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은 연호 사용으로 인해 서력을 사용하는 외부와의 관계를 망각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메이지 20년대와 30년대가 서양의 '세기말'이었다거나 다이쇼 시대와 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동시대였다는 것을 미처 연계해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이 의도된 것이라며 정곡을 찌른 이가 있다. '장기' 쇼와를 비판한 <'쇼와'란 무엇인가: 원호 비판>(1979)에서 후지타 쇼조'전후 30년'이 아니라 '쇼와 50년'이라 명명하는건 그저 일본인에게만 의미있는, 따라서 일본 바깥 세계와의 공명이나 연대 그리고 책임을 망각하는 일임을 암시하며 글을 시작한다. 

 

 

이처럼 현재의 역사적 위치를 측정하는 시간의 척도를 어떻게 선택할지는 보편적인 진실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혹은 다시 은폐하는가에 관련되는 근본적인 정신 태도의 문제다.

                                                                                      <'쇼와'란 무엇인가: 원호 비판>(『정신사적 고찰』 중 165p)

 

 

후지타가 보기에 쇼와가 50년 이상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히로히토가 단죄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전 시점에 일본이 할 수 있었던 세가지 선택 즉 천황제 폐지, 그 차선으로서의 히로히토의 폐위, 그리고 그마저도 안됐을 경우 마지막으로 최소한 연호라도 교체를 해야했으나 이 선택지를 전부 거부함으로써 쇼와가 50년 이상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연호란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나 정치적 사태를 국가가 인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시간을 분절해내는 엄연한 정치적 행위였기때문에 천황의 생몰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바뀌어온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존재"였다. 메이지 직전의 연호들, 즉 '분카', '분세이', '덴포', '고카', '가에이', '안세이'를 거치는 동안 단 두 명의 천황이 재위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는 자명하다. 그런데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연호는 "사태에 대응하는" 그러니까 "세계의 사태와 주술적으로 '교감'하는 독자적 정치 기능"을 잃고 일세일원, 그러니까 그저 천황의 생몰을 구분하는 무기적 신호로 변질되고만다. 그 결과 생전에 천황의 시호가 내려지지 않음에도 그의 사망에 의해서만 바뀌는 연호가 사실상의 시호처럼 쓰이게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쇼와라는 시대는 혼란스러운 시간 감각을 소구하게 되었다. 전전과 전중, 전후를 관통하는 일본 역사상 가장 긴 시간을 점유하는 연호가 됨에 따라 그 사용자간에 모호한 시간 감각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누군가 '그리운 쇼와'라고 말할 때 그것이 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고 전쟁을 벌이던 전전과 전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경제부흥으로 인해 물질적으로 여유롭던 전후를 말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시대 구분이라는 연호의 일차적 기능에 있어서 이는 분명 실패다.

 

그렇다면 후지타가 비판한 쇼와가 아닌 헤이세이는 어떨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됨으로써 냉전이 끝나고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본격화된 1989년에 시작함으로써 헤이세이는 나름 세계사와 연동하는 지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버블 경제가 막을 내리고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장기 경제침체를 앞둔 직전의 시점이기도 하다. 또한 냉전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 담론에 가려져있던 소수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직접 발언하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의의 희생자인 위안부의 실명 증언이 처음 나왔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역사수정주의와 우경화가 30년 내내 이어져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떠받치기위한 더욱 강고한 일본의 대미종속과 개헌 시도 등이 병행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두 번의 대지진과 옴진리교같은 테러 또한 있었다. 헤이세이(平成)라는 기표가 뜻하는 바가 별로 이뤄지지않은 시대였던 셈이다.

 

쇼와처럼 연호를 교체했어야 마땅할 정치적 과실이 아키히토에게 없는지 몰라도 유신 이후 최초의 생전 퇴위가 상징천황으로서 그 상징마저도 짊어지기 버거워 내린 선택이라면 이는 후지타가 말한 자기 정재성이나 사태에 대한 대응의 결과라 판단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징 천황이라는 지위를 고려해, 퇴위를 아베 정권에 대한 나름의 수동적 저항이라 보는 논평도 가능은 하겠으나 지나친 상상력과 의미 부여에 가깝다. 지금 아키히토의 퇴위를 둘러싼 일본 내외의 담론이 허황하게 보이는 면도 여기에 있다. 1월1일로 날짜가 바뀐다고 해서 당장 개인의 삶의 실질이 격변하지는 않음에도 신년에 맞춰 새로이 각오를 다지듯이 새 연호를 맞는 일본 국민들의 심정에 미치는 감회는 실재하고 존중해야하지만 실권 없는 상징일 뿐인 인간의 교체와 그에 맞추어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는 기표만 바뀐 또다른 상징 기호의 교체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담으려는 일 자체가 넌센스같아 보이는건, 새 연호의 한자 선택과 풀이, 나루히토에 대한 인물평, 향후의 정국 전망 등 지금의 관행적 보도 속에 정작 뭔가 빠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전 퇴위로 인해 연호가 그저 천황의 생몰을 표시하는 기호가 됐다는 후지타의 비판은 이제 철회되었다. 그러나 이를 기회로 연호를 계속 써야하는지, 연호가 과연 필요하긴한지, 그리고 더 나아가 천황제 존속 여부 같은 더 근원적인 논의에 대한 소식은 듣기 힘들었다. 아베는 이번에도 기민하게 개입하여 자신의 정치적 과실을 얻는데만 주력하는 듯한데 연호 교체를 개헌과 어떻게든 연계지으려는 그의 발언은 후지타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연호의 새로운 쓸모를 보여주는듯하다. 이전까지는 사물이나 사태에 대응해 연호가 바뀌어왔다면 아베는 거꾸로 새로운 연호 교체에 맞추어 정치적 사태를 도모하려 하기 때문이다. 실권자가 상징만을 가진 자를 농락하는 양상이랄까.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는 개인들의 감개와 무관하게 권력이 왜 그렇게 "시간에 대한 지명권"을 행사하려하는지, "'시간'의 국가적 영유"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는 지금이야말로 적기가 아닐 수 없다. 천황기관설 논쟁, 국체명징운동, 2.26사건, '성단'이라는 표현, '패전'과 '항복'이라는 표현이 없는 종전조칙, '인간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을 하고도 지속적으로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했던 히로히토까지 이 모두는 민주주의 체제보다 위에 놓인 천황제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키히토가 아무리 반전과 평화를 지향해도 정작 집권세력이 그를 방패막이 삼아 자신들의 우경화를 밀어붙일 수 있던 것도 실재하는 인간으로서의 천황과 무관한 천황제가 있기에 가능했다(링크).

 

어쩌면 훗날 역사는 나루히토의 인품이나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레이와를 개헌에 의해 평화 헌법이 폐지된 시대로, 아시아의 비극이 재연된 시대로 기억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새 연호의 한자에 관한 뜻풀이와 의미에 대한 해석보다는 새로운 연호를 맞은 일본이 과연 폐쇄적인 시간이 아닌 외부 세계와 연계된 보편적 역사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근심하고 고민해야 할 시점에 더 가깝다. 매일 사용하는 사이에 자명하게 되어버리는 "인습의 근본적 성질을 성찰의 울타리 밖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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