입을 닫는다. 종교나 여타 신념을 배제한 자연인으로서 갖는 심정과 투철한 종교인의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듯한 그의 모습은 뭔가를 크게 두려워하거나 또는 모종의 어떤 이유로 인해 진실 규명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나의 신념에 헌신했던 지금까지의 인생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이 두렵지만 동시에 죄의식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두 양태의 불안정한 공존은 아라키의 야윈 얼굴과 시종일관 불안한 눈빛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여전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이제는 뭘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듯한 사카하라의 난처한 표정.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조문을 보여주는 오프닝을 통해 비판적 의도를 표명했지만 정작 본편에서 주로 보이는건 법과 자유 같은 추상적 관념보다는(아사하라의 사형과 관련된 뉴스를 빼면 이 작품에서는 국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개인들의 절절함이었다. 아라키는 입으로만 사과를 말하는 위선자일 수도 있지만 죄의식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신경증 환자일 수도 있다. 사카하라 또한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눈 앞에서 보며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일 수도 있지만(마지막까지 보면 아라키를 포함한 '알레프'에 대한 사카하라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 이전에 아직껏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피해자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 채 맞이한 엔딩. 살아남은 이들은 여전히 세상과 불화하는 가운데 자기자신과도 계속 싸워야 한다.

인터넷상의 '확산'이나 '염상' 혹은 '리벤지 포르노'나 개인 정보 폭로 같은 일들은, '자기 표출 거리'가 없는데 그 도구와 '억압'은 존재하기 때문에 상습화된다. 말할 것이 없는데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억압화된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자기 표출'은 지극히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가 될 수 밖에 없다. '감동'이나 '혐오' 즉 '눈물난다'나 '혐XX'(이 'XX'에는 '중국' 요즘이라면 심지어 '오키나와'도 들어가곤한다) 등과 같이 너무나도 척수반사적인 감정 토로가 파블로프의 개만큼이나 인터넷상에 언어화되어 있다. '감정'의 표출에 논거나 묘사 따위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중에서, 78p

어쩌면 모든 갈등은 저 간단한 이유에서 기인하는 지도.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말을 하라고 판('플랫폼')은 깔려 있는 상황. 그래서 저마다 뭐라도 한마디 보태려 안달이 나있는, 그래서 불특정한 타인의 말과 새된 목소리를 싫어도 계속 듣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결과적으로 판을 깔아준 이들(이른바 '플랫폼 사업자')의 배가 불려지는 동안 그 안에서는 글과 말이 끝도 없이 소모되는 난맥상.

대니얼 오펜하이머의 <Exit Right>(2015)은 앨저 히스를 고발한 장본인인 위태커 챔버스를 포함한 여섯 명의 미국인 우파(로의) 전향자의 삶을 전향에 초점을 두어 재구성한 책이다. 이들은 일본처럼 국가 권력에 의한 물리적 폭력 및 정신적 압박을 받은 끝에 공식적인 전향 선언이나 성명을 발표하는 형식이 아닌 자서전을 포함한 문필 활동, 연설, 강연 등을 통해 기꺼이 스스로 전향 이유를 밝혔다. 살아온 시대 배경도, 삶의 이력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사망 직전에 비로소 고백한 어머니를 통해 뒤늦게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알게 된 히친스까지 포함하면 여섯 명 중 셋이 유대인이고,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이도 셋인데 이는 저자 오펜하이머에게는 모두 해당하는 사안이다. 그렇다면 아이비 리그 출신 미국 유대인과 전향 간의 모종의 관계성을 규명한 책인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른 다섯 명과 거의 어떠한 교집합도 없는 로널드 레이건이 중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떤 기준에 의해 이들 여섯 명을 골랐는지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끝까지 읽어봐야겠다.

 

조지 패커는 미국 우파 전향자들의 전향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소비에트로 대변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자행한 숙청과 폭력,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 못지않은 계급에 의한 위계와 권위주의 통치 등의 모순과 부조리를 목격했기 때문에/ 지하 활동에 불가피한 격리, 비밀 유지, 상습적 거짓말 등의 일탈 행위 등을 견디지 못해서/ 미국 리버럴리즘의 주요 원칙이자 대의인 다원주의 및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유주의를 혐오하게 되고 그 대안으로 보수주의를 선택하게돼서/ 정세 판단의 결과 더 이상 공산주의에 기대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해도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신념에 강하게 헌신했을 정도로 목적과 대의를 향한 집착이 좌파 사상의 대체제를 찾은 끝에 종교 정확히는 기독교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도 전향하게 되는 경우/ 보수주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자유주의를 경멸하는 개인적 성향이 자연스레 좋았던 옛 시절의 부르주아 자유주의로 회귀하게 되어서(특히 이렇게 공산주의는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도 마뜩치않아 우파 보수주의를 택했다는 이들에게서는 더러 '내가 변한게 아니라 자유주의가 변했을 뿐이고, 나는 그대로이고 바뀐건 민주당이다'라는 궤변도 보게된다)/ 30년대 대공황을 경험한 끝에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깨닫고서는 체제 전복보다는 체제 안에서 정부의 통치 공학에 힘을 보태기로 하거나/ 순수하게 이론적 관점에서 마르크스 변증법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이념과는 전혀 무관하게 순전히 사적인 이해 득실을 따라서 즉 돈, 명성, 사회적 지위 등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 때문에 전향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공산주의 및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그에 헌신했던 자신의 삶도 같이 실패했다는 비관적 판단이 선행한다.

 

그럼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어떨까. 이 책의 주제인 전향 이유에 초점을 맞춰 거칠게 본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2차 대전을 지지하고 전시하 영국민을 격려했던 조지 오웰과 자신을 너무 동일시한 나머지 스스로를 21세기판 오웰이라 여기며 부시 정권의 이라크전을 옹호했고,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자신과 정치적 신념을 공유했던 동료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을 목격한 끝에 그간 침묵했던 좌파의 오류와 실패를 지적하고 그들의 위선을 직접 벗겨내기로 한다. 연기자 노조 임원까지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은 생계를 위해 선택한, 본업과는 제법 거리가 먼 홍보 목적의 기업 강연 여행을 하는 동안 점차 노동자보다 사용자와 자본가의 논리를 내면화는 한편, <내셔널 리뷰> 같은 보수지와 위태커 챔버스의 자서전을 탐독한 끝에 우파로 돌아선 다음 자신의 천부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을 활용해 우파 이데올로그로 거듭나더니 마침내 백악관까지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코멘터리> 편집장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물질적 보상의 달콤함을 맛 본 노먼 포도레츠는 자신이 동경하던 노먼 메일러의 글쓰기 방식을 참고하고, 남들은 쉽게 밖으로 발설하지 않는 인종에 대한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았던 에세이의 성공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활용해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가 좌파 동료들로부터 집단적 거부를 당하고는 종교적 계시를 접한다. 이들 여섯 명 중 가장 앞선 시대를 살았던 대표적인 미국의 우파 전향자인 챔버스와 제임스 버넘은 공통적으로 스탈린의 대숙청과 독소조약 체결로부터 충격을 받고는 스탈린 정권 비판 수준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신념 자체로부터의 절연을 실행한다.

 

이론과 실천의 격차를 (경험이 아닌) 목격하고 실망한 나머지 미숙했던 실천이나 이론의 적용을 탓하는게 아니라 아예 신념 자체를 철회하는 과정은 충분히 있을법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한 쪽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데 실패한 소비에트 '정권'만을 비판한다면 그 반대 쪽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 신념 자체를 거부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을 향한 철저한 자아비판까지 행한다. 그런 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줄곧 최우등생이었고 학자로서도 전망이 밝았던 제임스 버넘의 전향은 주목할만하다. 그의 저서 <관리자 혁명>(1941)은 이른 시점에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언한, 그 자체로 높은 지적 성취이자 동시에 정교한 전향 선언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춘 사람답게 버넘에게는 늘 체제와 목적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중 가장 합당한 선택지처럼 보였다. 그런만큼 그의 전향은 이 책의 등장 인물들 중 가장 뜨겁고 드라마틱했는데, 트로츠키와 직접 주고받은 논전은 나중에는 조야한 수준까지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이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다. 불과 몇 해 전 <퇴각하는 지식인들>이라는 글로 우파 전향자들을 비판했던 이가 그로부터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비판하던 바로 그 대상이 됐다는 것은 일견 조소를 당할만한 일이기는 하나, 정작 트로츠키 분파는 그의 전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버넘에게 트로츠키주의가 절실하지 않음을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부유한 성장 배경,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 그리고 혁명 세력 이외에도 자신과 세상을 연결할 다른 수많은 연결고리가 그에겐 남아있었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에 거는 절실한 기대와 달리 인텔리겐치아 버넘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지적인 작업의 일환이자 그 자체가 오롯한 지적 구조물이었기에 처음 접할 때 만큼이나 떨어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본 것이다. 버넘의 옛 동지들이 놀란건 그가 전향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 정도가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의 내용을 하나하나 공개적으로 부정해나갔다.

 

젊었을 적부터 늘 현대 사회의 위기를 근심해온 위태커 챔버스는 공산주의가 결코 그 위기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계시를 어느 날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믿고 의지할 무언가가 없이는 그가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조우한 '신'이야말로 또다른 대의의 연장임을, 마르크스주의의 대체물임을 그는 과연 몰랐을까. 대개의 우파 전향자들이 공유하는 종교(정확히는 기독교)에의 헌신이 대의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보이는 공통점이라는 점에서 챔버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 공통점이 의미하는 바를 날카롭게 간파한 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종교세계 자체로의 퇴폐는 거의 항상 현세적 개인의 현세적 죄를 인간 일반의 원죄로 해소해버린다는 관념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 이 현세적 개인 책임의 해소라는 관련."

 

이렇게 본다면 우파 전향자의 종교적 헌신은 죄책감의 우회적 고백이자 현실 도피 그리고 책임을 거부하는 비윤리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매우 크고 편안한 울타리를 벗어나 정반대편에 있는 또다른 크고 편안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건 선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반쯤 정해진 필연에 더 가까운게 아닐까. 과거의 공산주의자가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가 되는건 정말 방향을 바꾼걸까. 아니면 훨씬 멀리있는 동일한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중간 경유지를 살짝 바꿨을뿐인걸까.

 

노먼 포도레츠는 늘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은 주장을 한다면 두려워 않고 밀어붙이는 강한 배짱도 있었다. 흑인에 대한 양가감정을 솔직히 밝혀 우호적인 반응을 받았던 것처럼 좌파의 위선도 씻어낼 수 있기를 바랬다. "명쾌함, 책무, 종교, 권위, 전통적 성별,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다시 명쾌함", "진리는 간단하다. 심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좌파 공동체의 일원이기를 거부하고 유명 인사가 되고 싶다고 선언한 셈이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좌파로 규정했던 데이빗 호로위츠는 자신의 지인들이 같은 좌파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을 결정적인 전향의 동기로 삼는다. 흑인 시민권 운동을 이끌고 관련인들을 변호했던 저명한 여성 변호사가 자신의 클라이언트이자 연인으로부터 살해됐을 때 그는 좌파 내부에 여전히 팽배한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비판하기로 한다. 게다가 이 사건은 그보다 먼저 있었던, 휴이 뉴튼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의심되는 여성 활동가 살인 사건의 반복이었다. 그렇다면 호로위츠는 정확히 말해 사람에 실망했지 신념 자체에 실망한건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챔버스와 버넘의 또다른 반복이라 할만하다.

 

히친스의 결정적 전향 동기는 보편적 정의감(거기에 더해지는 일말의 공명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시 정권의 이라크전 개전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허구성이 훗날 드러나면서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이미 그의 신체가 조금씩 스러지기 시작한 이후였다. 그가 당시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대해 생전에 공개적으로 후회나 유감을 표명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언젠가 훗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정보로 인한 오판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회의나 두려움 같은건 처음부터 그의 고려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가용 정보만으로 결정한 자신의 스탠스에 대한 확신과 명분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을 자처하는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을테니.

 

전향을 외부로부터 강제된 사상의 전환이라 규정한 츠루미 슌스케의 정의를 엄격하고 좁게 적용한다면 이 여섯 명을 '전향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한자 조합어 '전향'(転向)이 우익이 득세하던 1930년대 일본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최초 고안된 개념임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용어를 채택하지 않는 한 기표만 전유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의해 '강제'된 '전환'이 아니라면 물어야 할 질문은 이들의 정치적 입장 전환이 진정 자발적인지의 여부이다. 국가 내지는 공권력이라는 강고한 타자로부터 독립된 주체적 선택인가라는 소극적인 의미의 자발성을 묻는게 아니라, 전향자의 결단이 어떠한 '내재적'인 논리로부터 파생했는지를 세세하게 따져보는, 즉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반성했는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우선 이들이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는가 아니면 더 심층적 수준에서 기존의 신념 자체를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론이 현실에 우선하지 않는다면, 즉 이론이 현실과 유리된 채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현실을 추상화한 개념으로서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론과 신념의 부정이 마냥 비판당하기만은 어렵다. 이론이 현실로부터 추출된다는걸 인정한다면, 현실이 기대(가정)를 배반했을 때 그 파생물인 이론까지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와 신념의 부정이 오로지 이론적 층위에서만 행해진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론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과정에 개입한 무수한 우연과 의도치 않은 요소는 별개로 치더라도 결국 전향은 인간이 내리는 결단이고 거기엔 대상을 향한 온갖 감정이 투사되어 있다. 영화 제작 조건을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면서 결국 제작 자체를 사보타주했던 노조를 보면서 느낀 레이건의 감정,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자아비판이나 반성이 없는 급진주의 운동가들을 보면서 호로위츠가 느낀 감정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최대한 균형잡힌 시선으로 보려고 하더라도 레이건은 자신의 물질적 기반이 풍족해짐에 따라 우선 정치적 스탠스를 바꾸고 난 뒤에 그걸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향의 이유를 사후적으로 찾은 것처럼 보인다. 히친스는 생전에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몇 기준에 비추어 자신을 우파라고 호명한다해도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의 그 발언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은 끝내 전향하지 않았다는 우회적인 항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전향은 자발적이기도 하고 '자발적'이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들 중 현실의 정세 변환과 상관없이 이론에 진정 충실했던 이는 누구인가.

 

적절한 분노와 적당한 명분, 씁쓸한 자기연민과 부족했던 인내, 지나친 확신과 넘쳤던 자기애는 경험을 투사하고 상상을 확증하며 자신만의 전향 경로를 형성해나갔다. 하지만 나에게 너무나 정합적인 논리가 타인에게도 그럴까. 앨저 히스를 고발하기 전, 챔버스는 히스에게 자신과 함께 전향하자고 권했으나 그로부터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그저 정신적 자위행위일 뿐이네'라는 대답을 들었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배제한 온전히 스스로의 판단 하에 얻어낸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이들은 얼마나 고려했을까. 인식의 지평 사이에 놓인 결코 쉬이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간극을 가리켜 세계관과 사상과 이데올로기라 명명한다면 불가능할 것 같은 그 간극을 뛰어넘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체계적으로 축조된 것처럼 보이는 사상이라는 단단한 건축물 사이사이에 그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하며 물컹물컹하고 어두운 무언가가 들어앉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건축물의 경도가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져내릴 때 간극을 뛰어넘는 일이 가능해진다. 오롯이 논리와 이론으로만 사상이 축조된다면 전향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붙어있는 단단하지 못한 그 무엇, 그러니까 이 여섯 명의 전향자들이 드러낸 분노, 공감, 비애 같은 감정과 위신 같은 (세속적인), 한마디로 (매우) 인간(적 특)성까지도 사상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염두에 둘 때 전향 문제를 사유하는 다른 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행간에서 찾아내려 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후기에서 밝히듯 저자는 이 여섯 명의 전향 '원인'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는데, 이는 출간 후 있을지모를 필화 등을 피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저자 또한 집필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이 점점 더 어렵다고 느낀 때문은 아닐까. 이들 여섯 명은 현실에 패배한 강직한 이론가가 아닌 회의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구현에 실패한 이론보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인간을 더 회의하는.

 

6인의 미국인 우파 전향자와 1930년대 일본의 전향자들 간의 결정적 차이도 바로 이 회의가 드러나는 방식에 있다. 권력의 강제에 의해 대중에게 자신의 달라진 정치적 입장과 생각을 공개 표명한다는 전향성명서 형식에 전제된 작위성은 어쩔 수 없이 성명서를 하나의 텍스트로 대하게 한다. 텍스트의 행간을 파악하고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그 안과 밖을 모두 살피려는 노력이 요구되는데,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쓰고 발표한 글이나 책, 연설에서는 챔버스 등이 경험한 (이론과 인간을 포함한) 회의의 '속내' 내지 '느낌'이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는 반면 전향성명서에는 부재한다. 한마디로, 전향성명서에는 전향의 절반만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확인한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나머지 절반에 대해 생각해봐야한다. 

자살한 소설가라는 한 줄의 사실과 한 편의 글로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를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는 그저 지루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유명인들의 졸업 축사라는 관례가 있는 미국에서 월리스는 훗날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모 대학의 졸업 축사로 유명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인생의 ‘디폴트 세팅’을 거부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삶을 향한 애착을 전했다. 그랬던 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를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은, 삶이라는 투쟁에서 투항해버린 사람으로 (적어도 내게는) 기억하게 했다.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 셀러브리티의 정의라면 월리스는 일찌감치 타임지에서 선정한 미국의 문학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면서 이미 충분한 유명세를 얻고 커리어를 시작한 다분히 미국적인 셀러브리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는 이후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다. 월리스의 사후 십 년만에 뒤늦게 출간된, 데이비드 립스키가 진행한 인터뷰의 주제이자 핵심도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에 맞춰져 있다. 립스키는 월리스의 1996년 북투어의 마지막 며칠간을 동행하면서 행한 인터뷰 내내 반복적으로 이 유명세에 대해 묻는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유명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유명하다고 생각하는지, 유명세를 어떻게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그리고 이러한 반복된 질문에 월리스는 -완벽한 녹취록이라기보다는 편집이 가해졌음을 감안해야하지만- 짜증을 낸다거나 무시하거나 하지않고 진지하게 응답한다. 유명세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며 소설을 매우 열심히 쓰고있을 뿐이라는 패턴으로 일관하는 답변에는 그때까지 그의 이력과 삶의 태도를 유추하게 하는 면이 있다.

 

어렸을 때는 테니스로 그리고 대학에서는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학계에서 촉망받던 이가 학문이 아닌 픽션 쓰기로 전향을 하고 이후 비장르문학 소설가로서는 드물게 미디어로부터 전국적인 수준의 주목을 받는 등 그의 삶은 북투어를 돌던 삼십대 중반에 이미 화려한 이력으로 채워져 있었다.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늘 의식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 그 결과, 오만함이란 자신을 너무 의식하는 것이라는 나름의 정의까지 갖게 했다. 스스로를 너무 의식한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늘 애써왔고 그래서 이제는 독자나 비평가의 시선보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치열하고 성실한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월리스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한다. 이는 소설 쓰기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창조한다는, 다소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명제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썼다는 그의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주목하게 한다.

 

인터뷰어가 일인칭 화자가 되어 한 편의 에세이처럼 편집되는 미국 잡지 저널리즘의 일반적인 인터뷰 기사 스타일과는 달리 녹취록처럼 한 단어 한 단어를 그대로 받아쓰는 가운데 십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인터뷰어의 코멘트를 부분적으로 삽입해 가감없이 월리스가 한 말을 최대한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한 편집은 독자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월리스는 자신이 어떤 문학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좋아했던 영화나 tv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같은 쇄말적인 것부터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스러운 경험까지 처음 만나는 인터뷰어를 상대로 비교적 진솔하게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는건 물론이고 숙식까지 같이 하면서 가까워진 립스키를 향해 월리스는 자신의 지적 우월함도, 약물 못지않은 수준의 tv 중독도 모두 선뜻 인정한다. 그의 작품들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교양과 지성을 갖춘 백인 중상류층에게 주로 어필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일반적인 잡지 인터뷰에 할당된 지면을 훌쩍 뛰어넘는, 그래서 차라리 긴 대화에 가까운 분량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분주하게 대화 소재를 바꿔 나가는데 그토록 방대한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에 관해서도 월리스는 나름 사려깊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해보자면 9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미국에서 산다는 것, 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희생과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그것이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깊게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의 삶의 방식이며 거기서 헤어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숨기거나 꾸미려는 인터뷰이와 어떻게든 그러한 위장과 화장을 벗겨내려는 인터뷰어 간의 긴장감이야말로 인터뷰를 읽는 즐거움이라면 여기서 두 사람은 내밀한 친구간의 대화와 격식을 차린 공식적 인터뷰 사이를 수시로 오고간다. 월리스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이 편집되어 게재될까 걱정하며 빼달라고 부탁하는 등 때로 불안해 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솔직한 편이고, 지금은 잡지 기자이지만 본인 역시 소설을 출간한 적 있는 립스키는 월리스의 유명세를 부러워하는 또 한 명의 살리에르처럼 보이기도 하는 한편 월리스를 향한 우호적인 시선과 예의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밀도 높은 인터뷰가 정작 당시에는 최종적으로 잡지에 실리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심도있고 진중한 인터뷰 내용이 대중 음악 잡지라는 매체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실무적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이 인터뷰 역시도 월리스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공교롭게도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이면서도 월리스는 문자화 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측면에 대해 이미 일찌감치 인지하고 있었다. <끈이론>에 실린 어느 테니스 선수의 자서전 서평은 왜 스포츠 선수들이 쓴 책들은 하나같이 지루한지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하는데,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체득한 프로 운동 선수들의 기술과 실력은 그 느낌이나 정수를 언어화하기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틀에 박힌 뻔한 클리셰로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 현장 답사기와 감독론이 한데 섞여있는 길고 긴 글에서 린치를 초현실주의자가 아닌 표현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린치 영화의 불가지성을 논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자화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삶의 비의는 삶을 긍정하라는 메시지와는 상반된 결과로 끝난 월리스의 삶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향한 강한 열망을 줄곧 내비쳤지만 그가 안고 있던 내적 고통에 타인이 주목하기란 어려웠다. 누구나 다면적인 삶의 양태를 갖고 있고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단일하고 일관된 그 무엇으로만 이해되거나 설명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삶이라는 다면체이자 다중 우주를 인터뷰, 즉 언어를 이용해 그 대상을 특정한 캐릭터를 가진 단일 주체로 설정하고 그 아래에서 하나의 일관된 서사를 꿰어내야하는 문학 형식, 특히나 대화를 진행하는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일인칭 에세이 형식의 인터뷰 기사가 감당하기에 월리스는 처음부터 무리였던게 아닐까. 동일한 인터뷰더라도 현재 같은 단행본 형식이 아닌 잡지 지면이라는 제한된 분량 안에서는 지금과는 꽤나 다른 인상으로 재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천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척 하는) 천재 내지는 역시나 평범한 이들과는 확연히 남다른 성격, 습관, 취향 등을 가진 비범한 이의 삶을 구경하는 관찰기같은. 거기에 장안의 화제작으로 그의 신작이 회자되던 인터뷰 시점까지 겹쳐짐으로써 대중 매체에서 숱하게 소비되는 천재 셀러브리티의 또다른 표상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훗날 참조하게될 사료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료가 그러하듯 면밀한 비판적 독해를 요구하는 섬세한 텍스트다. 인터뷰이의 발화, 그리고 그것을 편집한 인터뷰어의 코멘트가 겹으로 둘러싸고 있기에 의심하고 상상하고 따져보고 행간을 미루어 짐작해봐야한다. 사후에 출간된 유명 소설가와의 생전 인터뷰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는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까지도 신빙성을 계속 의심받는 후자의 책과 달리 녹취록을 바탕으로 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두 책 모두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에게 단순한 취재 대상 그 이상이며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한다. 창작의 비결,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사적 비밀, 당대 사회 이슈에 대한 견해, 그리고 인터뷰어 자신의 인정 욕구 충족(또는 존재감 증명) 등등. 그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신비화된 예술가라는 광휘로 인해 답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자의 최초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해독해야 할 암호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 이런 기대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읽어본 결과, 많은 시간이 투입된 만큼 특정한 몇 개의 서사로 꿰어질 정도로 월리스에 대한 일관된 인상을 전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 인터뷰 시점과 출간 시점까지 사이의 시간의 공백으로 인해 상반된 인상을 전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연상시키는 무언가의 등장을 예상하며 불길한 예감을 피력한 대목은 그의 비범한 지성을 재차 확인케하고, 작가로서의 자의식에서 한순간도 헤어나오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부분은 인터뷰 당시보다는 그의 최후를 알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더 분명한 의미로 다가온다. 도널드 바셀미를 읽고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중력의 무지개>를 읽고 힘을 얻을만큼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매혹된 문학 청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십대 시절 <반지의 제왕>을 다섯 번 읽었고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와 tv 드라마에 중독되다시피한 대중적 취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월리스라는 암호를 풀기위한 단서는 도처에 있는 듯하지만 쉽게 조합되지 않으며 접근 경로는 군데군데 보이는 듯하지만 번번이 차단된다. 

 

단편집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장편 한 권도 제대로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나온 인터뷰집은 수사를 동반한 상찬부터 루머에 기반한 비판까지 작가를 향한 선입견만 강화하는데 그칠 수 있다(이를테면 본문 뒤에 자리한 옮긴이의 글). 어차피 언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립스키의 언어로 재현된 월리스는 타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예민하고 성마른 예술가보다는 비대한 자아를 가까스로 통제하고서는 그 복잡한 내면을 투사해 반영된 세상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만큼의(그러나 너무나 풍성하고 흘러넘치는) 언어로 재현하려 분투하는 지식인에 가까워보인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이 그 반대보다 더 많(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언어를 붙들고 씨름해야한다는, 자신이 처한 조건을 월리스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소설가로서 언어의 한계를 '체념'하고 받아들이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광대하다고 느꼈던 것이 그가 겪은 고뇌의 일부는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 월리스는 몰라도 립스키는 그 한계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 또한 그의 한계만은 아니겠지만.

도미노(2019)
실패작은 실패작으로서 갖는 위엄과 가치가 있다.

 

pain and glory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 때문에 좋은 영화가 완벽한 영화로 거듭난다.

 

a dandy in aspic(1968)

이후에 앤서니 만 영화를 이것저것 찾아봤지만 역시나 내게는 이 유작이 제일 좋다. 냉전시대 에스피오나지물에 워낙 약하긴하지만.

 

영춘각의 풍파(1973)

올해 본 최고의 무협영화.

 

uncut gems

벌려놓은 일을 하나하나 수습해나가는게 아니라 반대로 오히려 판을 더 키우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어서 스스로를 고달프게 만드는 상황들을 빌드업해나가는 각본의 구성이 제일 눈에 들어왔고, 그걸 연기해내는 애덤 샌들러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좋았다.

 

청소년 나타(1992)

소문으로만 듣던 차이밍량의 데뷔작을 봤다. 근삼십년전 이 시절로부터 현재의 그는 얼마나 멀리왔는가.

 

what's up doc?(1972)

올해 본 최고의 액션 영화이자 가장 신나게 본 영화. 확실히 이 시절의 보그다노비치는 뭔가 신기가 있었던 것 같다. 걸작을 연이어 찍어내던.

 

osterman weekend(1983)
-osterman은 주인공이 아니다.
-유럽 출신의 두 배우가 미국인을 연기한다.
-멀티미디어 파놉티콘 시대에 도래한 신경증적 정치스릴러
-러들럼의 소설은 늘 한결같다. 조직의 명령을 받아온 한 개인이 그 조직에 맞서 싸우는데 최종 보스는 늘 상황실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며 마이크로 명령을 내리는 중년 이상의 백인 남자
-아내를 뺏긴 남자와 뺏길 위기에 처한 남자
-결국 그래서 잠시 흔들렸던 공권력은 다시 안전하게 권위를 유지한다.

white heat(1949)

명불허전. 마지막 장면만큼이나 뜨거운 영화였다.


lifeline(1997)
이 정도 규모의 영화를 이렇게 안정적으로 연출하다니. 경력의 분기점이라 할 99년 <미션> 이전에 두기봉은 이미 완성된 연출가였던 거였음.

king and country(1963)
조셉 로지 영화를 올해도 몇 편 봤는데 그나마 기억에 남은건 이 작품이었다.

trial of chicago seven
mank

이 두 편의 넷플릭스 영화들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둘 다 미국 대선을 겨냥하여 만든 영화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개 시점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the ship sails on(1983)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라는 표현에서 보듯 배라는 설정은 어쩔 수 없이 세상(그게 누구의 세상이든지간에) 전체를 은유할 수 밖에 없는데 백년전 상황을 빌려 지금의 유럽을 근심한다.


last letter

첫인상은 일부러 자기 복제처럼 보이게 해놓았는데 뒤로 가면서 보면 스스로 커리어를 결산해보려는 심산이 있었던 것 같다. 동창회 느낌도 나고.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뜬금없이 중간에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가 나와서 뭔가 싶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인용으로 범벅된 영화였다. 뭔가 대단한 걸 보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나중에 인터뷰를 찾아보고서야 아귀가 맞으면서 감독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은 좋은 영화가 뭘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노우에 미쓰하루는 일본 공산당이 결성된 초기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중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당의 방향성을 두고 갈등한 끝에 결국 탈당 및 제명을 당하게 되고 이후 당원 시절을 그린 소설로 주목을 받는다. 이런 그를 두고 후지타 쇼조는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신념이 탈당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면서 이노우에를 사상적 비전향으로 규정한다. 소수자를 향한 그의 연민과 동료의식을 높게 평가했던 후지타가 하라 가츠오의 다큐멘터리 <전신소설가>(1994)를 봤을지 궁금하다.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90년 1월부터 사망한 93년까지 이노우에의 만년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한 <전신소설가>는 (아마도) 기획 당시에는 의도치 않았을 이노우에의 이면을 조명하면서 화제가 됐다. 이노우에의 자작 연보의 상당 부분이 거짓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는 그의 친인척 및 어린 시절 살았던 마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일일이 팩트 체크를 한 끝에 얻어낸 결과인데 이를테면 만주에서 출생했다거나,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 진학을 지원조차 하지 못했으며 마을의 유곽에서 살았던 조선인 소녀와 로맨스가 있었다는 등의 서술이 전부 허위 및 날조였던 것이다. 알고보니 그는 일본 본토에서 태어났고 중학교 지원은 물론 입학 시험까지 쳤으나 낙방했다가 이듬해 재수 끝에 입학했으며 그가 살았던 지역에 조선인들로만 채워진 유곽같은 것은 없었다.

후지타의 글을 통해 상상되는 이노우에의 이미지와 하라의 다큐에서 재현되는 이노우에는 제법 차이가 있다. 2시간 30여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의 초반 10분만에 이미 이노우에의 캐릭터는 빠르고 직관적으로 구축된다. 90년 1월 자택에서 열린 신년 모임에서 그는 자신이 선배이자 선생으로 모시는 하니야 유타카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 짓을 하던 어느 방문객을 향해 오랫동안 큰 소리로 꾸짖던 끝에 기어이 그 사람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게 만든다. 여기서 이노우에의 어투나 표정 그리고 멘트는 일종의 연기처럼 보이는 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끝나고나면 아닌게 아니라 바로 그 다음, 그는 돌연 여장을 한 채 무대 위에 올라 지인들 앞에서 춤을 추며 아예 본격적으로 연기를 한다. 이 두 장면을 나란히 이어붙인 편집은 당연히 의도적이다. 이노우에라는 사람의 어떤 본질을 포착했다는 판단이 거기에는 있을텐데 '범한 진실보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게 낫다'는 나중에 삽입되는 이노우에 본인의 발언이 바로 그 본질을, 자기자신에 관한 진실을 은연중에 노출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다른 자신이 있으며 그 다른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발언 또한 이를 재차 확증한다. 

영화의 전반과 후반은 각각 이노우에의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를 조명하는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공개 강연이나 지인들과의 대화 장면이 주로 전반부를 이룬다면 투병 생활에 초점이 맞춰진 후반부는 그의 사적인 면모에 집중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노우에의 실체가 벗겨지는 것도 여기서부터다. 전반부에는 경력 초기부터 일반인(주로 성인)을 상대로 소설 쓰기 강좌를 계속해 온 이노우에가 자신의 '제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들 중 상당수의 여성들과 불륜에 가까운 관계를 이어왔음이 암시된다. 주위에 늘 자신을 흠모하는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것으로 재현되는 그의 이러한 표상은 소설가가 '선생님' 대접을 받던 한 시절을 환기함과 동시에 후반부에 나올 자연인 이노우에와 대비를 이루면서 그 경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암 진단, 수술과 재활 그리고 재발로 이어지는 투병 생활을 다루는 후반부는 tv에서 흔히 보는 휴먼 다큐처럼 얼핏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한부 판단을 받은 이노우에가 "의사의 말에 설득력이 없다"면서 같은 내용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언변'이 중요함을, 즉 말의 형식과 전달력을 강조하는 장면을 통해 하라가 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서사의 일관성이 확인된다. 소설가이자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거짓말쟁이의 본성을 드러내는 이러한 언술은 그렇다면 소설가 이노우에와 시종일관 남들 앞에서 자신을 꾸미려고 노력하는 자연인 이노우에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음을, 따라서 어쩌면 그를 향한 범속한 윤리적 판단을 거부해야하는게 아닌지 관객의 (그 직전까지 이어왔을) 확신을 흔든다. 
 
하라의 전작 <가자 가자 신군>(1987)처럼 이번에도 대상인 이노우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신중함이자 특징이다. 이력을 위조한 이노우에를 비판할 의도가 있었다면 그 부분에 지금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할 뿐 아니라 그 지점에서 영화가 끝났어야 했다. 진실을 확실히 규명한다는 목적 하에 이노우에를 향해 연출자인 하라가 직접 질문하는 장면도 들어갔어야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카메라 뒤에서 그런 과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본편에는 그러한 대목은 없다. 본편에서는 오히려 그 이후의 전개가 더 중요하다. 질문은 커녕 일체의 보이스 오버 나레이션 없이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동안 그저 관찰자로서 이노우에를 바라보기만 한다. 오쿠자키 켄조가 마치 극영화의 주인공처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목표와 신념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이다. 현실판 돈키호테 같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다음 장면에서 무슨 행동을 할지 관객은 (상대적으로) 쉽게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에 관객은 각자의 입장에서 그를 수용 또는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전신소설가>의 이노우에는 오쿠자키만큼 영화의 전면에 굳건히 구축된 하나의 캐릭터로서 입체화되지 못한다. 이는 우선 이노우에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오쿠자키보다 훨씬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행동하는 영웅보다는 고뇌하며 독백하는 지식인 캐릭터에 가깝다. 따라서 연출자와 대상 간의 긴장과 갈등 역시 이 작품에서 더 암묵적이며 복선화되어 있다. 진짜와 가짜, 소설가와 혁명가, 견결한 신념을 갖춘 거짓말쟁이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하라 가즈오는 그것이 일도양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자신의 입장을 침착하지만 또렷이 표명한다. 이노우에의 발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지인들의 증언은 반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첨언에 가까워 보인다. 이노우에의 진술을 바로 부정하거나 뒤집는 이노우에의 형제, 친척, 마을 사람들의 어투는 결코 비난조나 규탄이 아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노우에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건 다 아는거 아니었냐는 식의, 그를 진정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이들만이 가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례로 어떤 이는 이노우에가 어릴 적부터 '거짓말쟁이 밋짱'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짓말에 능했기에 허위로 연보를 썼다한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증언의 절정은 후반부에 이노우에의 아내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세토우치 자쿠초가 이노우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변호처럼 들리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을 요약한 한마디이기도 하다. 하라의 입장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의 핵심이 허위 서술 비판과 사실 관계 규명이 아니라면, 이마저도 이 다큐의 서사를 완성하는 일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 서사란, 그러니까 이 다큐의 주제는 뭘까. 

이노우에의 거짓이 하나둘 밝혀짐에 따라 하라 본인이 느꼈을 혼란을 풀어가는 것으로 촬영과 편집의 중심이 옮겨갔을 것임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밝혀질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과거를 윤색한 이노우에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걸까. 지금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이노우에라는 이 모순적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궁금증 끝에 하라가 얻은 잠정적 결론은, 본인이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히 자작연보를 썼을 것이라는 어느 인터뷰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노우에가 만일 누군가를 속이려 했다면 그 대상은 자신의 독자가 아니라 젊은 시절 공산주의 사상에 헌신하다가 철회한 후 소설 쓰기에 전념한 끝에 무언가를 완성하려 했던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또 하나의 완결된 소설 같은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이노우에가 그렇게 한 쪽에 있다면 그 맞은 편에는 거기에 도전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본, 자신만의 이노우에 미쓰하루라는 또다른 텍스트를 새로이 써나가는 하라 가츠오가 있다. 이 두 명의 예술가간의 조용한 대결과 긴장이 본편을 관통한다. 
 
1990년 정월에 자택에서 열린 모임에서 이노우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씩씩한 청년같은 위세와 풍모로 시종 좌중을 압도한다. 3년 뒤 같은 자리에서, 장기간 투병중인 그는 수척하고 말수도 줄었으며 차분하다. 여생이 길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는 그에게 초대한 손님을 내쫓던 3년 전의 강단과 패기는 온데간데 없다. 한 때 헌신했던 당과 사상을 포기했을 때 그에겐 당적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대개의 전향자라면 자신과 가족의 안위 또는 안락함이 보장된 미래 같은 것이었을 테지만 이노우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듯하다. 어떠한 사상이나 주의도 품을 수 없는 휴머니즘 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음으로써 더 자유로워지는 문학이라는 야심이었을까. 적당히 윤색한 과거를 통과해 소설가로서의 현재를 써나가고 있던 이노우에의 삶은 '전향'을 논하기 이전에 그 자체가 하나의 '창작'이었고 그 창작은 후지타가 말한 '정신의 비전향'으로 인해 가능했다. 삶 그 자체를 한 편의 소설로 만들려했던 '전신소설가'가 바로 거기에 있다. 죽음을 코 앞에 두었던 93년 1월의 이노우에는 자신의 '유작'에 만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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