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외국어간의 관계가 그러하듯 영어와 한국어도 의미의 일대일 대응은 불성립한다. 단적으로만 보더라도 'make'나 'get' 'have'에서 보듯 '일어일의'한 경우는 드물고 이가 맞지않는 파편 조각처럼 의미의 외연은 물론, 범주와 층위가 맞지 않거나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또는 이미 뜻을 안다고 착각하다가 저지르는 의도치않은 오역은 불성실하다는 점에서 직업 윤리 위배이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경계심에 편 사전에서 그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숙어와 합성어, 속어, 유행어, 유명하지 않은 은어, 고어를 그리고 영영사전에서 한 열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뜻이 발견되기도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을 할 때는 차라리 내가 해당 외국어를 완전히 모른다고 가정하고 일일이 사전을 찾으면서 옮기는 것만이 역설적으로 착오를 줄이는 (이론상)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명사도 마찬가지다. 한글로 표기한 '에세이'는 '수필'이자 '잡문'이고 때로는 '칼럼'의 갈래이자 다시 이 모두를 포함하는 '산문' 전체를 통칭하는 외래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 'essay'는 결코 '손 가는 대로(隨筆)' 쓰는 글도, '잡스러운(雜文)' 글도 아니다. 'essay'는 형식이 다양한 글이지 무형식의 글이 아니므로. 차라리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거나 모두에 해당한다고 하는 편이 옳다. 즉 한국어 용법상의 '에세이'가 포함하는 외연이 넓은 나머지 언어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인플레이션 진행중인 화폐가 그러하듯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언어의 실질적 값어치도 하락한다.

 

영어권, 적어도 대학에서 'essay'는 정식 논문에 비하면 한창 짧지만 그만큼 한정된 주제를 깊게 다루는 학술문의 한 갈래다. 학술문으로서 갖추어야할 성실하고 양심적인 레퍼런스 작성과 표절 회피는 최소 요건, 즉 기본 사항일 뿐이고 여기에 세심한 선행 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논지 개진 그리고 간결하지만 명징한 논증 과정이 서술되어야 훌륭한(또는 읽을만한) '에세이'가 된다. 그렇다면 이같은 학계의 관습, 그리고 잡지나 저널, 신문 같은 언론을 포함한 광의의 '문학'계에서의 용법까지 고려해볼 때 에세이의 '비평문'으로의 분류야말로 의미의 스펙트럼상 중간값에 위치하며 동시에 가장 범용하지 않을까. 비평의 언어와 표현의 언어 사이에서 흔들린다면서 비평과 창작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가운데 두 장르에 전부 걸친 글을 썼던 바르트, 그리고 에세이는 에세이의 규칙을 창조하는 게임이라는 마이클 햄버거의 주장도 (메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의 윤곽을 그리는데 도움을 준다. 그중에서도, 어떤 결론도 내지 않은 채 그저 문서고 이곳저곳을 뒤져 찾아낸 문헌들을 떠돌아다니며 참조하는 것이 비평이라는 아감벤의 말이야말로 비평으로서의 에세이를 규정할 때 늘 참고할만하다. "모든 정통한 연구와 마찬가지로 비평 역시 연구 대상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대상의 접근 불가능성을 규명하는 데 주력한다". 결론이 없는 글이란 점은 언제봐도 좋다. 형식으로서의 에세이의 징표일테니까. 대상의 명확한 정체를 저자가 명시하지 않아도 독자가 그 임무를 이어받아 상상 속에서 계속 이어 쓰는 글, 이것이 에세이의 정체가 아닐까. 

 

'隨筆'이라는 명칭은 이미 조선 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지만 글쓰기의 장르로서 외래어 '에세이'에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각종 외국어와 외래어가 대량으로 수입되던 근대 이후일거라 짐작되는데, 그렇게 '에세이'의 도입 이후부터 '수필'은 본격적으로 다종다양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에세이'는 '수필'에 대응하는 외래어가 아니다. '수필'의 번역어가 아닌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수필'을 포함할 수는 있어도 환원될 수 없는, 외연이 넓어질지언정 그 전부를 포함한 총체는 될 수 없는 엄연히 독자적인 영역인 것이다. 수필의 정의와 분류에 관해서는 이미 분분한 논의가 나왔고 지금도 출판이 계속되는 한 그 변천은 진행중이다. 그러니 세세한 국문학적 검토는 차치하고, 우선 작금의 출판 동향으로만 본다면 저자의 '신변잡기'를 다룬 글을 '에세이'로 칭하는 경향은 분명히 있는 듯하다. 실제 일본(어)에서 어떻게 분류 및 표기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무라카미 아사히도 시리즈와 언더그라운드 연작처럼 서로 상반된 형식과 내용의 논픽션을 모두 '산문' 내지 '에세이'라 하는듯하고, 비슷하게 국내에서는 주로 문단 바깥에 종사하는 공인이나 유명 인사가 자신의 직업 세계나 (사)생활상의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생각 또는 특정한 견해나 주장을 주로 일인칭으로 풀어낸 글을 "(충격) '수기'", '에세이' '산문' 등으로 지칭한다. 한마디로 '미셀러니'는 넘쳐나는데 반해 '에세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에세이'와 '미셀러니'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생긴 언어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에세이는 진지하지 않은, 가벼운,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써볼 수 있는 시험적인(실험적이지는 않은) 문학 양식으로 통용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작은 결점도 쉽게 양해받지 못하고 진입 조건을 통과함과 동시에 양질을 보장할 때 비로소 에세이로서의 지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온당한 지위가 먼저 주어질 때 그에 걸맞은 질이 담보될 수는 없을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대신 진지한 사유와 장황한 사변, 쇄말적 흥미와 사적 고민, 그리고 비판적 논평과 자기반영적 성찰이 담긴 논픽션이야말로 '에세이'의 자격을 얻는 게 아닐까. 그러기 위해 요구되는 선행 조건은 한 가지다. 읽을만한 좋은 에세이들이 먼저 소개되는 것.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즘>의 첫 챕터를 읽으면서 느낀 아쉬움이 바로 이것이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말그대로 쏟아내듯이 던져지는 많은 에세이의 태반이 국내에는 미번역이었기 때문이다. 읽을만한 '본연의' 에세이가 소개되고 읽히면 'essay'가 아닌 '에세이'의 지위가 변화할테고, 그런 글을 읽은 한국어 사용자들의 '에세이'도 나올 것이다. 바로 내가 그랬다. 딜런이 쓴 일련의 에세이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저런 글을 한번쯤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으니까. 

 

교양이란 앎의 자기 갱신이라는 우치다 타츠루의 정의를 빌리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고착화된 스타일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자기 갱신하는 산문, 그것이 에세이다. 거기에 지속적으로 달라지려 애쓰는 저자의 노력과 수고까지도. 그래서 에세이는 단일한 대문자 'Essay'가 아니라 에세이'들'이 있을 뿐이다. 열 명의 저자가 서로 다른 열 개의 에세이 형식을 고안해내는 자유로움이야말로 에세이의 최고 장점이 아닐까. 팩트와 세세한 숫자보다는 과감한 비약과 담대한 상상과 그럴싸한 과장으로 채워진, 논리의 연쇄를 따르는 바쁜 잰걸음보다는 직관과 즉흥성을 따라 훌훌 유유히 날아가는 그런 글. 

 

그런 점에서 수필은 '청한(淸閑)의 문학'이라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말은 반만 맞다. 형식적으로 느슨하고 내용적으로 사물을 관조하는 유유자적한 은둔자의 글쓰기일 수도 있지만 감성과 이지가 엮여들고 논리와 객관이 직관 및 주관과 교차하는 가운데 각성과 환기를 촉발하는, 세속에 들어앉은 명민한 관찰자의 글쓰기도 에세이라는, 역시 또 하나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정의를 보태본다.

'우연히'라고 쓰는 것만큼 기실 우연하지 않은 것도 없지않을까 싶지만 정말 우연히 지난 밤, 비슷한 절정부를 공유하는 80년대 일본 영화 두 편을 연이어 보았다. 얼마전 타계한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이인들과 함께한 여름>(1988)과 모리타 요시미츠의 <두근두근 죽는다>(1984). 그런데 두 영화 모두 공통적으로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이 피칠갑을 한다. 전자에서는 알고보니 유령이었던 연인의 피를 뒤집어쓰게 되고 후자에서는 차 안에서 칼로 자결하는 장면이었다. 차이점도 있다. 전자에서는 그러한 절정부를 지나 주인공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반면, 당연히 후자에서는 주인공은 죽고 함께 지냈던 두 사람의 남아있는 모습으로 끝난다. 두 편 모두 피의 양이나 솟구치는 정도가 왠만한 고어물이나 스플래터물에 비견될 수준으로 길고 강렬하게 연출되어 있는데, 특히 전자에서는 해당 장면이 아예 흑백으로 처리되어있는 지경이다.

 

저명한 tv 드라마 작가인 야마다 타이치가 각본을 쓴 전자에서, 마흔이 된 주인공 드라마 작가는(야마다와 직업이 같다) 아사쿠사에 라쿠고를 보러갔다가 어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양친의 유령과 재회한 후 그들이 사는 집에 찾아가곤 한다. 재밌는 점은 유령을 만나는 이세계가 지금 살고있는 현실 세계와 구분되어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 즉 이승과 저승간 명확한 경계가 없는 상태라 언제든지 찾아가면 지금 자기 나이대와 비슷한 과거의 부모님을 만나볼 수 있다. 꿈을 꾼다든지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든지, 벽장 뒤로 들어간다든지 타임머신을 탄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거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만난다는 이 설정은 살짝 백투더퓨처를 연상시키는데 아닌게 아니라 여기서도 주인공과 유령 엄마간에 묘한 성적 긴장감이 배어있다. 백투더퓨처와 다른 점은 이 유령 부부와 아들이 서로가 부모 자식간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일찍 죽은 탓에 아들이 고생을 하며 힘들게 커서 불쌍하다는 대사도 나온다. 그럼에도 모자간에 성적 긴장감이 흐른다는 점은 그래서 특기할만하다. 물론 향후 이 점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지만. 연도상으로 보면 본작이 백투더퓨처보다 일 년 먼저 공개됐다.

 

후자는 최근 인터넷으로 공개된 모리타 요시미츠 연보에 따르면,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으나 지금은 그의 필모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한 편이라고 한다. 처음엔 유한 계급이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휴양을 즐기러 떠나는 목적의 별장에서 서번트와 그곳에 찾아온 어느 '고객' 그러니까 자살 예비자와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일거라 짐작하게 된다. 첫 몇 분만 봐도 이러한 설정을 대사에 의해 바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 예비자치고는 이번에 찾아온 손님의 일상이 이상하다. 새벽마다 일어나 빠짐없이 체력 단련을 하고 습관이나 말과 행동도 조금 이상하다. 영화를 계속 보면 결국 이 남자는 자살이 아니라 오히려 살인을 하러온 거였다. 80년대 화면에서 느껴지는 풍광과 노스탤지어도 좋지만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느릿하면서도 곳곳에서 덜컹거리는 지점이 돌출하다가 그 끝에 이런 분위기가 서로 충돌하는 절정부까지 요즘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블랙 코미디 분위기를 끝까지 정말 마지막 엔딩까지 유지하고 있어서 신선했다. 모리타 요시미츠 영화의 인장이라면 그게 어떤 장르이던간에 이렇게 마가 뜨는 공백과 여백 그리고 그 사이의 돌연한 어색함 같은 것인데 여기서는 충분히 영화의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두 사람 모두 최소 삼십여년 넘게 활동했고, 사망시까지 현역이었으며 2010년대까지 (모리시타는 정확히 2010년대 초까지) 필모그래피를 이어간, 80년대 이후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이었다. 비록 뒤로 갈수록 흥행성은 떨어졌고 대중과의 접점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 대신 오바야시의 경우 오히려 철저하게 자신의 작가주의를 관철했다. 러닝타임은 무자비하게 길어졌고 전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했다. 80년대에 연출한 두 사람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당시 최전성기로서 작품을 쏟아내다시피했던 88년의 오바야시는 힘이 넘쳤고 아직 젊은 신인에 가까웠던 84년의 모리시타는 재기가 번뜩였다.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영화를 보는 일은 이런저런 군더더기의 감상을 수반하게 되는 것 같다. 바로 어제, 야마다 타이치의 사망 소식이 최초로 외부에 전해졌다.

 

최종 수정: 231202

<미국에 대한 음모>는 20세기 미국에 대한 훌륭한 내용을 지니고, 주장을 훌륭하게 펼치는 섬뜩한 글이긴 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역할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 책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그것도 재밌고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낯설고, 약간 산만한 방식이다. 아시겠지만, <미국에 대한 음모>는 1940년 대선에서 파시즘에 동조하는 찰스 린드버그가 승리한 뒤 미국에 일어난 일을 다루는데, 책의 내용 대부분이 정확히 그 일에 관한 것이다.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은 대체 역사이다 보니, 그 결과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 책은 린드버그가 1940년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믿으라고 하고, 우리에게 이것이 우리 역사의 일부인 세상에 살아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반유태주의 횡포와 그에 잇따르는 폭동, 라구아디아 시장이 맡은 영웅적인 역할, 린드버그가 맞게 되는 운명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내용을 몰라서, 알고 싶기 때문에 계속해서 읽어나가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의 편안한 자연주의를 거스르는 식으로 작용하는 불편한 강박이다. 가령 ... 이 문장이 하는 일은 오로지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정보를 갖고 있다고 상상하라는 강요를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왜 그 정보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일까?
... 해리스는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자신이 대체역사를 상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역사의식도 상상해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대체역사는 배경에 속하고, 우리가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파편적으로, 모호하게 주어지는 사이, 작가는 스릴러 플롯을 진행시킨다. 로스는 '만약 이랬다면'하는 가정 자체를 핵심으로 삼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음모>를 읽고 있으면 긴 논문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고 만다.
닉 혼비,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 읽기>(2009) 중에서

논문 같은 느낌을 준다한들 독서의 재미나 즐거움과는 무관하다고(특히 필립 로스 정도 되는 작가에게는 더욱더) 눙치는 한마디를 남겨놓기는 했지만 여기서 혼비가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하다. 대체역사소설의 재미는 기발한 설정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설정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플롯(책 제목의 '음모'에 해당하는 원래 단어)을 포함한 서사에 있다는 것이다.
 
'문예' 소설(혼비가 일컬은 'literary fiction'에 대한 국역본 상의 번역어)보다 장르 소설에 애착이 있어서(혹은 매제인 로버트 해리스에게 더 우호적이어서) 그런걸까. 번역본상 본문만 오백여 페이지에 육박하는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에서 사건이나 플롯이 없고 설정과 배경만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혼비의 분류를 따르자면 이 소설의 대체 역사 설정은 잘 알려져있듯 린드버그가 1940년 대선에서 루스벨트의 3선을 저지하고 승리한다는 것이고, 플롯 또는 기본 줄거리는 린드버그가 히틀러와 협력을 함으로써 미국이 2차 대전에 뛰어드는 대신 자국 내 유대인 탄압을 서서히 전개하면서 유럽에서 벌어지던 '최종 해결책'을 미국에서도 진행하려하는 가운데 그 구체적 사례로서 유년기의 필립 로스가 바라본 자기 가족의 상상된 수난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제 가족과 친인척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당연히 현실과는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로스의 아버지 허먼은 실제로 뉴저지의 보험 중개인이었고 이 소설에서도 같은 직업으로 나오지만 이 평행 세계에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는 그런 식인 것이다. 다음의 짧은 구절이 이 소설의 향후 전개를 요약한다. 

내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너지는 것을 본 후 다시는 예전과 같은 유년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집에 있던 어머니는 이제 하네스에서 일하느라 하루종일 집을 비울테고 항상 곁에 있던 형은 방과후 린드버그를 위해 일하러 갈 예정이었다. 워싱턴 DC의 간이식당에서 그 어설픈 반유대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도전적으로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감당할 힘이 없었는지 버려진 아기 같기도 하고 아주 고통스러운 어른 같기도 한 모습으로 입을 크게 벌린 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린드버그의 당선이 내게 명백히 예고해준 대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걷잡을 수 없이 펼쳐지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무자비한 미래가 나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지만 우리 학생들은 그것을 '역사'로서 공부했다. 당대의 예기치 못한 모든 일이 종이 위에 필연적인 일로 기록되면 무해한 역사가 된다. 역사학은 예기치 못한 미래의 공포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러는 사이 재난은 서사시가 된다. 163p

 
대체역사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한번쯤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까. 그래서 대체 어쨌다는거지? 이런 평행 세계를 통해 뭘 주장하는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높은 성의 사내>도, 로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가상의 미국 유대인 가족 수난사를 왜 쓴걸까. 순전히 장르적인 내지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재미같은 답은 빼자. 그런 소설을 쓴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가혹한 평가이겠지만 적어도 내게 필립 로스의 소설이 장르물인 적은 없었다. 대체역사소설인 것보다도 실제 자신과 자기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일인칭 소설이라는 점이 무척 특이했다. 미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에 균열을 낸 아들 부시 정권 하에서 느낀 심리적 위기감이 이 작품의 집필을 추동한 큰 동력이라는 짐작을 해보는데, 이라크에 개전하기 전부터 이미 그리고 정권 내내 타종교와 타인종, 타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부시 정권을 가상의 미국사를 통해 은유하고 비판하려한건 아닐까. 외국 영토에서 적국과 전쟁을 치렀던 실제 역사를 역지사지해 자신이 속해있는(당연히 잘 아는) 집단 구성원을 주인공으로 자국민이 자국 영토 내에서 자기 나라 정부로부터 핍박받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지금 결코 남의 집에 불이 난 게 아님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현실 정치의 맥락과는 무관해보이지만 정치 일반에 연관된 또다른 집필 동기 가설도 있다. 바로 음모론이라는 음모 내지는 음모론에 대한 음모가 그것이다. 음모론이란 대체 뭘까. 개연성이 부족한, 개연성을 충족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일련의 음험한 네거티브 서사라고 음모를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은 각양각색의 음모론이 피어날 충분한 조건이 갖춰졌던 2차 대전 시점을 배경으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선동이자 전략으로서 쓰이는 현실 묘사와 이에 대한 비판, 그러니까 음모론이라는 이름의 음모, 또는 음모론을 이용한 음모라는 메타 음모론에 관한 풍자가 된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FBI가 찾아와 앨빈 형에 대해 조사했고, 우리 가족과 내게 위협적으로 던진 그 악의 없는 질문들을 다른 시장 사람들에게 던졌다. 그들은 이번에는 앨빈 형이 자칭 반역자이며 그 자신처럼 반미국적인 반항심을 가진 자들과 함께 린드버그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암시를 던지고 떠났다. 244

FDR가 직접 연단에 나서자 장내는 기쁨과 놀라움에 들썩였다. 
...
"여기 우리의 조국에서 반민주세력이 파시즘 미국을 위해 크비슬링의 청사진을 감추고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그리고 미합중국의 권리장전에 보장된 인간 자유의 위대한 비상을 억누르려는 음모, 미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유럽의 피정복 민족들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그런 독재정권의 절대권력으로 대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우리의 자유를 억누르기 위해 은밀히 손을 잡근 그자들에게 미국은 어떤 위협에 직면하거나 어떤 위협에 부딪혀도 우리 선조들이 우리를 위해 미합중국 헌법에 새겨놓은 자유의 보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시켜야 합니다." 250 251 

"...히틀러주의자들의 미국을 노린 음모는 반드시 멈춰야 하고, 그 음모를 멈출 사람은 여러분입니다. 바로 뉴욕 시민 여러분입니다! 1942년 11월 3일 화요일, 자유를 사랑하는 이 위대한 도시의 시민인 여러분의 투표권입니다!" 361

독일 국영 라디오방송국은 ... 찰스 A. 린드버그의 납치는 '유대인의 이익'을 위한 공모 세력에 의해 자행되었음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 그 음모는 전쟁광 루즈벨트가 주도하고 그의 유대인 재무장관인 모겐소, ....  프랭크퍼터, ... 바루크가 공모했으며 ... 유대인 주지사이자 금융업자인 리먼이 함께 음모를 실행중이며 ... 426

동트기 직전 랍비 라이오넬 벤겔스도르프는 "미국을 노린 유대인 공모의 주모자 중 한 명"이라는 혐의로 FBI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434  

린드버그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양 편 모두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수사학적 전략으로서 '음모'를 꺼내든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공모를 획책한 이적 세력으로 적시하는 가운데 이러한 고도의 정치적 술수가 평범한 국민이자 개인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필립 로스 소설답게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로스답지 않게 돌연 진짜 음모의 실체가 (다소 허무하게) 밝혀지면서 갈등이 종료되고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 언저리를 읽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면 혼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건지 이해되면서 비로소 그의 지적에 일부 동의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수사를 가지고 상대를 낙인찍고 그 반대급부로서 자신을 보호하고 부흥하면서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음모'라는 언표가 쓰이는 방식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부터 약 십 년 뒤에 등장하는 매카시즘에 대한 예언적 경고처럼(사실은 미래로부터 건너온 경고)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매카시즘이야말로 미국사에 기록된 음모론 서사의 정점일테니 말이다.

한편, 자신이 속한 민족을 수난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피해자이자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일은 그다지 진지한 작가의 미덕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로스는 자기 연민에 빠진걸까. 하지만 그렇게 몰아붙이기엔 이 소설과 동시에 번역 출간된 로스의 산문집 <왜 쓰는가>에 수록된 여러 편의 에세이와 인터뷰에서 확인되듯 로스는 경력 초기부터 꽤나 오랫동안 "유대인 혐오자"라는 공동체 내부로부터의 비판을 받아왔다. 본작에서 미국 유대인 전체는 동질적인 집단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으며 오히려 주요 갈등은 그들 내부의 대립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블린 이모와 벤겔스도르프 부부에 의해 뉴저지 유대인 공동체도 린드버그 지지와 반대파로 나뉘고 일부는 최종 해결책에 대한 공포로 인해 캐나다로 향하는 등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 이러한 공동체의 분열이야말로 어떤 위기 상황에서든 실제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적 면모이며,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전시 상황에서 음모론이 만들어지는 원인이자 음모론의 횡행으로 인해 파생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에서 피해자로 누가(어느 집단이) 설정됐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최고 권력에 의해 제기되는 음모론 같은 정치적 수사와 선동의 파급력과 거기에 저항하는 개인들의 노력을(그것이 얼마나 무력한지 또한 저자의 집필 의도나 목적, 메시지와는 무관할 것이다) 핍진하게 그림으로써 집필 시점의 현실에 강렬히 저항하는 것, 이 소설의 텍스트 안과 밖에서 목표하는 바는 여기에 있지않을까.
 
그런 점에서 소설가 로스의 역량이 발하는 대목이 바로 음모의 전모가 일지(log) 형식으로 밝혀진 뒤에 나오는 마지막 에피소드다. 필립의 아랫집에 살았던 셀던과 관련된, 기존의 로스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감동을 전하는 이 결말부에 이르면 휴머니티의 복원이라는 문학 예술의 무구한 노력을 이어가는 그의 공력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권력에 짓밟혀 무력하게만 보이던 개인들이 연대하며 공동체를 결속하고 유지하는 과정이, 훗날의 매카시즘을 비롯한 음모론과 자의적 권력을 극복하고 버텨온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이 어디에 있는지 담담하지만 또렷이 묘사되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논증이나 팸플릿, 에세이가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소설가가 갖춰야할 양대 조건이 소재나 설정상의 참신한 아이디어(발상)와 서사 전개, 즉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라면 본작이 '음모론'에 대한 알레고리를 포함해 전자만을 충족한다는 것이 혼비의 관점이겠으나 이 결말부만으로도 후자는 충분히 성취되고 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음모가 피어나고, 음모가 판치는 곳에서 인간성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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